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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몬드>, 공감의 의미에 대하여

*본 기사에는 소설 <아몬드>의 전체 줄거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내 머릿속의 아몬드는 어딘가 고장 난 모양이다. 자극이 주어져도 빨간 불이 잘 안 들어온다. 그래서 나는 남들이 왜 웃는지 우는지 잘 모른다. 내겐 기쁨도 슬픔도 사랑도 두려움도 희미하다. 감정이라는 단어도, 공감이라는 말도 내게는 그저 막연한 활자에 불과하다.” p. 29

 

소설 <아몬드>는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윤재’라는 소년의 시점으로 그에게 벌어지는 사건들을 그리는 소설이다. ‘아몬드’라는 제목은 주인공 윤재의 머릿속에서 알렉시티미아(감정 표현 불능증)를 일으킨 기관인 머릿속의 작은 편도체를 가리킨다. 윤재는 딱 아몬드만 한 크기의 편도체에 이상이 있어 태어나서부터 감정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따라서 타인과의 상호작용에서 꼭 필요한 ‘공감’을 전혀 할 수가 없고, 이는 혼자 살 수 없는 세상에서 살아가는 데 있어 치명적이었다.

 

우리 대부분은 태어나면서 감정을 갖고 태어난다. 우리가 갖고 태어난 그 감정들은 때로 섞이고 또 분리되고, 강해지고 또 약해지며 다양한 색채로 나타난다. 감정이란 우리의 매 순간순간에 색을 칠하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끼지 못하게 태어난 주인공은 모든 순간이 무채색이지 않을까. 그것이 어떤 것인지 그저 유추할 뿐인 우리는 윤재에게 처음부터 온전히 몰입하기는 힘들다. 하지만 윤재는 그러게끔 노력하고 싶어지는, 마음이 따뜻한 아이로 그려진다. 비록 윤재 자신은 모를지 몰라도 말이다.

 

윤재와 함께 살았던 엄마와 할머니는 어려서부터 윤재에게 감정이라는 것을 가르치려고 했다. 감정표현이 자연스럽게 나타나지 않는다면 공부하고 외워서 일상생활에 적용할 수 있게끔, 그렇게 해서라도 자라나면서 세상 사람들과 문제없이 섞일 수 있도록 부단히 노력했다. 그렇게 윤재를 위해 헌신했던 가족은 윤재의 열여섯 번째 생일날 도심 한복판에서 괴한에게 공격을 당했다. 엄마는 혼수상태에 빠지고 할머니는 그 자리에서 즉사했다. 윤재에게 있어선 알렉시티미아에 이은 두 번째 불행이었다.

 

갑작스럽게 세상에 혼자 남겨지게 된 윤재는 특별한 계기로 곤이라는 소년을 만나게 된다. 곤이는 어려서 실종된 이후 낯선 이들의 손에 길러지면서 어둡게 자란 소년이다. 곤이는 부정적인 감정에 있어서는 그것을 온몸으로 발산해냈다. 감정의 발로에 있어 상극인 것처럼, 곤이는 윤재와 적대관계로 시작했다, 하지만 자신만의 방법으로 윤재에게 끊임없이 다가간 곤이와, 사람에 대한 편견을 갖지 않고 내면을 들여다볼 줄 아는 윤재는 결국 친구가 된다. 내면의 선함을 스스로 해쳐서까지 윤재의 감정을 꺼내 보려고 할 정도로, 곤이는 윤재에게 지극정성이었다. 또한 도라라는 소녀를 만나 긍정적인 감정들과 사춘기 소년의 두근거림 따위의 것들을 알아가게 된다.

 

 

 

“툭, 내 얼굴 위에 눈물방울이 떨어진다. 뜨겁다. 델 만큼. 그 순간 가슴 한가운데서 뭔가가 탁, 하고 터졌다. 이상한 기분이 밀려들었다. 아니, 밀려드는 게 아니라 밀려 나갔다. 몸속 어딘가에 존재하던 둑이 터졌다. 울컥, 내 안의 무언가가 영원히 부서졌다.” p. 248

 

소설 말미에서 윤재가 마침내 감정을 느끼게 되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위험에 처한 곤이를 대신해 공격당하고 난 뒤 곤이의 품에서 쓰러진 윤재는 눈물을 터트림과 동시에 감정을 발산한다. 마침내 감정이 발로하는 것을 ‘둑이 터졌다’고 표현한 부분에서 독자는 윤재의 내면에서 일어난 조용하면서도 폭발적인 감정의 해일과 같은 것을 생생하게 경험하게 된다.

