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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걸어가다

09:00 pm
- 익숙함과 성가심 그 사이

  왜 하필 이 시간에, 이곳에서 만나야만 했는지. 금요일 밤, 번잡함의 끝을 달리는 홍대 거리는 사람들로 시끌벅적하다. 그 거리 귀퉁이에서 쭈뼛거리며 친구를 기다리는 건 그다지 기분 좋은 일은 아니다. 함께 거리 귀퉁이에 늘어져서 시계 혹은 휴대폰을 들여다보는 사람들은 모두 낯선 상대를 기다리는 것처럼 초조해 보인다. 예를 들면 오랜만에 보는 초등학교 동창이라든가, 카톡으로 사진만 확인한 소개팅 상대라든가. 이 거리는 너무나도 복잡하기에 그 누군가가 언제 어디에서 올지 짐작조차 할 수 없어서 모두 안절부절못한다.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 눈에 나도 그렇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수차례 통화를 한 끝에 사람들 틈에서 친구를 겨우 발견했다. 어쩌면 길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처럼 서로 보지 못하고 몇 번씩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보니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 말은 참 허무하다. 오늘 내가 옷깃을 스친 사람만 몇 명인데. 친구를 옆에 두고도 혼자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걷다 보니 잠시 친구를 놓쳤다. 친구는 이 거리가 익숙하지 않아서인지 우리 사이가 조금이라도 멀어지면 두리번거리거나 불안해서 손을 뻗기 일쑤다. 그 모습을 보니 문득 ‘나는 언제부터 이 거리에 익숙해졌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매일매일 달라지는 거리인데 나는 왜 익숙하게 느끼고 있었을까.

  익숙한 거리에서 익숙함의 이유를 생각하자니 그것을 떠올리기가 참 힘들다. 그래서 반대로 이 거리를 낯설게 느꼈던 마지막 기억을 더듬어본다. 추위가 가시지 않은 봄, 기억 속의 나는 거리 위의 모든 것을 눈에 담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 다양한 버스킹 공연들, 처음 보는 이름을 담은 간판들과 옷가게 앞을 차지한 값싼 가격표들까지. 그렇게 모든 것을 낯설어하며 그중 가장 낯선 것을 발견하기 위해, 그때의 나는 거리를 걷지 않았을까. 그때는 ‘걷고 싶은 거리’가 내겐 정말 말 그대로 걷고 싶은 거리였다. 하지만 지금 내게 이 거리는 재미없고 뻔한, 걷기 싫은 거리가 되어버렸다. 나의 관심을 끌었던 모든 것이 그대로이기에 그렇다. 사람에게도 그렇듯, 거리에도 변하지 않는다는 게 마냥 좋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이 거리가 너무 익숙해서 싫어져 버린 것일까? 그러기엔 매번 오는 사람들도, 그 사람들이 이곳에서 하는 일들도 매일매일 바뀌지만 ‘복잡하고 혼란스럽다’라는 거리에 대한 느낌만은 변하지 않아서인지. 이 거리는 나에게 너무나도 피곤하고 성가시다.

 


12:00 am 
- 골목에 내린 밤
 
  새 하루가 시작되었다.  

  라는 생각보다는 밤이 되었구나. 하는 생각이 깊어지는 시간이다. 모든 것을 정시에 맞춰 계획하는 나인데 이상하게 한 가지 틀어진 것이 있다면 바로 이 시간에 관한 것이다. 가장 애증스러운 이 열두 시라는 시간은 앞에 어떤 이름을 붙여 줘야 할지 한참을 고민하게 한다. 영어로는 AM이니 아침이라고 해줘야 할 것 같은데 그러기엔 밖이 너무 깜깜하다. 밤이라고 하자니 새벽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릴 것도 같고.

