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건 글씨요, 흰 건 종이로다.”
글은 읽을 줄 모르고 글씨와 종이만 구별할 줄 아는 상황, 그러니까 어떤 것에 아예 문외한인 사람을 비유한 속담이다. 타이포그래피를 처음 접한 사람이라면 이런 말을 할지도 모른다. 게다가 검은 글자만을 다루는 줄 알았던 타이포그래피가 여백까지 다루는 것이라니! 속담 그대로 검은 건 글이고, 흰 건 여백이다. 타이포그래피와 여백, 대체 어떤 연관이 있는 걸까?

1. 타이포그래피, 글자와 여백의 조화를 이루다.

책, 신문, 잡지와 같은 인쇄물을 통해서든, 인터넷과 SNS를 통해서든, 하다못해 길을 지나가다 우연히 본 간판을 통해서든 우리는 매일 글자를 본다. 하지만 막상 그와 연관된 타이포그래피라는 개념은 생소하다. 글자를 의미하는 ‘typo’와 기술을 뜻하는 ‘graphy’가 합쳐져서 대충 글자를 다루는 기술이겠거니 생각은 하지만,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기는 어렵다. 타이포그래피는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 걸까?

이처럼 타이포그래피는 우리가 매일 보는 글자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타이포그래피는 시각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의 중추적인 영역을 차지하고 있다. 글자로 대변되는 정보를 화면에 알맞게 구성하여 전달하는 핵심적인 의사소통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타이포그래피에서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다름 아닌 ‘여백’이다. 왜 검은 글자가 아닌 하얀 여백이 중요한 것인지, 타이포그래피의 출발점이라 볼 수 있는 활자에서 그 답을 찾아보자.

디지털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에는 모든 인쇄물을 ‘활자’로 찍어 내야 했다. 활자는 도장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찍어냈을 때 바로 보이도록 좌우가 뒤집혀있고, 양공간과 음공간이 존재한다. 활자에서 양공간은 검은 공간, 우리가 글자라고 부르는 부분이다. 음공간은 흰 공간, 우리가 여백이라고 부르는 공간이다. 앞서 말한 도장의 형태를 한 번 더 떠올려보자. 도장에는 그림과 바탕이 존재한다. 이 그림과 바탕이 조화롭게 공간을 차지했을 때 아름다운 형태가 탄생한다. 활자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림(글자)과 바탕(여백)이 균형적으로 공간을 이루었을 때 온전한 형태를 이루게 된다. 타이포그래피가 시작했을 때부터 여백은 균형을 이뤄주는 아주 중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신 타이포그래피(The New Typography), 얀 치홀트, 1928

신 타이포그래피 광고지

전통적인 활자 인쇄술에서 여백이 갖는 의미가 큰 만큼, 현대의 타이포그래피 개념에서도 여백은 의미가 크다. 특히 20세기 타이포그래퍼 얀 치홀트의 저서 ‘신 타이포그래피’에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다. 신 타이포그래피는 당대에 어울리는 기능적이고 효과적인 타이포그래피를 목적으로 성립된 이론으로서, 전통적인 타이포그래피에 대한 새로운 시도로 볼 수 있다. 신 타이포그래피에서 소개하고 있는 디자인 원리들은 전통 활자 시대와는 달리 대량 인쇄에 적합한 질서 있고 명쾌한 표현을 강조한다. 그 중 하나가 바로 ‘여백을 살리는 타이포그래피’이다.

신 타이포그래피에서 여백은 2순위가 아닌 글자와 동등한 형태요소로 인정받았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타이포그래피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글자를 생각해보자. ‘각’이라는 글자 안에서 ‘ㄱ’과 ‘ㅏ’와 ‘ㄱ’을 조형적으로 아름다우면서도 가독성 있게 배치하려면 자음과 모음의 크기와 위치를 고려해야 한다. 조금 더 넓혀 ‘각도’라는 단어를 생각해보자. 자음과 모음 하나하나에도 신경을 써야 하지만, ‘각’과 ‘도’ 사이의 여백도 세심히 살펴보아야 한다. 이번에는 ‘각도가 크다.’라는 문장을 떠올려보자. 띄어쓰기와 특수문자까지 존재하는 문장에서는 여백에 대해 더 깊은 고민이 필요하다. 문장들이 길게 이어져서 두 행이 되면 그때는 행과 행 사이의 간격이라는 새로운 여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그 이후 행들이 계속되어 문단을 이루고, 문단들이 계속되어 하나의 글을 이룰 때마다 타이포그래피는 새로운 여백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그렇기에 여백에 대한 고려가 없다면 타이포그래피가 완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2. 그리드, 보이지 않는 공간을 배분하다.

