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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의 계절을 지나는 당신에게

학교를 거닐기만 해도 신이 나고 설레던 때가 있었다. 이 건물은 뭐고 저 통로는 어디로 통할지 하나같이 호기심이 가던 때가 있었다. 처음 하는 일이라면 이것저것 따지지 않고 뭐든지 다 해보고 싶은 욕심으로 가득 차 있을 때가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는 ‘현실’이 어떤 건지 고민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즘은 다르다. 학년이 올라가면서 ‘현실’이라는 단어에 눈이 가기 시작했다. 아마도 곧 닥쳐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컸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을 겪고 있는 모두가 지난, 혹은 지나고 있을 계절을 되돌아보며 작은 위로를 건네고자 한다.
 


여름.


온통 기분이 좋지 않다.
찝찝한 땀이 맺히는 게 싫어서 에어컨 밑에만 꼭 붙어있다.
쨍쨍하고 더운 낮에는 기운 없이 눈을 붙이고 있다가 어둑해지면 꾸물꾸물 일어난다.

나태해지기 딱 좋은 계절이다. 더운 낮에는 나가기 싫어서 온종일 집에 있고, 밤이 되어서야 아무것도 하지 않은 날을 후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해가 뜰쯤에는 잠이 쏟아지기 시작해서 빛을 보면 살이 타는 드라큘라처럼 꼼꼼하게 커튼을 치고 다시 눕는다. 와, 정말 게으르다. 또 여름이 싫은 이유는, 다른 계절보다 내 살을 더 많이 드러내야 한다는 것이다. 딱히 몸에 콤플렉스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살이 타는 게 싫었다. 특히 신발 신은 모양대로. 계속 한가지 샌들을 신고 다녔더니 발이 그 모양대로 탔던 것이다. 뒤늦게 발에 선크림을 발라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대부분 시간은 집에서 보내고 몇 번 나갔다 온 건데도 살이 탄 게 놀라웠다. 다시 집에 돌아와서 나태한 시간을 보내다가 샌들 모양을 탄 발이 보일 때면 한숨이 나오곤 했다. 웃기게 탄 발을 가졌다면 적어도 밖에서 재밌는 시간을 보냈으면 좋았을 텐데. 아무것도 한 게 없구나.

친구들에게 뭐하냐고 카톡이 오면 ‘아무것도 안 하고 있어.’라고 대답할 때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당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순간에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았을까? 실은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아주 나태한 나날들을 보냈다고 스스로 생각했을 수도 있지만, 어딘가에 샌들 모양대로 탄 발처럼 당신이 노력한 흔적을 증명해 줄 무언가가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것이 존재한다고 해도 스스로 자신에게 만족할 수 있어야 한다. 어쩌다가 우리는 노력했음에도 그 가치를 쉽게 인정하지 못하게 된 것일까?
     어쩌면 현실 속에 얽매여 살아가고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현실은 계속해서 나와 다른 사람들을 비교하게 한다. 취업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해 볼 위치에 있는 대학생들에게 특히 가혹하다. "현실적으로 생각해 봐. 네가 아무리 노력했다고 해도 남들만큼 노력하지 않았다면 무슨 소용이니?"하고 현실은 우리에게 계속 속삭인다. 그런 속삭임을 떨쳐버리고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주기는 사실 참 어려운 일이다. 모두가 그렇다.
 


가을.


쓸쓸한 낙엽의 계절이라고?
그보단 지독한 냄새를 내뿜는 은행의 계절이라 하는 게 더 맞겠다.

은행나무를 길가에 심자고 한 사람은 대체 누굴까? 아마도 노랗게 물드는 예쁜 은행잎을 보는 것만큼이나 그 열매의 지독한 냄새를 맡는 것에 페티시가 있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매일 다니는 이 길을 은행 냄새로 물들이려 선택했을 리가 없다. 은행잎이 가장 예쁠 때 냄새가 지독한 은행이 떨어진다는 아이러니에 아름다움을 느꼈던 걸까?
     터진 은행들에는 각자의 사연이 있을 것이다. 떨어지면서 혼자 터졌을 수도 있고, 지나가던 차가 바퀴로 뭉갰을 수도 있지만- 아마 가장 많은 사연은 사람들에게 밟힌 것일 테다. 참 신기한 것은 모두들 은행을 밟지 않으려 노력하는데도 바닥에 떨어진 은행들이 죄다 밟혀 있다는 것. 때로는 피하려 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있나 보다. 은행을 밟은 사람들에게도 모두 다른 사연이 있을 것이다. 피하려고 피했는데 실수로 밟아버린 사람, 은행을 죄다 피해서 가기엔 시간이 없어서 밟히든 말든 후다닥 뛰어간 사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밟은 사람… 은행에도 사람들에게도 터질 수밖에 없었던, 밟을 수밖에 없었던 각자의 사연이 있었을 것이다.

현실에는 아무리 노력해도 피할 수 없는 일들이 종종 일어난다. 지독한 냄새와 같은 경고를 받아서 나름 애써봤는데도 실패하는 일들이 있다. 예를 들자면, 다음 날 시험을 위해 밤새 공부를 했는데 깜박 잠이 들어 시험에 가지 못한 경우. 아니면 과제 제출 마감 시간까지 열심히 타자를 해서 이메일을 보냈는데, 메일 주소에 숫자 하나가 빠져서 제출하지 못한 경우. 끔찍한 이야기들이다. 나는 분명 나름대로 노력했는데, 운명의 장난으로 벌어지는 비극적인 일들이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기 자신을 탓하기 마련이다. ‘왜 미리 안 했지? 왜 제대로 확인 안 했지?’ 하고 말이다. 어느 정도의 자책은 필요하지만 너무 심하게는 하지 말자. 가을이 오면 한 번쯤은 밟을 수밖에 없는 은행처럼, 현실에서도 그런 일들이 일어나곤 하니까. 그냥 은행 한 번 밟았다! 생각하고 쓱 넘겨버리는 게 좋을 때도 있다.
 


