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봄. 점심 식사를 마친 반 아이들이 시답잖은 주제로 웃고 떠든다. 5교시 국어시간은 장래희망을 발표하기로 한 날. 축구선수, 선생님, 판검사나 의사로 넘쳐나겠지. 급식으로 나온 포도를 먹고 남은 껍질을 쥔다. 엄지와 검지에 묻은 끈적한 과즙을 휴지에 닦아낸다. 육안으로 보이지 않지만 내 손가락에는 필히 포도 분자가 남아있으리라. 이를 ‘포도 분자 씨’라 명명하고 나를 이 안에 담는다. ‘Mr. 포도 분자’는 포도 분자의 씨(seed)로 형상화되어 굳어졌다. “나도 모르는 내가 내가 아는 너다.”. 포도 분자 씨는 나를 대신하여 자유의지의 표상이 되어주었다. 자유. 내 손끝 어딘가에 분명히 묻어 있는 이 포도 분자와 같이 존재할 것이다.
2009년 6월 25일 마이클 잭슨이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떴다. 일평생 그를 괴롭힌 언론은 추모 방송에 돌입했다. 수억 명이 검색창에 Michael Jackson을 두드려 구글, 페이스북, 트위터가 트래픽 과부화로 다운됐다. 전 세계 쇼핑몰에서 마이클 잭슨과 관련된 모든 제품이 팔려나갔다. 타임지는 9.11 테러 이후 첫 특별판을 발행했고, 미국 의회에서는 그를 기리는 묵념이 있었다. 각종 루머와 스캔들, 특히 아동 성추행 의혹으로 인해 마이클 잭슨에 부정적이었던 여론은 그의 사후에 급격히 바뀌어갔다. 2005년 갤럽 조사 당시까지 아동 성추행에 관한 모든 의혹에 대해 무죄 및 무혐의 처분이 내려졌음에도 75%의 미국인이 마이클을 유죄라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죽음 직후 미국인의 51%가 그의 팬이라 응답했고, 마이클은 ‘미국인이 가장 다시 살리고 싶은 유명인’으로도 선정된다.
한심하다. 악의적인 루머로 점철된 타블로이드 보도에 관심을 주고 놀아난 주제에 누가 누구의 팬이고, 누가 누구를 살리고 싶다는 것인가? Just because you read it in a magazine or see it on the TV screen don’t make it factual (당신이 잡지나 TV에서 봤다고 그게 사실인 것은 아니다). 제목부터 <Tabloid Junkie>인 마이클 잭슨 노래의 가사이다. 어리석은 대중을 사랑하는 스타의 죽음으로 확인한 초등학교 6학년생은 화가 났지만 이내 무력했졌다. 범람하는 가십 뉴스 사이에서 나라고 제대로 된 중립을 지킬 수 있었을까? 마이클 잭슨은 정말 성추행범이 아닌가? 대한민국을 뒤흔든 광우병 사건 당시 내가 제대로 된 진단을 내렸는가 되돌아 보니 할 말이 없었다. 좌우 진영 논리를 떠나 알력 다툼 속 졸속 보도에 이리저리 흔들렸던 국민이 대부분이었고, 나도 그중 하나였다. 그렇다고 국민 개개인의 잘못으로 치부하다 보면 무책임론으로 빠진다. 언론과 그 이면의 중첩된 이해관계에 따라 나의 의견이 정해진다. 측근의 비리혐의 수사과정에서 목숨을 끊은 대통령에 대해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언론과 정치권, 사법 집단까지 뛰어들어 싸우며 공작을 해대는 와중에 나의 진단이라는 게 있을 수 있을까? 화면에 비치는 그들의 모습을 지켜볼 뿐이다.
포도 분자 씨에 의심이 든다. 논리적인 사고에 능해 보이는 소위 전문가들조차 TV에 나와 정치나 종교 문제에 관해서는 자가당착에 빠지고 이성보다 감정에 치우쳐 논박한다. 그가 자란 지역이나 속해있는 집단의 의견을 자기 생각인 양 말한다. 저들처럼 되지 않으리란 법이, 저들보다 못해지지 않으리란 법이 없다. 두렵다. 어리석은 나와 너, 우리가 남을 뿐이다.
마이클 잭슨이 죽기 열흘 전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시기 한참 전 DNA 속에 유전정보를 넣어두셨다. 이 자그마한 톱니바퀴는 가능성이라는 미명 하에 여러 상황과 맞물려 나의 삶을 동의도 없이 작동시켜왔을 것이다. 당사자 없이 체결된 불공정 계약의 내용이 뭐였는지만이라도 알고 싶었다. 아버지의 아버지 이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는 어떠했는지. 두 할머니, 얼굴을 뵌 적도 없는 어머니의 아버지, 그리고 이들로부터 태어난 어머니와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찾아 나섰다. 들여다 볼수록 나의 가치관과 행동의 계기들이 확인되었고, 이는 마이클 잭슨의 죽음과 함께 포도 분자 씨의 존재를 더욱 불확실하게 만들었다.
