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말들은 가끔 저를 너무나도 슬프게 합니다. 어제의 일들이 전부 부정당하는 것 같다고 느끼는 탓일까요? 마치 시간이 없으니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라고 떠미는 듯한 말들은 평생 익숙해지지 않을 것만 같아요. 그 짧은 기간에 정말 많은 일이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정도로 좋았던 일, 두고두고 후회했던 창피했던 일, 끝이라는 말만이 맴돌았던 슬펐던 일, 끝이 아니길 바란 행복했던 일. 하나하나가 너무나도 소중해요. 다만, 이제는 전부 과거의 일입니다. 이유야 어쨌든 바람직하지 않아요. 과거에 묶여서 나아가지 못했고, 추억에 잠겨서 시간을 낭비했습니다. 밀려드는 지나간 이야기를 제어하지 못한 대가는 생각보다 크게 다가옵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고, 하지 않았습니다. 삶에서 의미라고는 찾을 수 없었어요. 이것도 일종의 번 아웃이었을까요? 그런 시기였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예민함만 가득한. 딱 3일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는데, 그때는 그게 정말 길게 느껴졌어요. 이중처리 된 창문을 꽉 닫아도 늘 있는 도시 소음이 유난히 크게 들리고, 노이즈 캔슬링 스피커에서 쏘아대는 소리마저 거슬리는 상태. 뭘 해도 재미없고, 재미가 없으니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악순환. 흔한 일입니다. 전에도 종종 이런 일이 있었으니까. 다만 이번에는 평소보다 오래가서 무서웠어요. 계속 이렇게 살아있을까 봐.

그러다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합니다. 친구의 좋은 소식이 좋게 들리지 않았어요. 나는 잘 안되고 있는데. 그러면 혼자 조급해져서 유치한 비교가 시작됩니다. 열심히 나보다 안되는 이유를 찾아요. 얘는 학벌이 낮으니까. 쟤는 성격이 안 좋으니까. 힘들게 얻었던 자신감은 이미 사라졌습니다. 용기를 내서 하고 싶은 대로 하기로 다짐했는데. 적어도 이런 의미는 아니었는데. 기분이 주변을 대하는 태도가 되기 시작했어요. 그것만은 막고 싶었습니다. 돌이킬 수 없어질 것 같아서. 그래서 열심히 외면하기를 택했어요. 속에서 끓어오르는 이야기들을 외면하고, 앞을 내다보기 위해서 애썼습니다. 역시 마음처럼 되지는 않더군요. 그래서 몇 번의 시행착오를 겪은 끝에 과거와 미래 사이에서 나름의 타협점을 찾았습니다. 정말 이상한 규칙인데, 그건 사회에 나를 맞추는 것. 모두가 바쁘게 일하고, 공부하는 낮에는 저도 그래야 합니다. 꿈을 찾고, 미래를 생각하고, 바쁘게 살아요. 그러다가 밤이 되면, 모두가 잠들면 추억들을 꺼냅니다. 저질렀던 실수를 다시 생각해 보고, 후회되는 일을 떠올리고. 보고 싶은 사람들을 속으로 그려요.

말하자면 낮은 그 무엇보다 중요한 미래의 시간. 그리고 밤은 저에게 있어 낮만큼 중요한 후회와 추억, 과거의 시간이라고 하겠습니다.

수업 중입니다. 열심히 밑줄도 치고 표시도 해요. 그렇게 하기로 했으니까. 수업이 끝나면 수업 시간 내내 잊지 않으려고 애썼던 생각을 꺼내요. 무언가 표현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 꽤 오래전부터 해왔던 생각입니다. 감독이나 작가를 비롯한 작품을 만드는 사람들. 흔히 예술가라고 불리는 이들. 그런 사람들을 예전부터 동경해 왔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하며 살아갈 수 있다니. 이만한 사치는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이런 직업에는 흔히들 박봉이다, 근무 환경이 안 좋다, 불안정하다 등의 평가가 따르기 마련입니다. 저도 거기서 완전히 자유롭지는 않지만, 처음부터 잘 되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하다 보면 되는 거지. 결국은 다 꿈보다는 현실을 택한, 그리고 그 선택에 미련이 남은 사람들이나 하는 질투라고 생각했습니다. 또, 이런 직업들이 공유하는 공통점은 저를 한층 더 이상으로 매료시키게 됩니다. 영원함. 세상이 변해도, 주위가 변해도. 우리가 변해도 이 순간만큼은 영원히 한 편의 영화로, 한 폭의 그림으로. 하나의 노래로, 그리고 한 편의 글로 남을 거예요. 글을 좋아하는 이유 같은 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저는 이 순간을 간직하는 영원함에, 그 모순에 반했나 봅니다.

