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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보다는 '다른'그림 찾기가 되기를

1960년대 미국 배경인 데다 인종이 다른 두 남성의 로드무비라면 너무 뻔하지 않은가. 그렇다. 피터 패럴리의 <그린북>은 겉으로 보면 분명 인종차별 문제를 다루는 영화다. 그러나 <그린북>은 인종의 다름‘부터’ 시작한다. 영화를 차근차근 곱씹다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인종차별 문제 하나만을 꼬집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린북>은 두 명의 주요 인물이 이끄는 로드무비다. 돈 셜리(마허샬라 알리)는 흑인이지만 걸음마를 시작할 때부터 클래식 피아노를 배운 피아니스트다. 당시 전형적인 흑인의 삶을 살지 않았던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한마디로, 셜리는 교양과 우아함을 추구하는 천재 뮤지션이다. 반면 토니 발레롱가(비고 모텐슨)는 원칙보다는 반칙에 익숙한 다혈질 이탈리아계 백인이다. 비즈니스 관계로 만나게 된 이들은 ‘흑인 운전자를 위한 그린북’에 의존해 남부 투어를 시작한다.

 

(1) <그린북>의 시선

이 영화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흑인 피아니스트 셜리가 빗속에서 속마음을 털어놓는 장면(So, if I'm not black enough and if I'm not white enough and if I'm not man enough, then tell me, Tony, what am I?)이다. 표면 주제인 ‘인종차별문제’와 함께 또 다른 주제인 ‘인간 정체성 문제’가 나타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인종이 정체성에 포함된다고 볼 수 있다. 피터 패럴리 감독은 이러한 포함 관계를 파악해 인종차별이라는 구체적 소재로 인간 정체성이라는 인간의 커다란 고충을 드러낸다.

형식으로만 따진다면 <그린북>은 그리 신선한 영화는 아니다. 전형적인 로드무비의 구성을 취하는, 따라서 목적지보다는 여정에 집중하는 뻔한 전개이다. 버밍햄에서의 마지막 공연이 주인공들의 목적지이자 맥거핀으로 작용한 것은 이 영화가 우리에게 낯설잖은 로드무비라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장치이다. 그러나 ‘특별한 영화’라곤 할 수 있다. 시간이 지날수록 줄다리기로 시작했던 주인공 간의 관계가 점점 이인삼각으로 변해가는 과정이 흥미롭다. 서로의 발을 묶지만 각자 반대쪽 다리가 하나씩 남듯, 토니와 셜리는 서로에게 과한 태도 변화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메시지가 더 설득력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인물의 태도 변화가 조금이라도 질척하게 드러난다면 이야기가 다소 작위적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주인공들의 느린 태도 변화만으로 이 영화가 지닌 구성의 강점을 설명하기엔 무리가 있다. 두 주인공의 쌓아왔던 사소한 갈등들을 해소하는 장면은 줄다리기가 비로소 완전한 이인삼각으로 전환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셜리는 어린 시절부터 ‘흑인으로서’ 피아노를 치면서 느껴왔던 대중의 시선과 그로 인한 감정을 눈물과 함께 직설적으로 내뱉는다. 무대에 선 예술가의 자아와 무대 밖 흑인 동성애자의 자아가 맞물려 셜리를 괴롭힌 것이다.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자신을 토니에게 역정 내듯 토해내는 장면이 우리에게 진솔하게 다가온다. 관객에게도 태도 변화의 여지를 주는 셈이다.

즉 영화 <그린북>은 인종차별 문제를 넘어 ‘인간 존재’에 관한 논점을 제시한 거나 다름없다. 극단적인 두 주인공을 설정한 것은 세상의 다양한 인간 존재를, 극단에 선 주인공들을 한 장면에서 함께 그려내는 것은 ‘인간 존재에 대한 상호 이해’를 보여준 것이다.

 

(2) <그린북>의 미장센

영화에서의 미장센은 작품의 주제를 심오하고 감각적으로 표현하도록 돕는다. <그린북>도 예외는 아니다. 이 영화에서 눈에 띄었던 미장센 부류는 세 가지인데, ‘캐릭터 설정’ ‘인물 변화 과정’ ‘경쾌한 음악 사용 및 화면 구성’이다. 자칫 영화 인물들만의 이야기로 흘러갈 수 있는 부분들을 여러 장치가 메워주어 스크린에 빠져들게 한다.

 

① 캐릭터 설정

극단에 선 인물의 관계가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차지하는 만큼 캐릭터 설정을 크게 공들였다. 토니와 셜리의 가족과 친구들도 그들의 뚜렷한 캐릭터 설정을 위한 일종의 도구로 쓰이는 듯하다. 대표적으로 토니의 아내 돌로레스(린다 카델리니)다. 집안에서 아무도 반기지 않는 흑인 수리공들에게 선뜻 얼음을 띄운 음료를 내어주고 문 앞까지 마중하는 등 돌로레스는 유색인을 미워하는 토니와 반대 성향을 보인다. 이러한 성향 차이는 일상생활에서도 어렴풋이 드러난다. 영화 초반부, 토니가 술집에서 일을 마치고 침대에 누웠을 때 돌로레스와 나누는 대화(-Good morning/-Good night)는 관객이 흥미를 느끼게 하는 동시에 유색인들을 대하는 성향 차이가 존재한다는 힌트를 주는 것이다. 이렇게 다른 대사를 배치하여 캐릭터의 색깔을 짙게 덧칠한다.