  보통은 너를 새벽이라 부르지만, 오늘은 밤이라고 불러주기로 한다. 새벽이라 부르자니 이 시간에 밖에 나와 어슬렁대는 내가 스스로 너무 처량해 보일 것 같아서랄까. 보통과 달리 내가 이 시간에 바깥에 나와 있는 일은 참 이상한 일이다. 오랜만에 일찍 들어가지 않고 ‘밤’에 거리를 걸어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번잡한 이 거리를 벗어나 일단은 조용한 곳으로 가야겠다. 빠른 걸음으로 걷다 보니 어느새 학교 바로 앞이다. 건널목 건너편에서 바라본 학교는 방금까지 내가 걸어왔던 길과는 다르게 어둠이 짙게 내려있다. 오른편에 보이는 기숙사로 향하는 골목에 켜진 가로등 불빛 하나가 눈길을 끈다. 온통 불빛으로 가득 차 있던 학교 앞에선 그것이 너무나도 싫었는데, 어둠 속에서 외로이 빛나고 있는 가로등 빛을 보니 마음이 끌린다.

  아까 전까지만 해도 귀를 찌르던 소음들이 모두 사라진다. 남들보다 몇 발자국 좀 더 걸었을 뿐인데 여긴 정말 아무도 없다. 이제야 조금 편안한 마음으로 느릿느릿 골목길을 걸어본다. 벽들은 서로 얽히고설킨 그라피티로 덮인 데다가 구멍 뚫린 하수구에서는 가끔 스치듯 역한 냄새가 올라오는 으스스한 골목길이지만, 밖에서 들리는 시끄러운 음악과 소리치는 사람들 때문인지 그에 비하면 소름이 끼칠 정도는 아니다. 조금 무서워질 때쯤이면 저 멀리 홀로 열린 편의점에 달린 종을 땡그랑 울리고 들어가는 상상을 하며 걸음을 계속한다. 낮이면 열리던 오른편의 가게들이 조용한 모습을 보니 어쩐지 마음이 허하다. 낮에는 알 수 없었을, 가게들의 형광등 불빛들이 얼마나 환한 것들이었는지, 테이블에 앉아 수다를 떨던 모르는 사람들이 얼마나 반가운 존재들이었는지 떠올려본다. ‘폐업’이라고 써진 A4 용지 한 장을 가게 밖에 붙인 채 먼지와 부서진 목재들만 남기고 가버린 어느 가게도 물끄러미 쳐다본다. 그동안 걸어보지 못한 밤의 골목길을 따라 걸으며 여러 가지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간만의 시간이다.

 


03:00 am 
- 무섭거나 무섭지 않거나, 커다랗거나 조그맣거나

  아주 어렸을 적, 나는 새벽 세 시가 참 무서웠다. 누군가가 나에게 귀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이라고 말해줬던 게 분명하다. 지금 야행성이 되어버린 나에겐 그 어느 때보다 활발한 시간이고 또 글을 쓰기에도 좋은 최적의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새벽 세 시를 두려워하지 않았던 건 언제부터였던가. 귀신이 더는 무섭지 않았을 때부터일까, 밤이 더는 무섭지 않았을 때부터일까.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무섭지 않다’는 생각이 활보하는 공간은 작은 방 안 일 때뿐이었다. 어둠에 잠겨 가로등 불빛만이 켜져 있는 이 거리의 새벽 세 시는 무섭다. 갑자기 각종 범죄 사건들과 영화 속 살인마의 모습까지 떠오르면서 걸음이 빨라진다. 타닥, 하는 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지만 아무도 없다. 내 발소리에 내가 놀랐나 보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내 그림자까지 무서워진다.  

  골목길을 빠져나왔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조금 무섭긴 하지만, 큰 거리로 나오니 그래도 좀 낫다. 골목길에서는 좁은 골목을 건물들이 가득 채우고 있었는데, 도로를 달리는 차마저 드물어진 이 시간의 거리는 그저 휑할 뿐이다. 이 커다란 거리에서 검은 하늘에 혼자 동그랗게 떠 있는 달만 보고 있자니 내가 아주 작은 존재같이 느껴진다. 거리 위에 선 나는 달을 볼 수 있지만, 달은 내가 너무 작아서 존재조차 모를 테니까. 정말 내가 그렇게도 작고 보잘것없는 존재일까? 슬쩍 괘씸한 생각이 들던 차에 근처에 있는 카페가 보인다. 잠깐 들러서 머그잔 안에 비친 가짜 달이라도 꿀꺽꿀꺽 삼켜버려야겠다.