가끔 놓친 것들이 떠오르는 밤이 있습니다. 하지 못한, 하지 않은 표현들. 표현에 대한 애착은 밤까지 이어집니다. 낮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어쩌면 지금 느끼는 건 애착보다는 후회에 가깝겠습니다. 표현에 대한 후회를 이야기하기에는 이제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았는데. 남은 시간을 낭비한다고 누군가 욕할지도 몰라요. 다만 최근 표현에 집착하게 된 이유는 시간이 굉장히 빠르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기 때문이겠습니다. 더 친해지고 싶은 사람, 더 같이 있고 싶었던 사람들이 많았는데. 남은 건 정말 극소수뿐이에요. 다 각자의 길을 갑니다. 너무 욕심을 부렸나 봐요. 아무도 기다려준다고 하지 않았는데. 적응이 느린 건 이래서 좋지 않습니다. 내가 적응할 때쯤이면 사람들은 벌써 다음 단계로 나아가니까. 어쩌면 저에게 표현은 이제라도 적응했음을 알리는 지나가 버린 행위일지도 모르겠군요. ‘침착하게’라고 지겨울 정도로 되뇌었는데, 그때는 정말이지 못했습니다. 지금 하면 잘할 것 같은데. 너무 소중했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는데. 우리가 나눈 대화는 다 기억하고 있어요. 우리가, 내가 더 표현에 능숙했다면. 표현하지 않으면 없는 것과 같다는 걸 조금만 일찍 깨달았다면, 우리는 지금도 같이 있을까요?

뻔하고 흔한 말들. 언제나 모를 때는 거기서부터 시작합니다. 그러면 거의 다 해결됐으니까.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했어요. 다들 후회가 짙은가 봅니다. 그렇다면 지금부터는 좋아하는 일 찾기에 집중해요. 그 사람들처럼 후회 속에서 살지 않기 위해서. 무엇을 좋아했고, 무엇을 해왔는지 떠올려 봅니다. 어렸을 때부터 기자가 되고 싶었어요. 생각해보면 언제나 저에게는 그게 꼭 붙어있었군요. 친구들은 챙겨보지 않는 뉴스를 꼭 챙겨봤고, 학생 때는 늘 자연스레 신문반에 속해있어요. 학교의 모든 동아리 중에 가장 활동이 잦고 귀찮은 부서였음이 확실한데, 그게 너무 좋았습니다. 이외에도 관련된 활동이 있다고 하면 교내외를 가리지 않고 일단 참여했어요. 친구들이 전날 한 뉴스에 대해서 떠들고 있으면 꼭 껴서 한마디 해야 직성이 풀리는, 저에게는 그런 영역이었습니다. 그리고 기자가 되기를 꿈꾼 뒤부터는 항상 진실에 대해 고민했어요. 완전한 진실이라는 게 존재할 수 있나? 어떻게 사실을 보도할 수 있지? 마치 이미 기자라도 된 것처럼. 사색의 끝은 언제나 ‘진실은 허상이고 아무도 알 수 없다’라는 비관으로 가득 찬 결론이었지만, 그 와중에 진실을 찾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는 이상도 섞여 있었어요. 누군가 해야만 한다면 내가 하고 싶다는 작은 소망과 함께. 저는 기자가 되어야 할까요? 그래도 이번 낮은 꽤나 성과가 있었습니다.

