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을 때 우리는 문단과 문단, 문장과 문장 그리고 단어와 단어 사이의 간격, 즉 ‘여백’을 자연스럽게 읽는다. 이러한 여백은 대화의 상황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대부분은 이 찰나의 정적을 공백으로 인식하고 꺼려한다. 여백과 공백의 차이는 무엇이며, 대화에서 여백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공백에 관하여」 
공백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것도 없이 비어 있음.’ ‘특정한 활동이나 업적이 없이 비어 있음.’이다. 무언가 비어있고 결여된 느낌이 강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살갑지 않은 존재임은 틀림없다. 특히 대화에서의 공백은 ‘대화 상대와의 관계가 좋지 않은 것인가?’ 혹은 ‘나의 대화 기술이 좋지 않은가?’ 등 인간관계 전반에 대한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사람들이 대화에서는 물론 인간관계나 시간 사용에서 공백을 기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일의 심리학자 레빈이 주장한 ‘긴장효과이론(Field Theory)’에 따르면 인간은 어떤 행위를 완성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한다. 흔히 수수께끼의 답을 찾거나 책을 읽기 시작하면 끝을 보려고 하려고 하는데 이것이 ‘긴장효과’이다. 원을 그릴 때 완벽하게 다 이어 그리지 않고 공백을 남겨두면 끊어진 부분을 마저 그리고 싶어 하는 심리도 같은 맥락으로 설명할 수 있다. 즉 우리에게 공백이란 다 완성하지 못한, 어딘가 부족한 부분이자 완성해야 하는 대상이다. 

때로는 완성하기 위해 공백을 채우는 행위보다, 공백을 채워야 한다는 강박감이 앞설 때가 있다. 이러한 강박에 기인한 공백은 대화의 상황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형 대화의 기술」에서 소개한 사람들이 가장 고치고 싶어 하는 말버릇은 대화할 때 숨을 적절하게 쉬지 않는 것이다. 적절하게 숨을 쉬지 않고 잡음을 사용하며 말을 빠르게 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인데, 이들은 말할 때 조금의 공백도 없이 완벽하게 말로 채워야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졌기 때문에 쉽게 이 습관을 고칠 수 없다. 이처럼 대화의 밀도에 강박증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화의 주도권을 잡아야 한다는 강박증도 많은 사람에게 나타난다. 대화 주도권에 대한 강박증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침묵이나 대화의 공백을 감당하지 못하고 그것을 모두 자신의 책임으로 돌린다. 이처럼 대화에서의 공백은 여러 강박증을 수반할 정도로 많은 사람에게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침묵, 다른 의미 : 대화의 여백」
책에서 글과 글 사이의 간격이 흰 종이로 나타난다면, 대화 상황에서 말과 말 사이의 간격은 침묵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침묵이 ‘말하지 않는 것’인 만큼 상황과 맥락에 따라 그 의미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다. 같은 침묵이 때로는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지만 때로는 다음 구절을 잊어버렸다고 해석되는 것이다. 여기서 공백과 여백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공백은 침묵에 대해서 그 침묵이 의도하지 않은 것을 말하고, 반대로 여백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침묵을 말한다. 오바마의 연설은 공백과 여백의 미묘한 차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오바마는 애리조나 총기 난사 사건 추모 연설에서 51초간 침묵했다. 보통 연설에서의 침묵은 곧 실수로 인식된다. 그러나 오바마의 51초에 걸친 침묵은 오히려 추모식장에 모인 청중과 TV를 통해 그를 지켜보던 사람들에게 감동을 줬다. 애리조나 추모 연설에 이어 오바마가 다시 한번 침묵을 효과적으로 구사한 사례가 있다. 2011년 5월 5일 그라운드 제로에서 열린 9·11 테러 희생자 추모식에서였다. 이는 9·11 테러 직후인 2001년 9월 14일 그라운드 제로를 찾아 연설한 조지 W. 부시의 행보와는 큰 차이가 있었다. 부시는 확성기를 들고 이야기했지만, 오바마 대통령은 두 손을 꼭 모아 고개를 숙인 채 추모의 시간을 가졌다. 방법은 달랐지만 부시의 연설과 오바마의 침묵은 미국인의 단결이라는 동일한 효과를 불러왔다. 아무 말 없는 침묵이 어떻게 미국인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었을까?