겨울.


뎅- 하고 종이 울렸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계절은 여전했다.
춥고 또 추웠지만 눈이 올 때면 신이 났다.

하루는 아무 발자국도 없이 눈 쌓인 내리막길을 조심조심 밟고 내려갔다. 다른 길도 있는데 왜 굳이 내리막길로 가느냐고 친구가 물었다. 그냥 웃으면서 ‘재밌잖아. 안 넘어지면 되잖아. 넘어져도 괜찮고.’하고 대답했다. 미끄러워서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다들 생각해서 그 길을 걷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집중해서 천천히 내려간다면 넘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물론 내가 꽈당! 하고 크게 넘어졌다면 친구가 ‘그럴 줄 알았다.’라고 한마디 했을 것이다. 그래도 그것도 나름대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겨울이라면 한 번쯤은 눈길에 미끄러져 보는 것도 재밌으니까.

눈 쌓인 내리막길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무도 가지 않는 위험한 길과 비슷하다. 졸업하고 나서 취업 준비를 하지 않고 다른 일을 하려 한다면 누군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왜 그런 선택을 하는 거야? 위험하잖아.’ 그 말에는 물론 일리가 있다. 많은 사람이 눈과 같은 위험요소가 있는 길을 굳이 선택해서 가지 않는 것은 실패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확률은 자신의 태도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그냥 평범한 길을 간다면 걷는 것에 신경 쓰지 않고 성큼성큼 앞만 보고 갈 수 있겠지만, 조금 어려운 길을 간다면 한 걸음 한 걸음을 신경을 써서 내딛어야 한다. 평범한 길보다 생각할 것이 많겠지만, 자신이 당당하게 ‘재밌잖아. 안 넘어지면 되잖아.’하고 대답할 수 있다면 충분히 그 길을 걸을 가치가 있을 것이다. 혹여 넘어지게 되더라도, 그 길을 걸은 것은 당신에게 유의미한 경험이 될 것이다. 넘어지기까지 그 길을 걷기 위해 쏟은 열정과 노력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봄.


봄 봄 봄 봄이 왔네요 -
코끝이 살짝 차갑긴 하지만, 그 이름만으로 설레는 계절.
봄이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기대를 안고 미술관에 도착했는데, 뜻밖의 불행이 우리를 반겼다. ‘휴관’. 여기까지 왔는데, 휴관이라니. 잠시 절망을 담은 정적이 흘렀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려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버스노선도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버스 여행할래?’ 우리가 선택한 곳은 ‘겸재정선미술관’이었다. 익숙했던 미술관 대신 처음 들어보는 미술관을 즉석에서 방문해보기로 한 것이다. 버스를 타고 미술관까지 가기에는 1시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모든 것이 새로워서 1시간이 금방 지나갔다. 처음 타 본 번호의 버스, 처음 달려보는 길, 처음 가보는 목적지. 우리가 내린 곳은 꼭 소설의 한 풍경 같았다. 버스 정류장부터 미술관까지 풍성한 벚꽃 길이 펼쳐져 있었고, 그 길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봄다운 벚꽃 구경이었다.

새로운 시작을 앞둔 당신에게 예상치 못한 일이 닥칠지도 모른다. 큰 기대를 품고 대학교에 입학했는데 생각과 다른 부분이 많다거나, 배우고 싶다고 생각해서 들은 수업이 하나도 맞지 않다거나, 졸업을 하고 사회로 나가려는데 발목을 붙잡는 일이 생겼다거나. 절망적인 현실이다. 하지만 한 가지 기억할 것은 포기하지 않으면 그런 현실도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신의 노력으로 절망적인 현실을 희망찬 현실로 충분히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새로운 시작이 완벽하지 않았더라도 나아갈 수 있는 곳까지 계속해서 나아가자. 그 끝에는 당신을 위한 꽃길이 화려하게 펼쳐져 있을 것이니까.



더운 여름부터 쌀쌀한 가을과 추운 겨울을 지나 따뜻한 봄을 맞기까지. 계절을 지난다는 것은 한편으론 참 식상하고 평범한 일이다. 이미 수도 없는 계절들을 지나온 우리는 그들이 어떠한 성질을 가진지 이미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혹시,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는 편견에 붙잡혀서 매년 조금씩 달라지는 계절들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현실도 마찬가지다. 많은 사람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는지 매일 봐 왔기에, 현실이 지루하게 느껴질 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같은 봄이라도 작년의 봄과 올해의 봄이 다르듯이, 같은 현실이라도 타인의 현실과 나의 현실은 분명 다르다. 그동안 갖고 있던 '현실은 이러이러할 것이다'라는 생각에서 벗어나서 나의 현실을 한 번 돌아보자. 막상 나의 현실보다 타인과 사회의 현실에 더 주력했던 시간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물론 현실이 흘러가는 큰 흐름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나의 현실을  좀 더 아끼고 생각하며 살아간다면, 더 의미 있고 행복한 나날들을 보낼 수 있을지도.

이민지  leereum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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