기억이 짧은 사람이 좋아요. 내가 한 실수를 금방 잊어줄 테니까. 동시에 기억이 긴 사람이 좋습니다. 실수하던 시절의 나를 잊지 않을 테니까. 한때는 인간관계가 전부인 적도 있었어요. 그때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습니다. 뉴스는 많은 사람이 보니까. 그러면 내가 너무나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언제까지나 뉴스를 보면서 내 생각을 해줄 테니까. 언론에 대한 사명감 같은 대단한 가치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진실은 어차피 허상이니까요. 기자보다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이유도 여기에 있어요. 화면에 나오는, 나를 볼 수 있는 시간의 총량이 아나운서가 절대적으로 기니까. 아마도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다기보다 ‘화면에 나오는’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나 봅니다. 뭐가 그렇게 아쉬워서 보여주고 싶었는지는 여전히 모르겠어요. 어쩌면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니라, 잊히기 싫었던 걸 수도 있겠습니다. 그런 거라면 뉴스는 최적의 선택이었겠네요. 뉴스는 맨날 하니까. 그러면 나를 계속 기억해 줄 테니까. 이것도 지독한 집착인데, 그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요. 모처럼 낮과 밤이 합치됐으니까. 내일부터는 다시 한결 편안해지기를 기대해 볼 수 있을까요?

지금 돌아보면 낮과 밤을 분리해 보자는 결심은 나름의 도박이었습니다. 과거도 간직하고 미래도 내다보자는, 하나도 놓치기 싫다는 조금은 이기적인 결정. 그 이기적임이 문제였던 걸까요? 모든 것은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어렵게 찾은 꿈에서는 단점만 보이고, 여전히 배경은 과거에 머물고 있어요. 그래서 생각하기를 멈추기로 합니다. 낮과 밤의 경계는 허물어졌고, 여전히 갈피를 못 잡고 있어요. 그저 생각이 흐르는 대로 의식을 맡기고 경계가 허물어진 낮, 밤을 살며 의미 없는 하루를 보낼 뿐입니다.

모든 걸 알 것만 같은 밤. 마지막 밤은 언제나 오래도록 남을 기억을 챙겨야 합니다. 밤은 너무나도 짧으니까요. 그 짧은 밤을 항상 생각으로 가득 채워 보내는 것은 이 순간이 영원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의 지하에 미련이 가득 남은 까닭이겠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밤은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꽤나 원초적인 질문으로 모여듭니다. 그러면 조금 알 것 같기도 합니다. 꿈이 뭐냐고 왜 그렇게들 물어봐 댔는지. 그건 아마도 “너는 어떤 사람이야?”라는 의미의, 뻔한 질문의 외피를 쓴 무한한 애정이었을 겁니다. 꿈은 너무나도 큰 의미를 내포하기에. 꿈을 생각하면 나를 생각합니다. 그러면 주변을 생각하고 또 사회를 생각해요. 생각이 생각을 물고 늘어집니다. 머릿속이 굉장히 복잡한 걸 보니, 저도 드디어 누구나 접어드는 시기에 들어섰나 봅니다. 

두 시간대를 살아갈 수 없음에 언제나 아파합니다. 미처 보내지 못한 시간을 뒤로 하고 나아가기에 세상은, 적어도 저에게는 너무나도 빨라요. 과거는 미래를 위한 기반이라고 했나요? 그렇다면 저는 기반을 탄탄히 하기 위해서, 어쩌면 과거를 소중히 하기 위해서. 조금은 천천히 나아가려 합니다.

반전 같은 건 없었습니다. 세상일이 마음 같지 않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이 계속 불안했고 낮, 밤을 살았어요. 결국은 시간이 해결했습니다. 가장 바라지 않던 결말이었는데. 그때 겪었던 불안은 여전히 조금 남아있어요. 더 긴 시간이 완전히 해결해 주리라고 믿는 한편, 이 불안만은 영원히 남아있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합니다.

그렇다고 얻은 게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어요. 마음을 분리하는 법을 배웠습니다. 감정은 유치하면서 소중하다는 걸 느꼈고, 사람들이 왜 우는지도 조금이나마 알 것 같아요. 왜들 그렇게 치열한지, 뭐가 그렇게 불안한지. 그리고 그런 불안한 사람을 사랑해도 되는지. 저도 조금은 어른이 됐을까요.

윤도진  yundojin111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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