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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 거리, 말할 거리, 소통의 거리

 

거리 위, 묵묵히 걸음을 옮기는 사람들 속에는 길을 지나가는 것을 잠시 미뤄둔 사람들이 섞여 있다. 마이크를 들고 열변을 토하는 사람, 연주하는 사람, 전시를 구경하는 사람,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 길거리는 아무런 목적성이 없는 장소인 것 같은데 이상할 따름이다. 사람들은 왜 소통을 위해 길거리로 나가는 걸까?

 

사람들이 사람들을 만나다
팔을 쭉 뻗었을 때의 길이, 약 46cm를 흔히들 ‘친밀한 거리’라고 한다. 사람은 반경 46cm 안에 누군가 있으면 상대방을 의식하게 되고, 또 좋아하는 사람과 있을 때는 무의식중에 46cm 이상 떨어지지 않으려고 한다. 길거리는 친밀한 거리로 가득 차 있다. 1초에도 몇 번씩 누군가가 내 옆을 지나친다. 수없이 사람을 만나지만 사실 아무도 만나지 않는, 길거리는 신비한 공간이다.
길거리가 소통 창구의 기능을 하게 된 것은 ‘거리’라는 장소의 특성 때문이다. 우선 유동인구가 많아서 별다른 절차 없이도 많은 사람에게 접근하기 쉽다. 또 정형화된 공간이 아니므로 사용하는 방식에 따라 어떤 목적으로도 변할 수 있는 공유 공간이기도 하다.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운 사람, 본격적인 참여를 부담스러워하는 사람이 접근하기 쉬운 장소이며 누구에게나 개방되어 있어서 편하게 이야기를 꺼낼 수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거리로 나가는 데에는 비용도 들지 않는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길거리에서는 어차피 모두가 행인이라는 인식이 있기 때문에 서로 무겁지 않게 다가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거리 위에서는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동시에 자기 얘기를 껄끄럽지 않게 꺼낼 수 있는 정도의 거리감을 유지할 수 있다. 그 거리감이 바로 사람들이 길거리로 나서게 하는 결정적인 동기가 된다.
길거리는 우리의 대화와 소통의 현주소다. 가상과 익명의 공간을 나와 ‘살아있는 사람’에게 말을 건네고 싶은 사람은 자연스럽게 길거리를 찾게 되었다. 사람과 사람이 얼굴을 맞대고 만나기 가장 편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중을 찾아가는 강연, 소비자를 찾아가는 판매자, 그리고 힐링을 찾아 거리로 나오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러한 분위기가 형성되자 자기표현을 어려워하던 사람들이 의견을 나누게 되고, 길거리를 지나는 잠깐의 시간 동안 유대감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그래서 거리로 나서는 것은 잠시의 위로가 되지만, 위로를 받기 위해서만 길거리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누구나 표출에 대한 욕구가 있고 또 그것을 억제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 이들에게 길거리는 의견 피력의 장소로 자리한다.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거리가 아닌 사람들을 만나러 가는 거리. 길거리는 우리가 주체적인 의견을 밝힐 수 있게 한다는 의미의 진정한 소통을 가져온다. 이제 거리 위에는 자연스럽게 콘텐츠가 넘쳐나고 있다.

 

누구나 참여하는 길거리
지난해 첫 회가 방영되자마자 살금살금 입소문을 타더니 유병재의 시국 버스킹, 조승연의 리더쉽 버스킹 등으로 연일 화제가 되었던 TV 프로그램이 있다. 말로 하는 버스킹 쇼, JTBC의 <말하는 대로>다. 출연자의 절반 정도는 익히 아는 연예인들이지만 반쯤은 대중에게 낯선 사람들이고, 하나같이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지만 반쯤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제 길거리 한복판에서 본인 사는 얘기 하는 사람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TV만 보더라도, 예전에는 명사의 강연이라고 하면 주로 정해진 장소에 소수의 사람을 초대하는 형식이었다. 2012년에 시작한 KBS1의 <강연 100°C>가 대표적이다. 강연을 들으러 가는 사람들은 출연자가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으므로 강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나름대로 기대를 하게 되는 구조였다. 그러나 요즘 대중에 소비되는 프로그램의 특징은 말하는 사람이 길거리에 마이크를 들고 나타나기 전까지는 그가 그 장소에서 강연할 것을 아무도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스피치를 듣는 사람은 우연히 그 시간에 그곳을 지나가던 불특정다수다. 강연을 듣기 위해 강연장에 찾아가야 했던 이전과는 달리 거리를 지나는 것만으로도 참여가 가능해진 것이다. 이렇게 되자 강연이 끝난 후 청중과의 자유로운 질의 시간도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꼭 강연에 국한되는 얘기는 아니다. 길거리를 쌍방 소통의 공간으로 선택한 예는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당장 길거리 인터뷰가 활발해진 것만 보아도 그렇다. TV 속 연예인이나 기자가 지나가던 시민과 인터뷰하는 것은 오래전부터 봐 오던 장면이다. 그러나 현재는 유튜브 크리에이터나 시장 조사자, 대학생 등도 취재를 목적으로 거리에 대거 나오고 있다. 길거리 인터뷰를 전문적으로 하는 개인 방송이 인기를 끌고 있고 응답하는 시민들도 목소리를 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좀 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부추기는 행사들도 있다. 2015년 문화가 있는 날 사업의 하나로 추진되어 명성을 얻었고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달려라 피아노’ 캠페인은 기증받은 중고 피아노를 새로 디자인하여 공공장소에 설치하는 프로젝트이다. 2008년 거리에서 만난 사람들끼리 대화했으면 좋겠다는 한 예술가의 소망으로부터 시작된 이 캠페인은 ‘Play Me! I’m Yours!’라는 타이틀이 붙은 스트리트 피아노를 통해 영국 버밍엄에서 뉴욕으로, 또 서울로 퍼지게 되었다. 지역의 공원이나 거리 위에 설치된 피아노는 누구나 연주할 수 있어서 주민들 간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달려라 피아노 캠페인의 모토는 지역 곳곳에 문턱 없는 공연장을 만드는 것, 즉 지나다니는 사람 사이의 벽을 허무는 것이다. 어쩌면 벽 그 자체였던 길거리는 누구라도 참여할 수 있는 자리들로 채워지고 있다.