 

이 책은 이렇듯 감정을 느끼지 못해 타인과 공감하지 못하는 인물이 점차 감정을 배워가는 과정을 보여주면서, 부가적으로 공감의 가치와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해보게 한다. 소설이 던지는 많은 물음표 중에서, 나를 자극한 질문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인간은 누구의 불행부터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공감은 그 자체로 완전한가? 진짜 공감은 무엇일까?

 

 

 

너무 멀리 있는 불행은 내 불행이 아니라고, 엄마는 그렇게 말했었다.” p.245

 

윤재의 엄마는 뉴스 채널을 돌리면서 그렇게 말했다. 과연 인간은 누구부터 누구까지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우선, 나와 같은 인간으로부터 멀리 있는 존재들의 불행부터 생각해 봤다

 

나는 산낙지를 좋아했다. 조각조각이 난 낙지의 다리들이 저들끼리 엉켜서 구불대는 모양새가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 조각난 다리들을 초장에 담그면 더 격렬하게 이리 비틀고 저리 비틀었다. 산낙지의 맛보다도 그 이상하고 신기한 움직임을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일부러 초장에 담가 움직이는 모습을 지켜본 뒤에, 입에 넣어 볼 안쪽을 공격하듯 달라붙는 느낌을 즐기다가 결국에는 씹어 삼켰다. 나는 그야말로 낙지의 육신을 가지고 놀았다. 사실은 그 움직임이 단지 신경의 반응이든, 뭐든지 간에 나는 낙지를 죽이고 꿈틀거리는 육신을 괴롭히는 일에 무감각했다. 낙지의 머리를 썰고 얼굴을 뜯어내며 다리를 조각내는 모습도 눈 깜박하지 않고 볼 수 있었다. 과거의 나를 포함해 산낙지를 즐겨 먹는 사람 중에, 그것을 먹으면서 무참히 토막 난 낙지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은 없다.

 

인간과 조금은 가까운 포유류의 고통은 어떨까. 어릴 때 돼지를 도살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직접은 아니고, 인터넷에서 우연히 돼지의 배를 산채로 가르는 것을 봤다. 인간의 비명과 가까웠던 돼지의 울부짖는 소리와 사방에 튀는 피, 쏟아지는 돼지의 내장이 어른거려 며칠 동안 고기는 입에 대지도 못했던 기억이 난다. 돼지가, 소가, 개가, 그렇게 도살당하는 장면을 보고 충격받지 않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 동물들의 고통을 생각하며 눈을 찌푸릴 것이다. 동물권을 위해 어떤 사람들은 채식을 한다. 그렇지 않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래도 고기를 먹는다. 어차피 고기를 먹을 것인데, 구태여 심적인 고통을 느껴 가며 그런 장면을 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잠깐, 그렇다는 것은 고통을 알고 공감하면서도 외면한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가끔 그때 보았던 돼지의 모습이 떠오르지만, 오늘 저녁상에 오른 돼지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그리고 텔레비전에 나오는 귀여운 돼지를 보면서 웃었다.

맞다. 이것이 나요, 이것이 대부분의 인간이다.

 

 

 

멀면 먼 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 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p.245

 

같은 인간에게 느끼는 공감은 다를까? 소설에서 윤 박사가 보고 있던 뉴스에서는 외국 어딘가에서 벌어지는 전쟁에 대한 뉴스가 나오고 있었고, 텔레비전 화면 너머로 그것을 지켜보고 있는 얼굴들은 무표정하다. 실제로도 우리는 매일같이 뉴스에서 사건 사고를 접하고, 누가 죽었고 누구는 다쳤으며, 누구는 이렇게 어렵게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으면서도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을 때가 있다. 감정을 모르는 윤재조차 이런 사람들을 보며 ‘그건 진짜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사실은 그렇게 무표정한 인간들이 공감을 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공감을 선택적으로 피할 뿐이다. 소식통이 다양해지면서, 우리는 너무나도 다양한 이야기를 접해야만 한다. 하지만 하나하나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것보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을 살아가는 게 더 중요했다.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죽어가는 돼지를 외면해왔던 것처럼, 우리는 자연스럽게 같은 인간에게도 선택적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갖추게 됐다. 우리의 공감 능력은 그렇게 점점 흐려져 갔다.