사람들은 오바마의 침묵을 두고 대화에서 ‘여백’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즉 오바마의 침묵은 그의 실수에서 비롯된 의도치 않은 ‘공백’이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기 위해 의도적으로 사용된 ‘여백’으로 기능했다는 것이다. 미술작품에서의 여유로운 여백 공간이 그림을 더 풍부하게 이해할 수 있는 긍정적인 효과를 발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대화에서의 여백은 화자가 전달하려는 말을 청자가 효과적으로 이해하는 것을 돕는다. 

「대화에서 여백 활용하기」
일상적인 대화의 순간에서 의도적으로 침묵하여 여백의 기능을 극대화하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또한, 대부분이 ‘긴장효과이론’에 따라 침묵을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므로 화자가 여백으로 의도한 침묵이 청자에게는 오히려 공백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여백을 잘 전달하고 또 잘 이해할 수 있을까? 발표 또는 일상적인 대화에서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는 ‘여백의 기술’을 소개한다. 

1. 침묵과 어울리는 비언어적 표현 구사하기
앞서 제시한 오바마의 사례에서 한 가지 의문점이 들 수 있다. 사람들은 왜 단순한 침묵에 감동하고 그것이 여백을 사용한 대화의 기술이라고 극찬하는 것일까? 그가 대통령이라는 사실 때문에 사람들이 그의 말에 집중한 것이 아닐까? 해당 연설을 찾아보면, 오바마는 침묵 중에 눈시울을 붉히거나 단호한 표정을 짓는 등 비언어적 표현들을 사용하며 대중들과 대화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의도적으로 남기는 침묵이 여백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단순히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침묵의 의도를 청자에게 전달하는 것까지 이루어져야 한다. 그리고 이것이 가능하도록 도와주는 것은 표정과 몸짓 등의 비언어적 표현의 사용이다. 

가장 대표적인 비언어적 표현은 표정이다. 오바마는 침묵 중에 눈시울을 붉혀 보는 이들을 감동하게 했다. 어찌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다. 슬픈 상황에서 울고 기쁜 상황에서 웃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연설자가 표정이나 몸짓에 예기치 않은 실수를 하면 그것이 비록 한순간이더라도 연설의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에 꾸준한 연습이 필요하다. 이 점이 많은 아마추어 연설자가 간과하는 부분이다. 대부분의 아마추어 연설자는 대중 앞에서 긴장하지 않고 텍스트를 잘 전달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비언어적 표현에는 크게 신경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

표정은 언어보다 먼저 익히는 ‘선천적 보디랭귀지’에 해당하기 때문에 표정을 의도적으로 통제하기는 낯설고 어려울 것이다. 이에 대해 전문가들이 제시하는 방법은 표정만으로 의미를 전달하고자 하지 말고, 여러 비언어적 표현들을 복합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청자의 입장에서도 비언어적 표현들은 세세하게 인식되기보다 전체적인 메시지로 전달된다. 따라서 표정을 보여주기 힘들다면 시선이나 몸짓 등 다른 표현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2. 말과 말 사이에 의도적인 시간 간격 두기
연설이 아닌 일대일 대화 상황에서는 표정으로 의미를 전달해야 할 정도로 긴 침묵이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이럴 때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은 말과 말 사이에 시간 간격을 1초 정도 두는 것이다. 1초의 간격이 여백을 형성하는데 큰 중요성이 있는지 의문이 들 수 있다. 스티브 잡스가 랭귀지라인의 필요성에 대해 말하는 대목을 살펴보자.

“랭귀지라인은 비영어권 고객과 의사소통이 필요한 기업에 세계 최대의 전화 통역 서비스를 제공합니다.” (1초의 간격) “23초마다 영어를 쓰지 않는 사람들이 미국으로 들어옵니다.” (1초의 간격) “그들이 병원, 은행, 보험회사, 911에 전화를 걸면 랭귀지라인 통역자가 응대할 수 있습니다.” (1초의 간격) “우리는 여러분이 고객, 환자, 잠재고객과 150개 언어로 소통하도록 도와줍니다.”