 

자동차 안이라는 한 공간에서 많은 시간을 함께 보낸 토니와 셜리의 성향 차이는 두말할 것 없이 잘 드러난다. 대사 및 말투나 행동거지, 그리고 식성까지 거의 모든 것에 극성을 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영화의 주제의식을 잘 드러낼 뿐만 아니라 익살스럽게 다가온다. 둘의 그러한 오묘한 조합 속 중요한 대사는 ‘Eyes on the road, Tony.’(‘앞을 봐요, 토니.’)다. 적잖이 수다쟁이인 토니가 운전하며 뒷좌석의 셜리를 볼 때, 셜리는 토니에게 항상 이렇게 말하곤 한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이 대사를 표면상으로 볼 땐 운전을 조심하라는 경고지만, 작품의 주제의식과 결부했을 땐 그리 단순한 메시지가 아니다. 즉, 셜리의 대사는 두 가지의 이면적인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첫 번째는 토니와 셜리의 사고방식이 다르다는 것을 알려준다. 편법에 수긍하고 본능에 충실한 토니는 뒤를 돌아보며 셜리와 대화를 나누려 하지만, 이성적이고 진실한 삶을 살고자 하는 셜리는 자꾸만 앞을 보라고 이야기한다. 이처럼 토니와 셜리가 다분히 다른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장치로 보인다. 두 번째 이면적 의미는 인물들의 사고방식에서 더 나아가 영화의 메시지 그 자체이다. 세상을 바라볼 때 편견보다 이성과 합리가 앞서야 한다는 말을 관객에게 끊임없이 해줌으로써 작품의 정체성을 확고히 세운다. 이러한 점들이 영화 <그린북>에 유쾌감과 교훈을 함께 불어 넣어주는 요소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의상의 색깔도 고심한 티가 난다. 셜리가 토니의 편지를 처음 고쳐주었을 때 두 사람의 의상은 노란색 계통의 상의·검은색 하의·검은색 신발이다. 글쓰기에 취약한 토니는 셜리의 목소리를 듣고 편지 내용을 받아적는데, 이 장면은 처음으로 셜리가 토니를 칭찬한 부분, 그러니까 셜리가 거의 처음으로 토니에게 우호적인 태도를 보인 것이다. 여기서 두 인물의 비슷한 의상은 서로에 대한 태도가 긍정적인 방향으로 발전될 수 있다는 암시를 시각적으로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② 배경 음악 및 화면 연출

주인공 중 한 명의 삶을 형성하고 있는 것 중 하나가 피아노다 보니, 영화의 배경 음악도 피아노 소리가 주를 이룬다. 특히 셜리의 연주 장면으로 넘어가기 전에 먼저 연주 소리를 흘려 배경음으로 사용하는 부분이 여러 번 나오는데, 이는 이야기가 매끄럽게 흐르는 것을 돕는다. 단순히 배경 음악으로서만 재즈풍의 음악을 사용하는 것도 아니다. 인물들의 대사와 음악을 나란히 배치해 재즈 음악을 서사에 개입시킨다. 처비 체커, 아레사 프랭클린, 리틀 리처드의 음악을 미장센으로 쓰는 것이 그 예이다. 흑인이지만 재즈 음악을 잘 모르는 셜리에게 백인인 토니가 ‘당신네 사람들이잖아요!’라고 주장하는 것도 영화를 보는 우리의 고정관념을 비판하며 깨뜨리려는 감독의 시도이다.

루이빌에서의 공연이 끝난 후 관객이 기립박수를 치는 장면에서도 메시지가 담겨있다. 이 부분에서 카메라는 셜리의 모습만이 아닌 셜리 트리오를 멀리서 비춘다. 연주가 끝나고 난 뒤 셜리 트리오는 자리에서 일어나 관객들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데, 이어 기립한 관객들이 셜리의 모습을 앵글에서 가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끝내 화면에서 남은 것은 셜리의 얼굴뿐이다. 이 또한 주제와 관련한 메시지로 바라볼 수 있다. 무대에 선 순간은 예술가지만, 연주가 끝난 순간부터는 셜리도 흑인에 불과하다는 인종차별적인 시선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한 셜리의 대사가 나타나는 부분(And rich white people pay me to play piano for them because it makes them feel cultured. But as soon as I step off that stage, I go right back to being just another nigger to them.)도 있으니 미장센이라고 볼 수 있다. 이 또한 안일한 인종차별적 시선을 떠올리게 하려는 감독의 의도적 장치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③ 인물 변화 과정

로드무비의 가장 큰 임무는 주인공이 스스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주인공은 어떠한 장소나 사람을 찾아 떠나는 여정을 겪는다. 이 같은 방식에 근거한 영화 <그린북>이 드러내는 두 주인공의 성장은 여러모로 흥미로운 지점이다. 영화에서 설정된 여정인 남부로의 투어 일정은 두 사람의 인간 정체성을 확보하는 계기가 된다. 이 또한 사소한 미장센 수집으로 알아차릴 수 있다.