우리가 글자, 단어, 문장, 글줄 등 타이포그래피 개념에 해당하는 모든 것을 볼 때, 그곳에는 대부분 그리드가 존재한다. 그리드는 레이아웃을 구성하는 데 큰 역할을 하는 도구이다. 그리드와 레이아웃이 도대체 뭐길래, 또 타이포그래피와 연관이 있다는 걸까?

그 형태가 다양하기는 하지만, 격자무늬로 대표되는 그리드는 디자이너의 작업을 돕는 가상 안내 선이다. 새로운 물건을 작동할 때 안내서를 읽고 사용하듯이, 가상 안내 선인 그리드 없이 디자인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디자이너가 예술적인 감각을 발휘해 단번에 작업을 완성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사실 대부분의 디자이너들은 그리드의 안내를 받아 여백을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 노력한다.

그리드와 여백을 잘 살펴볼 수 있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신문’이다. 많은 사람에게 배부되어야 하는 신문은 가장 저렴한 가격에 가장 많은 정보를 실어야 하기 때문에, 그 어느 인쇄매체보다도 여백을 알차게 활용해야 한다. 글과 사진으로 이루어진 신문을 보면 왠지 모르게 네모지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은 신문이 격자무늬 그리드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신문에서 이 그리드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어느 인쇄 매체보다 정보가 많고 빽빽한 신문이기에, 문단과 문단 사이의 여백이 정확하지 않으면 읽는 방향에 혼란을 일으킬 수 있고, 기사와 기사 사이의 여백이 충분하지 않으면 기사 간에 혼동이 생길 수도 있다. 그리드는 여백의 공간과 글과 그림이 들어갈 공간을 가로와 세로로 배분하여 이런 상황을 예방한다. 이렇게 정해진 그리드 위에서 디자이너들은 글이나 그림을 효과적으로 배치하는 레이아웃을 시도한다. 

우리가 접하는 대부분의 인쇄 매체들은 펼쳐서 두 페이지를 한 번에 보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렇기에 디자이너는 인쇄 매체의 레이아웃에서 글자, 단어, 문단을 넘어 페이지와 페이지 간의 여백을 고민하게 된다. 고민은 책의 형태에서부터 시작된다. 예를 들어, 펼쳤을 때 쫙 펴지지 않고 가운데 부분이 아치 형태를 이루는 책의 경우는, 형태로 인해 발생하는 시각적인 오차를 고려하여 페이지의 안쪽 여백을 바깥쪽 여백보다 더 많이 주기도 한다. 페이지의 좌우, 아래위로 여백을 주어 구성 요소가 들어갈 공간을 정했다면, 그 틀 안에서 레이아웃을 어떻게 디자인할지 구상하는 단계도 필요하다. 이를 몇 가지 경우로 나누어서 여백이 레이아웃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먼저 글이 구성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소설책을 떠올려보자. 이 경우 중간에 그림과 같은 다른 구성 요소가 들어가게 되면 오히려 독자의 집중을 방해할 수 있다. 그렇기에 소설책에서 글 외의 다른 구성 요소는 대부분 표지, 작가의 사진, 혹은 챕터가 바뀌는 부분에 한정적으로 등장한다. 특별한 의도가 없는 경우, 소설책은 다양한 레이아웃보다는 정해진 하나의 레이아웃을 따르는 것이 좋다. 시작부터 끝까지 이야기의 연결성이 중요한 소설책에서 장마다 다른 레이아웃이 등장한다면 산만해질 위험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사진이 중요한 구성 요소인 패션 화보의 경우는 어떨까? 모델과 옷이 눈에 띄어야 하기에 일단 사진 자체에서도 옷이 강조되고 배경은 여백처럼 작용한다. 옷의 이름, 브랜드, 가격과 같은 간단한 정보는, 사진 밑이나 배경 위와 같이 사진을 해치지 않는 곳에 짧게 표시된다. 패션 화보의 레이아웃에는 흰 여백이 없을 때도 많다. 사진 자체에서 배경이 여백처럼 작용할 때는 제2의 여백이 필요하지 않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글과 그림이 함께 구성된 잡지의 지면을 생각해보자. 소설책과 패션 화보보다 더 어려운 경우이다. 글과 그림의 위치가 시선의 흐름을 해치지 않고 상호보완적으로 서로 설명해줄 수 있는 최적의 레이아웃을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펼쳤을 때 함께 보이는 두 지면도 조화롭게 구성해야 하고, 기사가 다음 장으로 이어지는 콘텐츠라면 그것이 담긴 여러 페이지 간의 통일성도 고려해야 한다. 이때 레이아웃은 정해진 그리드는 지키되 페이지마다 유동적으로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페이지마다 콘텐츠의 양이나 종류가 달라서 알맞은 여백의 정도가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3. 여백, 타이포그래피의 길을 비추다.

