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는 법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예전에, 일이 너무 힘들면 싸워서 극복하려 하지 말고 반대 방향으로 도망가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이가 없었다. 살면서 한 번도 문제 상황에서부터 도망쳐야겠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살아가는 게 하루하루 버거워지기 시작하면서, 어쩌면 지금이 도망칠 타이밍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삐뚤어질 대로 삐뚤어진 스물셋이었다. 삶이 힘들다기에는 가진 게 너무 많았다. 죽고 싶을 만큼 힘든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그저 더 이상 보고 싶은 것도 없고, 갖고 싶은 것도 없었을 뿐이었다. 잠이 안 오면 내일이 더 나을 거라고 생각해 봤다. 그럼 어느 날은 더 낫기도 하고, 어느 날은 더 나쁘기도 했는데, 대부분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은, 어제는 오늘이고 오늘이 내일이었다. 무료했다.

바다라기보다는

어렸을 때 습관처럼 하던 말이 있었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는데, 세상을 움직이는 원리와 질서는 있다고 생각해. 사필귀정, 권선징악 같은…그런 힘으로 세상이 돌아가는 거야. 그래서 나는 항상 부지런히 고민했다. 나는 세상의 모든 문제를 생각해 답해야 하는 사람이어서, 저녁 메뉴는 어떤 걸 고를지부터 왜 1 다음에 2가 오는지까지 고민했다.

그래서 나는 이 고착 상태가 싫었다. 나에 따르면 분명히 세상에는 원리가 있어서, 나에게도 답이 있어야 했다. 그런데 이렇게 하루 또 지나고 하루 더 나이를 먹고, 매일이 무미건조했다. 세상이 사막 같다 – 그 생각에 문득 생각나는 제목이 있었다. 사막을 건너는 법. 고등학생 때 읽어본 듯하기도 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읽기 시작한다. ‘나는 집에 도착한 그 첫 순간에 베일에 가린 듯이 모든 사물, 모든 사람들로부터⋯.’

‘이렇게 바보 같은 책이 있다니.’

브라우저를 다시 꺼 버렸다.

내가 듣고 싶은 대답은 아니었다. 나는 이 작가가 나의 두통을 다 잊게 할 해결책을 주길 바랐던 것이지, 세상이 허무로 가득 찬 무덤이라고 듣고 싶지는 않았다. 평생 개울가를 휘젓고 있을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달을 더 고민해서 얻은 답은, 작가의 말이 맞았다. 삶은 무상하고 권태롭다. 물론 그 허무한 삶을 이겨내는 방식이 꼭 거짓된 목표를 찾아서 좇는 것이어야 했는지는 여전히 동의하기에 어려웠지만. 하지만 어쩐지, 모든 것에는 이유가 있다, 를, 모든 것에 이유가 없다, 로, 살짝 바꿔주면 바꾸면 말이 되는 것 같았다.

며칠 더 지나서 친한 오빠랑 저녁을 먹었다. 그저께 엄청 맛있는 라멘 가게에 갔는데, 합정역에 더 맛있는 가게가 있다고 들었다 했다. 꽤 괜찮은 가게였다. 오빠보다 빨리 먹어서 머쓱해진 나는 이야기를 했다. 교수님께서 수업 시간에 간식 사주셨던 일, 저번 주에 본 전시회, 요즘 배우고 있는 프로그램, 이런저런 말에 세상 참 별거 없다고까지. 나는 항상 머쓱하면 말이 많아졌다.

오빠는 한참 듣다가 운을 뗐다. “네가 진짜 중요한 걸 배워가네. 내가 가장 자주 하는 말이 뭔지 알아? 그냥 해. 그게 진짜 맞는 것 같아. 우리는 항상 나에게 왜 이런 일이 왜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를 고민하는데, 사실 그 일이 나한테 일어나지 않을 이유도 없잖아.”

나는 집에 오면서 그 말을 곱씹어 보았다.

맞불 작전

한때는 답을 적지 않고는 버티지 못해 했으면서 모든 질문을 물음표로 남겨두기 시작했다. 세상에는 답을 찾을 수 없는 질문도 있었다. 어차피 내려올 산을 왜 올라가나, 어차피 흙 될 삶을 왜 살아가나, 그런 질문은 사탕처럼 입 안에서 이리저리 굴려보다 넘어가는 이야기들이었다. 그리고 가끔은, 차라리 생각하지 않는 편이 나았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다들 나에게 무슨 생각을 하냐고 물었지만, 대부분 나는 아무 생각도 하고 있지 않았다.