 

그럼에도 우리는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공감을 꼭 필요로 한다. 같은 것을 보고 웃고, 울고, 화내면서 서로의 마음이 통하는 것을 느끼고, 나의 감정에 따라서 함께 기뻐하고 슬퍼해 주는 사람에게 호감을 느끼기 마련이다. 시간이 흘러 면대 면을 넘어 매체를 통해 관계를 이어나가는 방법을 찾아가던 사람들은 ‘공감 버튼’을 만들어냈다. 버튼 하나로 손쉽게 표하는 공감,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관계를 이어나갈 방법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버튼을 누르며 공감을 남발하기도 한다. 그렇게 진정성이 옅어진 공감은 서로에게 더는 안부 인사 이상의 의미를 주지 못한다.

 

‘인간은 누구부터 누구까지의 불행에 공감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답을 할 수는 없었다. 인간이라고 쉽게 함축해버린 개개인의 공감 능력은 다 다르기 때문이다. 다만 현대인들의 공감이랑 쉽게 껐다 켰다 할 수 있는 무언가가 되어버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자신과 가까운 사람의 일이 아니면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쉽게 지나쳐 버리는 사람들의 모습, 그리고 나의 모습을 자주 마주쳤었다. 때때로 그 모습들은 아주 섬찟하게 다가온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공감하고, 또 본능적으로 공감하지 않았다.

 

한편 내가 공감을 하고 있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완전한 것일까?

 

공감이란 어느 한쪽을 택하기 쉬운 것이다. 대립하는 관계들이 있고, 그들의 이야기가 존재할 때 자연스럽게 나의 감정이 더 이끌리는 쪽에 공감하기 마련이다. 그것을 선택하는 일은 결코 문제가 아니다. 다만 그 공감이 개인의 주관보다는 다수를 좇도록 이끌리는 일도 적지 않다. 다수가 격렬하게 공감하는 쪽에 나도 공감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소설 속에서 엄마와 할머니를 공격한 가해자는 생활고로 고통을 겪던 중년 남성이었고, 그의 사연이 알려지자 언론에서는 가해자에 대한 동정 여론을 만들어 내기 시작했다. 자연히 희생자의 이야기는 주목받지 못하였고, 가해자에 대한 동정 여론 또한 열흘이 지나자 사람들 입에 오르지 않게 되었다. 다수의 생각을 움직이는 힘이 있는 언론이 이끄는 방향으로, 사람들은 맥없이 휘둘렸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자 여론의 목소리는 힘없이 흩어졌다. 실제로 매일매일 수백, 수천만 명이 이용하는 SNS 상에서 여론에 휘둘려 한쪽으로 치우친 수만 개의 공감 버튼이 개인에게 수만 개의 화살로 박히는 일이 허다하다. 그리고 그에 대한 관심도 쉽게 사그라든다.

 

행동으로 이어지지 않는 공감의 경우는 어떨까. 우리가 타인의 불행에 진정으로 함께 아파하고, 같이 눈물 흘릴 만큼 공감하지만, 정작 여건과 여력이 되는데도 불구하고 그들을 돕기 위해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는다고 하자. 그것은 진짜 공감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일까? 이제 나는 직관적인 공감의 의미와 세상이 정말 필요로 하는 공감의 의미 사이에 거리를 들여다보게 되었다. 후자의 의미를 따르면 감정뿐인 공감은 반쪽짜리 공감이다. 오늘은 누가 누구의 손에 죽었고, 어떤 회사에서는 이런 비리가 발생했더라는 소식에 공감 버튼이 몇만여 개씩 눌리면서 결코 바뀌지 않는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그럼에도 나 또한 매일같이 반쪽짜리 공감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느끼고 자책한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진짜 공감이란 무엇일까?

 

공감은 곧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낌. 또는 그렇게 느끼는 기분’이랬다. 간단하게 정의되는 말이지만, 때로는 사전적 정의 너머의 세상은 과연 어떤 공감을 필요로 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대상을 존재 그대로 온전하게 이해하고, 내가 오롯이 그 대상이 되어서 그의 느낌을 함께 하는 것. 그것을 넘어서서 같은 감정을 느꼈다면 대상을 위해 기꺼이 행동하는 것. 어쩌면 그 이상. 그것이 완전한 공감이 아닐까? 그렇다면 세상에 진짜 공감을 할 줄 아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무런 명쾌하고 희망적인 답도 얻지 못한 채 씁쓸한 기분을 뒤로하고 책장을 덮는다. 이것이 윤재의 이야기를 통해 소설이 주고자 했던 문제의식이 아닐까. 나는 오늘 공감하고, 또 행동했는가? 아니면 단지 방관했는가? 내가 만약 감정을 모르는 윤재 같은 아이를 만난다면, 진짜 공감에 대해 알려줄 수 있을까? 당신은 어떤가?

 

김예지  remarkableride9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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