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은 수출로 먹고사는 나라다. 올해 경제성장률의 86%는 수출에서 왔고, 그 중 1/5이 넘는 부분을 반도체가 담당한다. 기초자원의 부족이라는 지리적 특성과 1990년대 전 세계적인 IT화의 기류에 편승했던 결과로 현재에 이르러 한국은 반도체 수출 강대국이 되었다. 이런 나라에게 경제와 반도체는 서로 뗄 수 없는 말이다. 흥미로운 것은 반도체를 제외한 품목의 수출액은 오히려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반도체 수출이 올해 역대 최고치를 기록한 대 반해, 그 뒤를 잇는다는 이차전지의 수출은 전년도보다 20% 넘게 줄었다. 이것은 한국의 수출이 얼마나 반도체 편향적인지 말해준다. 반도체 시장 점유율이 전 세계 2위 규모로 성장했음에도, 반도체에 의존하는 수출 구조가 위태로워 보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도체 수요는 반도체가 들어가는 제품이 소모되고 폐기되는 시기까지 공백을 가지게 된다. 타제품의 제조 사이클에 큰 영향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런데 반도체의 보완재 산업이 없다는 것은 한국의 경제성장률이 반도체 사이클과 함께 극심한 변동성을 가지게 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반도체 이외에도 수출 시장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공학 분야를 성장시키는 과제가 중요하다. 그렇다면 격변하는 세계를 배경으로 한국 공학계는 어디로 가고 있을까.

세계는 인재 쟁탈전 중

모든 분야의 화두로 등장하는 AI는 그 개발 인재를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한창이다. 아마존은 AI 스타트업 엔스로퍼에 자사 단일 기업 최대 투자 규모인 5조를 투자했고, 구글 또한 작년에 같은 기업에 20억을 투자했다. 20년도의 코딩 인재 전쟁과 마찬가지로 지금은 AI 개발자를 각 기업에서 확보하기 위한 경쟁이 치열하다. 심지어 AI 종사자들의 평균연봉은 4억 원에 육박하지만 그럼에도 이직하는 상황은 계속되고 있다. 만약 스타트업에 종사한다면 55조 이상의 주식 보상이 기대되기 때문이다.

AI 산업에는 위와 같이 제품과 서비스를 구현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AI 반도체의 개발도 핵심적인 산업이다. AI 반도체는 AI의 학습과 데이터 처리가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것으로 현재 수요가 높아 개발 인재를 두고 대기업 간 쟁탈전이 고조되고 있다. 그중 주목할 것은 미국의 반도체 기업인 인텔의 행보다. 인텔은 최근 정부로부터 27조 원의 보조금을 수혈받고 반도체의 위탁생산을 시작하면서, 일본과 대만을 끌어들였다. 이로써 기존의 ‘설계의 미국, 메모리의 한국, 제조의 대만, 장비의 일본 유럽’의 분업구조를 깨뜨렸고 각국에서 한국의 위탁생산 인재를 채가기 시작했다. TSMC의 일본 자회사인 JASM의 경우 최근 한국 대학원생 대상 취업 정보 사이트인 김박사넷에서 석박사급 전공자 엔지니어를 대상으로 구인 활동을 시작한 것이 포착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AI 반도체에 중요 부품으로 들어가는 고대역폭 메모리(HBM)는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이 한국의 HBM 개발 인재를 노린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이후 해당 분야에서 실제로 이직하는 사례가 늘어 국내 대기업들이 연봉을 높이고 신규 채용을 늘리는 중이다. 한편, 삼성과 하이닉스는 HBM 개발에 수백조 단위의 대규모 투자를 시작했는데, 특히 두 대기업은 HBM의 신제품 개발을 두고 선두 주자를 다투고 있다.