  카페 안은 낮과 다르게 조용하다. 몇 없는 사람들은 가끔 소곤거리며 대화를 나누거나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탁자 위에 엎어져 있다. 금세 흥미를 잃을 정도로 아주 재미없는 풍경이다. 나는 자연스레 창가로 고개를 돌렸다. 2층 통유리 너머로 바라본 거리는 ‘내가 걸었던 거리가 맞나?’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작아 보인다. 엄지와 검지를 들어 지나가는 사람들의 키를 재어보면 내 손가락 반만도 못했고, 건물들은 한 손에 잡아 들 수 있을 것 같다. 소리도 온도도 직접 느낄 수 없는 거리를 유리창 너머로 보고 있자니 꼭 액자 속에 갇힌 사진 같다.

  그렇게 거리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잠깐 잠이 들었다. 

 


 
06:00 am 
- 마침내 마주하다

  덜컹덜컹. 청소차가 지나가는 소리가 들린다. 눈을 살짝 떠보니 싹싹 하는 소리와 함께 여태까지 남은, 목숨이 질긴 낙엽들과 보이지 않는 먼지들도 쓸려나간다. 커다란 자루들과 자그만 무언가들이 길거리에서 사라지는 모습을 보며 길거리가 모든 옷을 온전하게 벗은 모습을 본다. 아침이 될락 말락 한 이 시간의 길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깨끗하다. 구석구석 껌을 뱉은 자국, 누군가가 토를 한 자국, 도로 위 죽어버린 비둘기의 주검이 머물던 곳만 제외하면 정말이다.
  
  사람들은 길거리를 더럽히는 것을 즐거워한다. 쓰레기를 버리는 사람은 아주 악독하게 즐거워하는 사람이고, 그런 부류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거리 위에 보이지 않는 발자국을 남기는 것을 즐거워한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이 말하며 튀긴 침과 태운 담배들과 뱉은 한숨들을 모을 수 있다면 어느 정도 될까? 그렇게 길거리를 더럽히고 나면 그래도 마음이 나아지는 걸까. 어쨌든 사람들은 길거리를 더럽히기 위해 치우고, 치우고 난 뒤 다시 더럽히고, 또 더럽히기 위해 치운다. 아마도 길거리의 운명이 그런가 보다.   

  청소가 끝난 아침의 거리를 기지개를 피며 맞이한다. 내가 이 시간에 거리를 걸을 수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거리는 참 조용하다. 도로 위마저 이제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을 태운 택시 외에 다른 차는 없다. 서류 가방을 들고 내 옆을 후다닥 지나가는 사람을 바라보다 뒤를 따라 지하철역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홍대입구역까지 향하는 동안 본 홍대 거리는 내가 알던 그 거리가 절대 아니다. 사람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가게 문은 모두 닫힌 데다가 쓰레기봉투들의 입구까지 꽁꽁 묶인 채 말끔히 치워진 거리는 너무나도 생경하다. 어제 보았던 피곤하고 성가셨던 거리의 모습은 어쩌면 본연의 모습이 아니었나 보다. 거리 위를 지나던 사람들이 만들어 낸 이미지였을 뿐일지도 모른다.

  카페에서 가져온 마시다 만 커피를 잠시 바라본다. 내가 아침을 맞으려고 나온 바람에 얼떨결에 함께 거리에 서게 됐다. 다 식어버린 커피의 마지막 한 모금을 삼킨다. 꼭 내가 삼켜버려서 없어진 것처럼 하늘에 떠 있던 달이 구름에 섞여 희미하게 사라져간다. 달이 사라지는 이곳은 익숙해서 싫었던 그 거리가 아니다. 익숙함을 뒤집어쓰기 전, 거리의 말끔한 얼굴을 바라보며 처음으로 이 시간을 걸어간다.

이민지  leereum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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