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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회용 진통제, ‘시발 비용’에 대한 고찰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반복한다고 하였나. 스트레스로 망쳐버린 기분을 어떻게든 회복시키기 위해 충동구매를 해버렸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니, 이 돈 왜 썼지 싶다. 잠깐의 기분 전환을 위한 일회용 소비, 괜찮은 걸까? 나를 이토록 돈 쓰게 만드는 세상은 무엇이 잘못된 걸까? 우스갯소리로 넘기던 ‘시발 비용’이라는 이 현상, 조금은 진지한 시선에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오늘의 일기

오늘은 정말 스트레스를 왕창 받은 날이다. 아침부터 비가 와서 비 맞은 생쥐 꼴이 돼서 학교에 왔는데, 하필이면 조별 과제 발표 날이었다. 그런데 여태 무임승차 하던 사람이 발표를 맡더니 완전 말아먹어 버렸다. 수업을 마치고 알바를 갔는데, 오늘따라 진상 손님들이 왜 이리 많은지, 완전 시달렸다. 하루 종일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집에 올 때는 택시를 타버렸다. 그리고 이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서 인터넷으로 옷을 왕창 사버렸다.

내가 스트레스만 받지 않았더라면, 이 돈 쓸 일도 없는데… X발… X발…!

 

‘시발 비용’이란 비속어인 ‘시발’과 ‘비용’을 합친 단어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비용’을 뜻한다. 위의 일기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아서 충동적으로 써버린 택시비와 옷값이 바로 이 ‘시발 비용’에 해당할 것이다. 시발비용은 SNS에서 처음 등장하여 어느새 널리 쓰이는 말이 되었다. 비슷한 의미의 신조어로 ‘탕진잼’, ‘휘소가치’ 등의 말이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기도 하다. SNS에서는 매일매일 자신의 시발비용 소비를 전시하는 사람들이 있고, ‘시발비용가이드’라는 콘텐츠를 통해 혹할 만한 상품을 소개하는 미디어까지 등장할 정도로 흔한 현상이 되었다. 우리 일상은 스트레스받는 일투성이다. 그리고 갈수록 사소한 일에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정신을 소모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기분 전환을 위해 시발 비용을 들이지만, 그것은 그저 소모적인 일회용 진통제에 불과하다. 어차피 스트레스는 또 받을 것이고, 시발 비용을 들여 결제하는 순간에 카타르시스를 느껴버린 우리는 또 돈을 쓸 것이기 때문이다. 나중에 후회하면서 한 번 더 ‘X발!’을 외치더라도 말이다.

 

아~ 스트레스!

시발 비용이 발생하는 원인은 간단히 말해 스트레스 때문일 것이다. 개인의 충동적인 성향도 한몫하지만 직접 원인은 스트레스라고 할 수 있다. ‘벼룩시장 구인구직’이 성인 남녀 1096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93.8%가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소비한 경험이 있었다. 스트레스의 원인은 직장(32.3%)이 가장 많았고 인간관계(22.8%), 돈(15.2%), 가사(12.6%), 취업(10.3%) 등이 뒤를 이었다. 그렇다면 우리의 수중에서 시발 비용이 빠져나가는 구멍을 막기 위해서는 스트레스를 막아야 한다는 것인데,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스트레스가 발생했을 때,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그 직접적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과연 가능한 이야기인가?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스트레스의 원인을 생각해보자. 공부, 과제, 알바 등이라면 그것들로부터 잠시 멀어질 수는 있으나 제거하기는 힘들 것이고, 선생님이나 상사, 혹은 가족이 원인이라면 더 불가능한 이야기가 된다. 교수님을 제거할 수는 없지 않은가? 따라서 우리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간접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

 하지만 해봐야 잠시 스트레스로부터 도피하는 것에 그칠 그 간접적인 방법을 통해 스트레스의 본질적인 해소를 꾀하기에는, 우리 사회의 스트레스 문제가 다소 복잡해 보인다. 우리의 스트레스는 만성적이며, 그 직접적 원인을 뚜렷하게 찾기 힘든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금 멀리서 바라보면, 우리가 주로 받는 스트레스는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개개인의 일상에서 스트레스가 발생하는 상황은 다 다르겠지만, 이 글에서는 스트레스를 사회적으로, 거시적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피로 사회

문화평론가 한병철은 ‘피로 사회’ 개념에 대해 말했다. 피로 사회란 누가 시킨 것이 아닌 자신이 스스로를 착취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는 사회를 말한다. 강한 규율로 움직이던 ‘규율 사회’에서 21세기에 접어들어 최대의 생산성을 추구하는 ‘성과 사회’로 변모한 지금, 현대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스트레스가 많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이다. 과열된 경쟁 속 시간에 쫓기며 남들보다 뒤처질까 걱정하는 우리들은, 남들보다 더는 아니더라도남들만큼 바쁘고 효율적으로 살아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끼게 된다. 효율성에서 벗어난 삶을 추구하는 사람은 ‘나태한 사람’이라고 평가받는다. 이런 성과 중심 사회는 개인들이 ‘심심할 시간’을 용납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깊은 사색의 시간에서 비롯되는 철학이 자리를 잃어간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피로 사회’에서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다양한 모습으로 자신을 착취하게 되는데, 자신을 과다한 스트레스로 몰아넣게 되는 것도 이 ‘착취’의 일부로 볼 수 있다. 이런 사회에서는 스트레스의 주원인을 명확하게 꼽을 수조차 없다. 분위기, 인식, 가치관 등 점차 벗어나기도 힘든 무형의 것들이 얽혀 스트레스를 생산해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복합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우리들은 스트레스에서 벗어날 방법을 절실하게 필요로 하게 된다. 그 방법으로 여러 가지를 비교하던 현대인들은, 합리적 소비를 포기하고 순간의 쾌락에 눈을 돌리게 된다.