한국은 올해 5월 OECD 국가 중 가장 높은 경제성장률(2.6%)을 보였다. 물가는 내려가지 않는데 경기가 좋아진 이유는 수출이 급상승했기 때문이다. 그 중 당연히 반도체가 무려 50%가 넘는다. 수출이 경제성장을 주도하는 상황에서 그 중심에는 반도체가 있다. 그런데 지금처럼 한국이 반도체 강국으로서의 위상을 유지하려면 대기업의 투자 외에도 두 가지 중요한 방도가 필요하다. 바로 안정적인 중간재 확보와 인재 양성이다. 중간재의 경우 2019년 일본의 수출 규제와 2020년 코로나 당시 글로벌 공급망 위기를 겪었다. 이때 제품을 만드는 데 필요한 중간재가 제대로 공급되지 않아 난항을 겪은 이후 전 정부는 소재, 부품, 장비 산업의 기술 독립 정책을 추진해 왔다. 특히 핵심 소재의 국산화를 추진했었다. 그리고 현 정부도 마찬가지로 해당 분야의 전략기술을 50가지에서 200가지로 확대하기도 했다. 하지만 엔지니어를 양성하는 문제, 인재를 확보하는 대책은 부진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다.

과학계의 인재 불황

수출로만 성장한 경제의 뒷면에는 내수의 불황이 있다. 수출하는 기업들의 호황이 지속되는 이유는 먼저 환율이 올라서 가만히 앉아 25%를 벌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주요한 수출 대상국인 미국의 수입량이 압도적으로 늘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를 반대로 보면 고금리, 고물가, 수출단가는 높아진 상황에서 내수 위주의 중소기업은 먹구름이 낀 상황인 것이다. 수출로 인한 경제성장의 낙수효과를 누리기 전, 과도기에 놓인 국내 시장은 침체기에 놓인다. 아직은 고금리로 인해 월세, 대출이자, 월급도 증가. 자영업자와 중소기업은 어려워지는 양극화로 가고 있고 최소 내년 1월까지도 금리의 하락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된다. OECD에 따르면 한국은 타 국가에 비해 대기업과 중소기업 급여 차이가 크다. 그런데 기업 종사자 중 81%가 중소기업인 상황에서 반도체 수출을 주도하는 19%에 속하는 기업만이 수출의 호황을 누리는 것은 진정한 경제성장으로 볼 수 없다. 또한 이 81% 안에는 R&D 기반의 중소기업과 대학 연구기관도 포함되는데 이들의 형편이 좋지 못하다는 말은 지금까지 한국의 경제성장 뒷배가 되어온 이공계의 미래가 암울하다는 것과 같다. 더 나아가 지금 이루어진 경제성장은 몇십 년 전부터 닦아온 정책의 결과일 뿐 지금 시행되는 정책과는 무관한 일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경제 호황과 대비되는 과학계의 인재 불황은 미래의 수출을 담보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한국의 인재 불황의 조짐은 97년도에 있었던 IMF 이후 나타났다. 외환위기가 터졌을 때 대기업 구조조정의 여파로 인해 이공계 계열 샐러리맨들은 대거 해고됐지만 의사들은 그렇지 않았다. 소득보다 명예, 브랜드를 따졌던 게 허상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당시의 큰 트라우마는 후세대에도 대물림되어 이후 20년간 ‘공대 기피, 의대 선호’라는 결과를 낳았다. 이 여파로 인해 재작년부터 시작해 올해에는 포스텍조차도 인재난을 겪는 상황이다. 포스텍은 저출산과 수도권 집중화 현상으로 최근 수년간 적지 않은 교수들이 학교를 떠나고 본교 학부생들도 모교 대학원 입학을 꺼리는 상황이 이어졌다. 설상가상으로 학교 수입보다 지출이 많아 매년 수백억 원 이상 적자가 나기도 했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학교가 그간 보유해 온 이차전지 관련 포스코 계열사 주식을 재원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제시되는 상황이다.

현재 과학계의 가장 큰 문제는 연구 환경이 열악한 것이다. 한국의 대학원생 비율은 인구 대비 가장 높다. 하지만 대학원 졸업 이후에는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연구직을 포기하거나 해외로 유출되는 상황이다. 한국은 OECD 중 GDP 대비 연구 개발에 대한 투자 비중이 가장 높지만, 그 중 연구 개발비의 80%는 기업의 활동이고 단 9%만이 대학의 활동에 쓰인다. 이는 기초 기술의 연구 개발이 부진해질 우려가 있다. 또한 경력직 위주의 인재를 선호하는 반도체 기업도 문제다. 학부 졸업생과 기업이 원하는 인재 간 간극이 커 산학 연계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현재 실습 실무 연계는 수도권으로 한정된 상황이다.

