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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신론자다.

인간은 늘 무언가에 기대고 싶어한다. 또 다른 인간에게, 혹은 인간 그 이상의 존재에게. 많은 이들은 인간 그 이상의 존재인 ‘신’을 숭배하는 ‘종교’를 가진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과는 다르다. 정확히 말하면 신과 종교를 믿지 않는다. 사람들은 왜 보이지 않는 종교와 신을 믿을까?

 

1. 그래서 나는 무신론자다.

보이지 않는 것은 종종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기도, 사로잡기도 한다. 깊은 바다를 두려워하는 심해 공포증과 불확실한 미지의 세계인 우주 공포증을 가진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심해나 우주와 같이 직접 찾아가 보기 힘든 것들은 저마다의 매력으로 인간을 사로잡기도 하지만, 경계의 대상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인간에게 두려운 것은 그뿐만이 아니다. 당장 눈으로 보이지도 알 수도 없어 두렵기만 한, 개개인의 운명이다. 자신의 운명을 두려워하는 인간은 나약하기에 의지할 것이 필요했고, 그러한 의지와 믿음이 종교를 만들어냈다. 보이지않는 운명에 대한 해결책으로 ‘보이지 않는 신’을 제시한 것은 어찌 보면 모순적이기도 하다. 신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인간을 사로잡을 수 있었으며, 그 때문에 수많은 불신론자를 만들기도 했다. 나 역시도 그렇다. 나는 신에 대한 믿음이 전혀 없다.

 

무신론의 사전적 정의는 신의 개입이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이론이다. 신과 같은 절대적이고 전능한 존재의 실체를 인정하고, 그러한 신이 세상을 조물하고 직접적으로 영향을 끼친다는 유신론과는 다른 정의이다. 그렇지만 무신론과 유신론은 정확히 반대의 개념은 아니다. 사전적 정의와는 달리, 실제로 무신론으로 일컬어지는 개념은 상대적이며 다의적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가장 성행한 유신론인 기독교와는 달리, 유교와 불교는 근본원리 자체를 고려했을 때 무신론에 포함된다. 좀 더 폭넓게 그들의 신을 초자연적인 존재로 정의한다는 특성을 고려한다면 유교와 불교는 유신론이기도 하다. 내가 생각하는 무신론이란, 감각적으로 인식할 수 없는 존재인 신을 믿지 않는 사상이다. 신의 은총이 내 몸에 깃든다거나, 갑자기 어떠한 기적이 일어나 구원의 징표를 받는다거나 하는 것을 직접 알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그렇지만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무신론에 관한 유명한 어구는 꽤나 급진적인 편이다. 공산주의자 카를 마르크스가 남긴 ‘종교는 민중의 아편’이라는 말이 있다. 당대 아편은 널리 남용되던 마약이었으며, 그 해악은 이미 이전의 아편전쟁으로 유명해져 있었다. 그는 종교가 민중의 현실적인 눈을 가린다고 비판했다. 다른 하나는 허무주의를 제시한 독일의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가 남긴 말이다. “신은 죽었다.” 이 말은 인간이 최고가치인 신을 상실했다는 의미로, 수많은 무신론자가 인용하는 어구이다. 마르크스와 니체의 무신론적 사상은 프랑스의 계몽사상과 그 맥을 같이 하며, 후에 실존주의자 사르트르에 의해 인간의 주체적 노력을 강조하는 사상으로 발전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은 어구들의 영향인지, 대부분의 무신론자들은 현실주의자 혹은 사회비판론자라는 통념이 있다. 무신론자들은 현실을 직시하기 때문에, 비과학적으로 보이는 종교를 믿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적극적인 무신론자와는 달리, 현대의 무신론은 소극적인 ‘불가지론(不可知論)’으로 나타난다. 나는 미스테리한 사건들을 다루는 TV 프로그램을 보고 겁을 먹는 편이고, 귀신이 나오는 만화를 보며 무서워하는 등 초자연적 현상을 완전히 불신하지는 않는다. 나는 불확실한 것들을 배격하지는 않지만, 불확신한 신과 종교는 믿지 않는다. 내가 직접 신을 인식할 수 없으며 경험할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 정도의 형상이 있는 초자연적인 그것들과는 달리 종교의 진위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어렵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으며, 그들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나는 신을 믿지 않는다.

 

누군가는 종교가 있으면서 신을 믿지 않기도 한다. 내 친구는 12년 동안 부모님을 따라 교회를 다녔지만 독실한 신자는 아니며, 신을 믿지도 않는다. 종교 활동이 일과이긴 하지만 큰 신앙심이 없다는 것이다. 교회 예배를 절대 빠져서는 안 된다는 부모님의 강압에 오히려 반발심을 느낀다고 토로하기도 했다. 인터넷에 무신론과 관련된 개념을 검색하면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라는 종교인들의 비판이 어려 있는 글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대체 종교와 신은 어떻게 생겨났길래 사람들이 그렇게 믿고 있는 걸까?

 

2. 신을 믿는 자들의 역사

내가 신을 믿지 않게 된 까닭은 고등학교 때부터 꾸준히 해온 역사 공부와도 관련이 있다. 선생님께서는 세계사를 가르치시며 종교와 관련된 부분을 자주 언급하시곤 했다. 그중 가장 인상 깊었던 말씀은 “대부분의 역사 교사는 무신론자이다.”라는 것이었다. 종교의 탄생을 역사적 관점으로 보면 인위적이기 때문이다.