 

거리 위의 마케팅
길거리는 판촉으로 넘쳐나는 공간인 동시에 생산자와 소비자가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거리 공연에서도 마찬가지다. 큰 무대가 필요한 콘서트와 달리 버스킹은 무대와 객석이 분리되어 있지 않고 관객의 지불 능력과도 상관없다는 특징이 있다. 행인들 모두가 초대받을 수 있고 공연하는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으므로 형식적인 제약 없이 예술의 공간을 만든다. 보는 사람의 반응에 따라 공연 내용이나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으므로 버스킹에 있어 소통은 아주 중요한 요소다. 물론, 공연을 보여주는 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홍보를 겸하고 있기도 하다.

버스킹(Busking) : 길거리에서 공연하는 것.

인디밴드의 전유물 같았던 버스킹은 최근 몇 년 사이 한층 범위가 넓어져 단체나 회사가 주최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대표적인 예로 아이돌 그룹의 버스킹을 들 수 있다. 퍼포먼스 위주의 아이돌 그룹이 길거리 공연을 함으로써 대중 누구든지 와서 즐기도록 하는 이벤트가 많아졌다. 인지도 없는 신인 그룹부터 유료 공연을 하면 거액의 돈을 벌 수 있는 인기 아이돌까지 수익을 포기하고 관객과의 거리를 좁히는 거리 공연을 선택한 것이다. 아이돌의 버스킹은 이미 팬인 사람들에게는 서비스 성격의 공연이 되고, 팬이 아닌 대중에게는 그룹의 이미지를 굳히는 홍보 효과를 가져온다. 음악프로그램에 나가거나 정식 콘서트를 여는 것보다 화제성이 좋아서 바이럴 마케팅 측면에서도 거리 공연의 가능성을 높게 치고 있다. 관객과 가까운 곳에서 공연하고 운이 좋으면 입소문도 탈 수 있으니 ‘게릴라 콘서트’라는 이름으로 거리로 나온 것이다.
최근 거리에서 많이 접하게 되는 팝업스토어도 같은 맥락으로 해석할 수 있다. 팝업스토어는 한두 달 정도의 짧은 기간만 운영했다가 사라지는 임시 매장을 말하는데, 브랜드의 이미지를 알리거나 제품 특징을 홍보하기 좋아서 거리 위에 자주 나타난다. 한 자리에서 지긋이 판매하는 게 아니라 사람이 많은 길거리에 반짝 나타나 소비자가 브랜드 상품을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이 시스템은 고객의 피드백을 반영하기 쉽다는 점에서 소통의 수단으로 쓰이고 있다. 상호소통에 의미가 있으므로 이윤을 남기기보다 홍보에 중점을 두는 경우가 많은데, 일례로 지난해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라인, 카카오톡, 애니팡 캐릭터들의 팝업스토어를 들 수 있다. 전용 갤러리를 열거나 기념사진 촬영 공간을 제공하는 등 기존 매장에서 보기 힘들었던 시도를 한 결과 실제 매장을 열었을 때 많은 고객을 유치했고 효과적인 마케팅이라는 평을 들었다.
길 위에 가판대를 세운 채 열리는 프리마켓 역시 소비자와 판매자가 직접 만나 활발하게 상호작용하는 예시의 하나이다. 누구든 자신의 작품을 선보일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는 프리마켓은 단순한 상거래가 아니라 생활 속에서 창작을 실천하게 도와줌으로써 소비자와의 적극적인 소통을 촉진한다. 테이블과 깔개 하나까지 스스로 준비하는 프리마켓 참가자들과 길거리 위의 사람들이 만나 새로운 상품 매매의 패러다임을 만드는 것이다. 일례로 개인 간의 중고 거래 시장인 ‘도떼기마켓’은 2012년부터 서울 각지에서 소비자들의 참여를 조장했고, 현재는 온라인에까지 진출하며 중고 거래의 새 장을 열었다. 마켓에 대한 소비자의 관심이 높아지자 거래량이 늘었고 시장 전체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킨 것이다.

 

 

매일 지나다니는 길거리는 끝내 ‘친밀한 거리’가 되었다. 소통을 찾는 사람들이 거리 위에서 만나게 된 것이다. 살다 보면 종종 입을 다물고 있어야만 내가 정상인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내 의견을 죽이고 조용히 있어야 나에게 피해가 닥치지 않을 것 같은 순간, 이게 아닌데 싶은데도 아무 말 하지 못했다면 이제 밖으로 나가서 밖으로 꺼내자.

최소현  7_3_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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