그뿐만 아니라 개발자로서 취직하더라도 40대 중후반이면 밀려난다는 인식이 많고 50대 엔지니어가 원하는 분야로 이직할 기회가 없는 것도 문제다. 이렇게 국내 개발자 사이에서는 엔지니어의 수명이 짧은 것과 함께 높은 이직률이 가장 큰 문제점으로 꼽히고 있다. 최근 SK하이닉스의 HBM 핵심 임원이 미국 파운드리 마이크론에 이직하려다 법원 제동에 가로막힌 상징적인 사건이 있기도 했다. 현재 미국·일본은 한국의 반도체 인력을 탐내고 있고 22년도 기준 대만 대표 반도체 기업 TSMC의 이직률과 비교해 삼성전자는 두 배에 가까운 이직률을 보이는 것은 중요한 국가 산업과 연관된 인력 확보에 있어서 적색신호다.

이렇게 공대를 기피하는 사회 분위기와 열악한 연구 환경으로 예년에 비해 비인기 분야가 되어가는 과학계에 작년 6월 있었던 R&D예산의 삭감은 치명적인 사건이었다. 작년 3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이하 과기부)는 2027년까지 R&D예산으로 170조 원을 투입하는 주 장기 투자전략을 공개했다. 과학계에선 현 정부가 취임 이후 과학기술을 우대하는 행보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합리적인 수준에서 예산이 결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 그러나 R&D예산은 작년 6월 28일 재검토 이후 3분의 1이 사라졌다. 이에 따라 중간 자재 자체 생산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소재/부품/장비 R&D 프로젝트의 예산이 급감하고 정부출연연구기관(이하 출연연)의 연구비 예산도 20% 삭감이 확정됐다. 수십 년간 R&D에 막대한 예산을 투입하는 과학기술 선도국들과 비교하면 한국은 R&D 관련 예산을 크게 늘린 지 얼마 되지 않았다. 그런데 중차안에 해당하는 예산 삭감을 과학계의 의견 수렴 한번 없이 진행된 것은 과학계 전반에 혼란을 주었다. 기초 연구에 들어가는 투자는 예산을 갑자기 줄이면 연구의 연속성이 사라진다. 연구를 이어가야 할 박사 후 연구원부터, 대학원생, 학부생까지 5~6년 한 세대가 비어버리기 때문이다.

정부는 지원비용을 삭감하는 근거를 두고 R&D카르텔을 근거로 들었다. 뿌려주기식 R&D보조금을 받아 가는 좀비기업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올해 7월 과기부가 발표한 예산 삭감 주요 현황을 살펴보면 과학기술계 카르텔 언급 진원지로 알려진 한국과학기술한림원의 지원이 전년 대비 2.1% 증가했다. 카르텔의 실체를 정확히 들지 못하는 상황에서 진원지로 알려진 기관의 지원금이 증가했다는 사실에서 이번 예산 삭감이 성급했다고 보인다. 예산 삭감의 또 다른 근거로 이전에 R&D의 무분별한 증가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전 정부 때 국가의 R&D예산이 급격하게 증가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정권마다 중점을 두는 분야는 달랐어도 예산 자체를 줄이는 경우는 없었다. 예산이 삭감된 건 1991년도가 마지막이었다. 이를 놓고 중간 자재 수급 대응과 감염병 대응을 위한 예산이 대폭 증가했다가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했지만, 이번 예산 삭감은 이와 관련 없는 출연연(정부 출연 연구) 예산까지도 삭감되었다.

현재 정부는 이러한 혼란을 뒤로한 채 2025년도 주요 R&D 예산을 전년 대비 증가한 24.8조 원 규모로 편성했다. 예산은 복원됐지만 삭감으로 인한 피해는 당장 회복하기 어려워 과학계는 이를 두고 증액이 아닌 복구라는 평을 하고 있다.