 

먼저 셜리. 그의 변화와 관련해 다양한 퍼즐들이 즐비하지만, 가장 큼직한 퍼즐 조각은 버밍햄의 식당 ‘오렌지 버드(Orange Bird)’에서의 클래식-재즈 연주일 것이다. 셜리는 클래식을 배웠지만 ‘백인의 음악’이라는 인식이 강한 클래식을 사람들 앞에서 연주할 수 없었다. 그저 백인들이 원하는 음악을 할 수밖에 없었던 셜리. 그러나 오렌지 버드에서는 ‘흑인’이라는 딱지를 내려놓고 오로지 ‘예술가’로서 클래식을 연주한다. 비록 흑인들이 즐겨 찾는 식당의 작은 무대이지만 식당 안의 모든 사람이 놀랄 만큼의 클래식 연주 실력을 뽐낸다. 그가 연주한 곡은 쇼팽의 에튀드 작품25 제11번 ‘겨울바람’(Chopin, Étude No. 11 in A Minor, Op. 25 ‘Winter Wind’)이다. 차례로 오르락내리락하는 멜로디의 ‘겨울바람’은 혁명적인 정열이 담긴 피아노곡이다. 아마 셜리도 이러한 피아노곡의 의미를 머릿속에 지닌 채 연주하지 않았을까. 살아오며 겪었던 불합리함과 비통함을 혁명의 선율에 담아 그대로 쏟아낸 것이다. 이 연주가 끝나고 곧바로 가게에서 악기를 연주하던 사람들과 함께 호흡을 맞추는데, 그때는 한 번도 시도해보지 않은 재즈를 선보인다. 이 곡은 리틀 리처드(Little Richard)의 ‘Lucille’. 토니와 셜리가 자동차 라디오에서 함께 들었던 음악이다. 대부분의 흑인처럼 살아오지 않은 셜리는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리틀 리처드의 노래를 처음 듣고 시큰둥했다. 그러나 오렌지 버드에서 ‘Lucille’를 자기만의 방식으로 연주해내며 ‘흑인이자 예술가’라는 정체성을 점점 개척한다.

 

토니도 크나큰 성장을 겪는다. 입담과 주먹만 믿으며 살았던 그의 심리 태도가 변한 것이다. 이러한 부분이 가장 잘 드러나는 요소는 ‘편지’다. 여정 내내 부인 돌로레스에게 쓴 편지의 내용과 어조가 많이 달라진다. 셜리에게 편지를 보여주기 전, 토니는 ‘나는 주로 햄버거를 먹어’ ‘배곯을까 걱정하지 마’와 같이 본인 중심, 즉 발신자 중심의 편지를 썼다. 그러나 셜리의 도움을 받은 후엔 수신자인 돌로레스에게 초점이 맞춰지게 된다. 토니가 타인에 대해 더 깊이 사유하고 고민하게 된 것이다. ‘검둥이’라는 표현도 그의 머릿속이나 목소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오히려 타인이 그러한 표현을 쓰면 회유하는 등 토니의 사고방식이 한층 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이렇듯 두 주인공은 크고 작은 일화를 맞닥뜨리며 ‘마주 보았기에’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고 존중할 수 있었다. 서로의 공간으로 진입하면서 각자의 움직임을 확대한 것이다.

 

 

 

우리가 직접 셜리와 토니로 살아가는 것은 어렵다. 우리 중 1960년대 미국 북부에서 남부까지 드라이브해본 사람은 극히 드물고, 물론 지금 당장 할 수도 없기에. 그러나, 적어도 <그린북>을 통해 셜리와 토니와 같은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지 않은가. 우리가 나란히 앉아 <그린북>을 볼 수 있는 한, 지금의 시간을 살아가고 있는 모두가 셜리·토니와 일면식 있는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다면, 다양한 사람, 나아가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살아가는 이 세상에선 우리도 21세기의 셜리이자 토니일 수도 있지 않을까. 바꿔말해, 우리 서로는 충분히 다를 수 있고, 다만 서로의 공간에 조금씩 진입하며 각자 살아가는 것이다.

여전히 그린북이 필요할 순 있다. 하지만 다를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해하면, 우리 안에 내재 되어있는 그린북의 내용도 조금씩 바뀌어 갈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끝에 다다라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그린북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없는 날이 왔으면 하는 바람이다.

홍기수  rltn03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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