산불이 났을 때 불이 오는 맞은편에 마주 놓는 불이 맞불이다, 두 불이 만나 더는 탈 것이 꺼지도록 만든다. 나는 거짓으로 살 수도 없었고, 도망칠 수도 없었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이 맞불이었다. 인생이 이유 없이 다가오면, 나도 모든 일에 이유를 두지는 않는다. 왜 아침에 일어나야 하나, 사실 이유는 없었다. 왜 학교에 가야 하나, 그것도 이유가 없었다. 그냥 일어나고 그냥 학교에 갔다. 사막을 어떻게 건너냐고 물었는데, 걸어서 건넌다는 얼렁뚱땅한 대답이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다. 오히려 더 많은 게 보였다. 평소에 보이지 않았던 것들, 내 이마를 만지고 있는 내 손이 느껴진다. 나는 이마 한가운데가 살짝 파여 있었다. 신호등이 초록빛으로 바뀐다. 신호등의 초록빛은 초록색이라기보다는 하얀색이었다. 적어도 학교 앞 신호등은 그랬다.

그렇게 며칠을 보내면서 나는 몇 년 전으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나는 꽤 독한 수험생이었다. 항상 5시 20분에 일어나서 6시까지 학원에 갔다. 공부, 점심, 공부, 저녁, 공부, 귀가. 그리고 다시 5시 20분에 일어났다. 매일 똑같이 살다 보면 잡생각은 점점 줄어든다. 어느 순간 나는 학원 앞에 와 있었고, 어느 순간 집에 돌아가고 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해 여름만큼 자유롭다고 느낀 때가 없다. 그 하루하루가 나는 오히려 차분하고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할 일이 너무나 명확하고, 그 일이 정말 하나를 넣으면 하나가 나오는 일들. 마치 태풍의 한가운데에서 눈을 찾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수험생이 되는 듯했다. 아주아주 느긋한 수험생. 오전에는 수업을 듣거나 작업을 했고, 오후에는 도서관에 가거나, 가끔 카페에도 갔다. 그렇게 권태와 여유 사이에서도 그런대로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나침반

“집에는 언제 들어갈 생각이냐?”

“몰라, 너나 좀 가라.”

설계실을 나서면서 한 마디 더한다.

“언제는 밤은 절대 안 샐 거라 하더니.”

우리 반 교수님은 수업 첫날 이번 학기 목표를 하나씩 정해서 발표하게 하셨다. 호기롭게 밤샘 작업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했더랬다. 작업은 보통 양보다는 질이어서, 밤을 꼬박 새우지 않아도 할 수 있다는 걸 깨달았다며. 사실 그런 약속은 지키지 않은 지 오래였다. 나는 밤낮이 바뀐 지 한 달도 더 지났을 때였다. 수면 패턴이 망가졌다기보다는 그냥 패턴이 없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정확했다.

나에게 설계실은 편의점 의자 같은 곳이었다. 새벽에 앉기만 하면 모든 비밀을 다 말하게 된다는 진실의 의자. 나는 설계실에서 작업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가끔 이 적막함이 너무 싫을 때 Z동에 갔다. 우리 설계실은 애니메이션 주제가와 찬송가가 같이 나오는 요상한 곳이었다. 나는 그 사람들이 참 좋았다. 쓸데없는 걸로 한참을 웃고 떠들다가 다시 또 진지해져서는 인생의 무게를 논했다. 아침이 가까워지면 다들 작업은 반도 안 했다며 황당해했지만, 그런 날들은 하루치 작업물보다는 훨씬 더 많은 걸 주었다.

어렸을 때 내가 잘못 알고 있었던 건 하나 더 있었다. 나는 나를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각자 자신만의 상처를 인고 살아가는 거지 다른 사람에게 기대서는 안 된다고. 나는 대학에 오면서 훨씬 많은 걸 나누기 시작했다. 꼭 해결책을 얻으려고 얘길 하는 건 아니었다. 얘길 하기 시작하면 누군가는 이야기해줘서 고맙다 그랬고, 누군가는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이야기했고, 가끔은 정말 해결책이 나오기도 했다. 가끔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았다.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아도, 세상 살아가는 다른 이야기를 하나 듣는 것도 좋은 일이었다.

그렇게 어느 순간 모든 게 거짓말처럼 나았다, 고 말하고 싶었는데, 사실 세상은 그렇지도 않았다. 그냥 어떤 날은 좋은 날이기도, 어떤 날은 싫은 날이기도 했다. 또 한 계절이 끝나는 날은 그저 평범한 금요일일 뿐이었다.

이 세계를 덮고 있는 허망과 무의미와 그 밖의 모든 것을.

몇날 며칠을 기도하고 기도한 끝에 불러모은 보이지 않은 혼으로 집을 짓고,

- 서영은, 사막을 건너는 법

나는 좀 뻔한 이야기들을 좋아한다. 내가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을 다시 누군가에게서 확인받고 싶을 때가 있다. 인생에는 항상 새로운 모퉁이가 있지만, 그 모퉁이는 내가 이미 만난 수많은 모퉁이와 사실은 같은 것이라고 듣고 싶다. 그래서 나는 이 뻔한 글을 또 쓴다. 스물 세 살의 나와, 스물 세 살의 당신에게 이렇게 적는다.

정휘진 challenzy@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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