그 많던 인재는 어디서 와야 하는가

지금까지 한국의 이공계를 이끌어온 과학계의 인재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정부의 최대 지원 최소 개입이 중요한 과제로 꼽힌다. 한국과 수출 경쟁 중인 국가의 R&D예산 제도 중 미국, 독일은 예산, 제도에 대한 정부의 불간섭을 강조하고 있다. 특히 독일의 경우 연구기관이 연구 주제를 선정하고 예산편성 및 성과 평가를 진행하는데 이 과정에서 연구자의 자율성을 가장 강조한다. 연구자의 자율성이 보장이란 R&D사업의 예산편성에서 사업과 관련된 사람의 의견이 가장 우선시된다는 것이다. 이토록 자율성이 중요시되는 이유는 연구 개발이 단기적인 수익을 뽑아내는 분야가 아니라 연구자의 역량에 의존하여 중장기적으로 바라보는 분야이기 때문이다. 이를 유념하여 앞으로의 예산 편성의 과정에서는 과학계 연구자들의 자문을 반드시 반영해야 한다.

현재 과학계에서는 R&D사업의 지원금은 반드시 늘리거나 최소한 현상 유지가 주된 의견이다. 수출 호황으로 기업의 채용이 늘어나는 지금, R&D사업으로 최소한 현상 유지하여 인력을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의 R&D 예산안 감축은 더욱 신중해야 하는데 이미 예산의 급감으로 연구가 단절되고 신생 연구자들이 유출되는 과정에서 현재 남아있는 연구자들은 일시적으로 버티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 지원사업에 의존하고 있는 대학과 중소기업의 인력들은 이번 예산안 감축의 타격이 크다. 대학과 중소기업에서 유입되는 안정적인 기초 인력을 보충받기 위해서는 앞으로 지원금을 최소한 유지, 증가시켜 대학과 중소기업을 통해 새로운 인력을 양성하여 보충해야 한다.

기업의 경우 엔지니어의 수명을 늘리고 이직을 막아야 한다. 이에 대해서 김정호 KAIST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10년 이상 근무한 연구원을 다시 대학으로 보내 학위를 받게 하거나 신기술을 재교육하는 식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기업 내에서 기존 인재의 유출을 막기 위해서는 성과 보상을 보다 차등화·정교화 해야 한다. 지난해 삼성전자 반도체(DS) 부문 성과급은 0%로 책정되었다. 현재의 투자와 기술 개발이 2~3년 뒤에 나타나는 반도체 산업에서 사업부 1년 실적으로 성과급이 부여되는 구조의 변화가 필요하다. 또한 수도권에 한정하지 않는 산학 연계 프로그램을 통해 지방인재를 키우는 것도 중요하다. 이희덕 충남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대학원에서 2년 동안 반도체 실습·실무 중심 교육을 받은 이들을 배출하는 게 대안이다. 수도권 일부 대학에 한정된 산학 연계를 지방 공대 대학원으로 넓혀 효과를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그뿐만 아니라 이공계 인재가 의대로 편중된 상황에서 아이들이 적성에 맞는 진로를 선택해야 함도 맞지만, 공부를 잘하는 이공계 아이들이 의대뿐만 아니라 공학계로도 많이 유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한국에서 점차 이공계 인력이 부족해질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많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반도체 산업을 이끄는 대기업들의 주요 인력뿐만 아니라 중간재 산업과 기초연구 분야의 인재도 지속 가능한 경제성장에 중요한데 이는 정책에서도 간과되고 있다고 보일 정도로 잘 부각되고 있는 문제가 아니다. 현재 반도체 수출이 호황이 가능한 것은 다년간 점차 증가해 온 R&D지원 사업과 지난 몇 년간 공학계로의 진로를 선택한 이공계 인재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편향된 수출 이면의 부진한 중소기업의 성장은 가까운 미래의 경제 위기를 예견한다. 기업 수준에서 인재 유출을 막는 것을 포함해 국가 차원에서 앞으로의 5년 혹은 10년 뒤에 그 결과가 나타날 수 있는 연구 분야의 투자를 신중하게 편성하기를 요구된다. 인적 자원 없이는 성장하지 않는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에서 인재 부족이란 단어가 비어있는 이공계를 격추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이수민  clara_sm@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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