 

종교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이질적인 부분은 전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신도 수를 자랑하는 ‘기독교’의 역사이다. 기독교는 유대교의 전통을 계승하며, 역사적 인물로서 그 진위가 모호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이를 섬긴다. 기독교에서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구원을 위해 내려온 메시아로 여겨진다. 기독교가 처음부터 주류의 종교였던 것은 아니었다. 기독교는 로마의 여러 황제에 의해 박해받았는데, 그 실상은 매우 참혹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초기에 박해받았던 까닭은, 로마의 황제 지배 자체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특히 로마의 하층민들은 기독교에 대한 굳건한 믿음으로 죽음까지 불사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하는데, 이는 기득권층의 두려움을 샀다. 결국 예루살렘은 로마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고 그 유산이 일부 파괴되기도 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기독교도들은 끊이지 않고 저항했고, 종교 활동 역시 점점 발전해간다. 결국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했고, 이어서 테오도시우스 1세에 의해 국교로 공인되며 그 입지가 견고해진다. 기독교는 그 안에서도 많은 분파가 있었는데, 예수의 신성성을 부정하는 아리우스파를 몰아내어 정통성을 이어나가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모순적이게도, 박해를 이겨낸 그들은 또 다른 박해를 시작했다. 고대의 로마 제국이 멸망한 이후에도, 기독교는 서양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위치에 있었다. 유럽 대륙에 막 국가를 세운 이민족들에게 기독교를 믿는다는 것은 교황과의 우호적인 관계 유지를 위해 필요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귀족과 서민에게 강제된 기독교 세계에서 교황의 권위는 점차 높아졌고, 황제권보다 교황권이 강해져 교황이 황제를 파문시키기도 하였다. 이는 세속적인 문제와 얽혀 일부 성직자들을 부패하게 했다. 가장 유명한 역사적 사건으로는, 신성로마제국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 축조와 교황령을 둔 전쟁비용 건으로 발급하기 시작한 ‘면죄부’ 문제가 있다. 당시 교황청에서는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돈을 내면 그동안 지은 죄를 면해준다는 증서를 발급해 돈을 끌어모으기 시작했다. 심지어는 강간이나 살해 등과 같은 죄도 면죄부로 해결할 수 있다고 해 사회가 혼란해졌다. 곧 기독교는 북유럽 쪽의 신학자인 루터와 칼뱅에 의해 성경중심주의로 분파가 갈라졌고, 이것이 바로 현대의 개신교가 되었다. 이처럼 종교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졌기에 불완전했고, 변질해 왔다고 할 수 있다.

 

3. 그럼에도 믿는다는 것은

종교의 역사는 그리 신성하지만은 않다. 사람들은 종교의 역사가 피로 얼룩져있다는 문제점을 과연 알까? 안다면 왜 그러한 종교를 믿는 것일까?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타인을 이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바로 상대의 행동을 따라 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난 기독교인 친구들에게 자문하며 그들의 생활을 직·간접적으로 경험해 보았다. 우선 교회에서 하는 활동과 공동체에 관해 알아보았는데, 종교 공동체가 성년이 될 때까지 계속 이어질 만큼 아주 끈끈했다. 치밀하면서도 꼼꼼한 그들의 집단은 놀라우면서도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또 성경 앱을 깔아 틈틈이 읽기도 하고 식전기도를 끼니마다 해보기도 했다.

 

단언컨대, 가장 인상적인 경험은 성경책을 읽는 것이었다. 교회를 다니는 친구에 의하면, 교회에서 목사님이 말씀하시는 내용은 성경의 구절과 스토리를 중심으로 성도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라고 한다. 또 믿음을 가짐으로써 어떤 증거를 받은 이들이 있는지를 나열한다고 한다. 거의 모든 문체가 ‘~하니라’와 같은 구어체로 쓰였고, 너무 많은 이름이 나와서 힘겨웠다. 심지어 분량도 무지막지하게 많아 전부 다 읽지도 못했다.

 

무엇보다도 성경을 읽으며 성경의 말씀 자체가 어렵고 낯설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중 하나는 히브리서 11장 1절의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라는 구절이었다. 믿음이 왜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가 될 수 있을까? 그렇다면 보이지 않는 기적의 존재인 신의 증거가 믿음이라는 것일까? 이 구절이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아서 인터넷을 열심히 찾아보다가 이에 관한 기독교인의 의견을 읽어보았다. 그분의 말씀에 따르면, 성경은 마음의 눈을 뜬 사람만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면서 성경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을 ‘맹인 부족’으로 비유하고, 성경을 이해한 사람을 ‘눈 뜬 맹인’으로 비유하는 우화로 성경을 맹목적으로 믿어야 한다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말의 앞뒤가 안 맞아도 일단 믿어보라는 것일까? 또 요한복음 20장 29절에서는, "너는 나를 보았기 때문에 믿느냐? 나를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복이 있다."라고 한다. 보이지 않는 것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은 조금 섣부른 일이 아닐까? 이렇게 시작된 의문은 성경을 읽는 기간 내내 지속되었다. 결국 성경은 전체적으로 신도의 믿음을 권장하고는 있지만 신에 대한 구체적인 증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눈으로 본 세계를 믿고 그 안에서 살아간다. 기독교에 관해 알아보고 종교인 행동을 따라 하긴 했지만, 나는 변함없는 무종교인이며 무신론자이다. 그렇지만 이번 경험으로 종교의 중요성을 직접 깨닫게 되었다. 종교가 필요한 사람들은 정말 많고, 그들의 공동체에서 서로 기도를 드리며 나누는 유대감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한편으로는 믿고 기댈 수 있는 존재가 있는 사람들이 부럽기도 했다. 기독교가 이제 내게 남긴 의문은 단 하나다. 내가 믿고 기대고 싶은, 나에게 ‘신’과 같은 존재는 무엇일까?

 

 

임유빈  ksshope@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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