우리가 무언가를 볼 때 그것은 아주 자연스럽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모든 것은 빛이 존재하기에 볼 수 있다. 세상의 모든 빛이 사라져버린다면 우리는 아무것도 볼 수도 알아차릴 수도 없다. 타이포그래피에서 여백의 역할도 그러하다. 여백은 빛과 같은 존재이다. 우리는 편하게 책을 읽는 것을 아주 당연하게 여기지만 사실은 여백이 존재하지 않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그렇다. 띄어쓰기와 줄 바꿈 하나 없이 빽빽하게 들어찬 글을 읽는다거나, 어두운 배경의 사진 위에 글이 겹쳐진 선전지를 떠올리면 금방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여백은 그 정도가 크든 작든 어디에서나 필요한 존재이다.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하는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보자. 우리는 여백에 대해 고민을 할 필요 없이, 키보드에 손을 얹자마자 어떤 내용을 글을 쓸지 고민할 수 있다. 프로그램 안에 자동으로 설정된 좌우 아래위 여백, 글꼴마다 다른 글자 사이의 여백, 되도록 많은 글꼴과 어울리도록 맞춰진 행간의 여백…. 당연하게 생각했던 곳에서 여백들에 제 역할을 해주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글의 형태에 대해 고민하지 않고 내용에 대해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한글 프로그램에서 제공하는 여백들이 우리가 쓰는 모든 글에 최적화되어 있지는 않다. 글마다 어울리는 글꼴이 다르고, 또 글꼴마다 크기가 다르기에 그에 맞는 여백이 필요하다. 인쇄된 결과물을 생각했을 때에는 자동 설정된 여백이 부족하거나 넘치는 일도 있다. 이럴 경우 나의 글과 어울리는 알맞은 여백을 한 번 더 고려해보는 것은 어떨까? 여백의 움직임은 생각보다 큰 효과를 발휘하기 때문이다.
  처음 글자가 탄생한 활자에서부터, 보이지 않는 디자인 안내선 그리드, 규칙성과 융통성이 동시에 필요한 레이아웃을 살펴보기까지 여백은 계속해서 등장했다. 오랫동안 여백이 타이포그래피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기에 한글 프로그램 같은 것에서는 편의상 정해진 여백의 규칙이 존재한다. 하지만 모든 콘텐츠가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사실 여백에 있어서 규칙은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언제나 여백을 의식하고 고민해야 한다. 나와 가장 어울리는 옷은 무엇인지, 제일 편안한 표정은 어떤 것인지, 나의 성격은 어떠한지….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모여 자신을 이루듯이 여백에 대해서도 그럴 수 있어야 한다. 글과 가장 어울리는 글꼴은 무엇인지, 제일 편안한 시선의 흐름은 어떤 것인지, 그리드와 레이아웃은 어떠한지, 여백은 또 어디에서 어떤 일을 하고 있을지….

이민지  leereum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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