 

시발 비용 권하는 사회

그렇다면 현대인들이 스트레스 해소를 위해 다른 방법도 아닌 ‘충동 소비’로 눈을 돌리게 된 경위를 살펴보자. 먼저 단순하게 생각했을 때, ‘돈 쓰는 일’은 너무나 간편하며 보상도 즉각적이다. 흔히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많이 추천되는 여가생활의 경우 비용은 물론이고 시간과 노력까지 들여야 하는 반면, 카드 한 번만 긁으면 상품이라는 보상이 즉각적으로 내 손으로 들어오게 된다는 점에서 충동 소비는 우리에게 참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따라서 돈을 좀 쓰더라도, 확실하고 빠른 행복을 위해 우리는 자꾸만 시발 비용을 발생시키게 된다. 다만 깊이 고려하지 않은 비계획적인 소비이기 때문에 나중에 후회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 치명적인 부작용이다.

이런 즉각적인 소비 행태는 소비자의 심리 상태와 기업의 마케팅이 맞물려 강화된다. 기업은 이윤을 내기 위해 어떻게든 소비를 이끌어내고자 마케팅을 하게 된다. 이성적인 상태의 소비자는 상품의 질이나 자신의 경제 상황을 따져보며 계획적인 소비를 하지만, 스트레스로 인해 감정적으로 격양된 소비자는 단순히 마케팅에 혹하여 충동구매를 할 확률이 높다. 터무니없는 마케팅 전략에도 스트레스가 쌓인 상태에서는 혹해버리는 수가 있다는 것이다.

피로 사회에 놓인 현대인들의 입장을 다시 들여다보자면, 이 사회에선 스트레스를 빨리 푸는 것도 곧 능력이 된다. 스트레스를 받고 충분히 고민하거나 감정에 푹 빠져서 생각할 시간조차 내기 힘든 일정으로 살고 있는 현대인들이다. 다른 건강한 방법, 이를테면 운동이나 여행 같은 방법을 택하고 싶어도, 쉬운 일이 아니다. 시간과 경쟁의 압박에 놓인 우리에게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얼른 훌훌 털어버리고 내일도 학교 가야지, 출근해야지. 그래야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지. 슬프게도 아주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래서 지금 당장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방법으로, 충동 소비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럼에도, 시발 비용

그렇다면 시발 비용을 현대인에게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방법으로 보는 것이 맞을까? 글쎄다. 재테크 전문가는 장기적인 저축을 위해서라도 시발 비용을 줄이라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누군가는 시발 비용을 들이고 계속 ‘X발’을 외치더라도 이것이 효과적인 스트레스 해소 방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적어도 앞서 설명한 현재 우리가 처한 상황에 맞추어 타협적으로 생각해보면 시발 비용이 최단시간의 고효율 스트레스 해소법이라고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이건 뭔가 잘못된 상황이 아닐까?

시발 비용을 지불해 본 사람들은 다 알 것이다. 일시적으로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한 그 마약과 같은 환각효과를 말이다. 하지만 감정의 파도가 잠잠해지고 이성을 찾는 동시에 효과는 이내 사라져버린다. 그 지출로 인해 다시 스트레스가 생기고, 또 다른 스트레스가 찾아오면 스트레스는 배가 된다. 축적된 스트레스는 다시 불필요한 지출로 이어지므로, 이는 ‘X발의 연속’이라는 악순환의 구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시발 비용의 지출은 당연하게도, 단순히 기분이 상하는 정도의 문제로 끝나지 않는다. 돈을 과하게 쓰면 결국 기회비용의 가치는 점점 증가할 것이며, 또한 그 금전적 손실은 돌이킬 수 없다는 점을 알고 있을 필요가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글쎄다. 우리의 만성적인 스트레스를 좀 더 근본적으로 해소할 방법이 필요하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다. 일회용으로 끝나지 않는 방법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그 방법을 고민하기 이전에, 구조적으로 스트레스를 양산해내는 사회가 우리를 스트레스로부터 조금은 풀어줬으면 하고 바랄 뿐이다. 지금 우리 개개인이 받는 스트레스는 오로지 우리만의 것이 아니다. 성과 중심 사회가 우리를 착취하여 남은 정신적인 찌꺼기라고 볼 수도 있다. 결론적으로 우리 사회에서 늘어만 가는 시발 비용은 현대인의 만성적 스트레스에 기여하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하루하루 헤쳐 나갈 일이 산더미인 우리에게, 스트레스 가득한 내일이 아닌 밝은 미래를 보여줄 수 있는 사회가 하루빨리 도래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오늘도 택시비를 긁는다.

 

김예지  remarkableride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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