위의 연설 내용을 직접 읽어보자. 1초 간격을 지켰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차이가 뚜렷할 것이다. 간격을 두고 읽지 않았을 경우에는 숨이 차고 마음이 급해지는데, 이는 연설을 듣는 청자에게 곧 이해의 정도로 직결된다. 즉 전달하고자 하는 정보를 댐이 물을 방류하듯 쏟아내게 되면, 대화 내용에 대한 청자의 이해도와 흥미도가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1초의 효과는 연설은 물론 일상적인 대화에서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우선 간격은 청자에게 숨 돌릴 수 있는 여유와 ‘이제부터 주제가 바뀌는구나!’하고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을 준다. 이에 따라 앞선 내용을 정리하고, 새로운 주제로 관심을 환기할 수 있다. 또한, 대화의 클라이맥스 직전에 살짝 간격을 두면 청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상태가 되어 이어지는 대화에 청자의 반응이 극대화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화자가 청자의 반응을 위해 의도적으로 간격을 둘 수도 있다. 청자가 좋은 타이밍에 추임새를 넣으면 이야기에 리듬감이 생기는데,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청자가 좋은 타이밍에 추임새를 넣기 쉽도록 화자가 일부러 간격을 만들어 주는 것이다. 

3. 여백의 칭찬하기
칭찬하기는 경청하기, 반응하기와 함께 적극적인 청자가 되는 방법의 하나이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와 같은 유명한 격언이 말해주듯 칭찬은 효과적인 대화를 돕는 중요한 기술인데, 여기에 여백의 기술을 더해 그 효과를 극대화할 수 있다. 강하고 자극적인 칭찬이 아닌 침묵을 칭찬에 활용하는 것이다. 진정한 칭찬은 오히려 말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 주요한 아이디어다. 여백의 칭찬은 칭찬의 말을 넘어서 행동으로 칭찬할 것을 주장한다. 겉으로 드러나는 칭찬의 표현들을 줄여나가는 것이다. 말로 인한 감동보다 글로 인한 감동이 더 크고, 글로 인한 감동보다 행동으로 인한 감동이 더 큰 것처럼 말이다.

중국 남북국 시대에 유의경이 쓴 <세설신어>의 한 대목은 여백의 칭찬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보여준다. 학문과 품성으로 만인의 존경을 받았던 왕미지와, 피리를 잘 부는 것으로 소문난 환은 길을 가다가 우연히 마주치게 된다. 왕미지는 환에게 한 곡 연주해 줄 것을 부탁했고, 환은 내리 세 곡을 연주해준다. 그러고는 두 사람 다 제 갈 길을 떠난다. 다소 당황스러운 이 이야기가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왕미지와 환은 평소 서로의 명성을 듣고 존경의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이 만나서 한 것은 피리 연주를 들려주고, 들은 것뿐이다. 사람들은 왕미지와 환이 눈빛이나 태도로 이미 서로에 대해 칭찬을 했기 때문에 다른 말이 필요하지 않았던 것으로 이를 해석한다. 서로의 명성을 칭찬하는 구구절절한 대화보다, 환의 음악을 경청했던 왕미지의 태도와 왕미지에게 한 곡이 아닌 세 곡을 연주해 주는 환의 태도가 서로에 대한 존경심을 더 잘 표현했다는 것이다.

여백은 공백과 다르게 침묵을 의도적으로 사용하여 효과적인 대화를 가능하게 하는 하나의 기술이다. 의식적으로 말과 말 사이에 간격을 두거나 여러 효과적인 대화의 기술에 침묵을 적절히 활용하기가 쉽지 않겠지만, 지금까지의 대화 양상과는 다른 결과를 기대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대화에서의 여백,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침묵 중에 가장 가치 있는 침묵이 아닐까.

김지연  letsplay57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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