중학교 입학식 직전의 사고는 나를 휠체어에 앉혔다. 가뜩이나 생각이 많던 나는 이제 정말 생각만을 하게 되었다. 보통교육에 대한 불신이 없던 시기였기에 의외로 순순히 공부했는데, 한국의 교육과정은 보기보다 정교했다. 초등학교 사회 시간에 배운 인간의 자유와 권리 개념은 도덕, 사회, 세계사 수업의 내용과 부드럽게 이어졌다. 이에 따로 찾아본 책, 영상 자료를 더해 자유와 자유의지의 개념을 구체화했다. 프랑스 혁명에서 형성된 자유 개념에서 시작해, 개인의 자유가 시민사회, 민주사회 등으로 이행됨에 따라 여러 형태로 인식되고 평가되었음을 배웠다. 특히 현대에는 개인의 자유를 인류역사상 가장 조심스럽고도 소중하게 다뤘다. 외부로부터 침해될 수 없다는 의미를 넘어 인간 한명 한명의 개별성을 중시하게 된 것이다. 그간의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 지점이 의심스러웠고, 주위 사람들의 말과 행동을 제멋대로 평가하며 스스로도 검열 해대기 시작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고등학교에 올라가자마자 접한 칸트의 윤리학이 이에 제동을 걸었다. 모든 인간에게는 선험적인 도덕률이 있어 그 자체로 가치가 있으므로, 이를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해야 한다니. 자유가 어떤 목적이나 행위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서 비롯된다는 발상은 비관적 운명론자였던 나를 자극했다. 대학자의 방대한 사유를 교과서 몇 장과 칸트의 번역서, 인터넷을 뒤적인 수준으로 수용하긴 했지만, 회의감에 휩싸여 있던 포도 분자 씨가 칸트의 도덕률로써 인정받는 순간이었다. 주위 사람과 대중에 대한 과도한 불신에 관해 반성했다. 부푼 자의식에 취해 지껄이는 저 인간조차도 도덕률을 품은 고고한 존재일지어다! 물론 이는 반성이 아니었다. 칸트의 철학은 난해했고, 당시의 나는 그가 어떠한 맥락에서 도덕률을 제시했는지 파악하지 못했다. 그저 나 자신과 타인에 대한 골치 아픈 판단의 굴레를 끊고자 했을 뿐이었고, 칸트의 신도가 되어 잠시 해방될 수 있었다.
어설픈 학습에서 탄생한 엉터리 종교에 대한 회의는 나를 망치를 든 철학자 앞으로 이끌었다. 철학 전반에 관한 이해가 부족했음에도 니체에게 끌린 이유는 그가 칸트를 비롯한 이성중심주의와 절대적 법칙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칸트의 도덕률을 점검하려 했더니 니체가 튀어나와 이를 부숴주었다. 찝찝하게 해놓은 숙제를 누군가 대신 찢어버린 듯 당황스럽지만 속시원했다. 니체에 대한 관심은 그와 같이 보편적인 관념을 거부하던 실존주의자들로 확장했다. 이때 알베르 카뮈의 『시지프 신화』와 『이방인』을 읽고 이전의 실수를 되풀이하게 된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통을 향하여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내쉬는 숨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곧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하여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더 우월하다.
『시지프 신화』 中
『시지프 신화』에서는 ‘부조리’가 무엇인지, 이에 대한 반항이 가지는 의미가 드러난다.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진리나 법칙이 존재하지 않고, 존재한다 치더라도 인간은 이를 이해할 수 없다. 인간이 인간 존재에 관해 어떠한 이유나 의미도 찾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인간이 삶에 대한 부조리를 의식하는 순간부터 부조리는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인간은 이로부터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부조리를 인식하고 실패할 것을 알면서도 이에 투쟁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사는 것뿐. 그리스 신화에서 시지프는 신으로부터 바위를 산꼭대기까지 운반하라는 벌을 받았다. 산꼭대기로 올라간 바위는 굴러 떨어지기 때문에 시지프는 이 작업을 영원토록 해야 했다. 카뮈는 이 시지프에게서 부조리한 인간의 전형을 발견했다.
포도 분자 씨는 부조리 그 자체였다. 나를 포함한 인간은 어떠한 의미도 갖지 않고, 이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 만든 것이야말로 부조리이다. 그동안 부조리에 이름을 붙여주고 이에 저항하기는커녕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카뮈의 부조리 문학은 칸트의 도덕률과는 정반대의 방향에서 자유인이 되고자 했던 나의 부담을 덜어주었고, 나는 포도 분자 씨의 존재를 입증할 필요가 없이 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안도감 또한 오래가지 못했다.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이방인』 中
니체 왈 신은 죽었다. 사람들이 그리스도교의 천국과 같은 이상 세계에 너무 집중했던 게 탐탁지 않았던 그는 아름다운 세계를 최종역으로 설정해놓고 현실은 그곳을 가기 위한 간이역쯤으로 여기는 수동적인 태도를 지양했다. 대신 끔찍한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바꾸자는 능동적 허무주의를 제시한다. 능동적 허무주의는 카뮈의 부조리주의와 상통했다. 카뮈의 부조리 문학에서도 허무주의의 한계 내에서 이를 탈피하려는 와중에 의미를 찾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다. 하지만 『이방인』에 등장한 뫼르소를 통해 니체와 카뮈 사이의 불협화음을 감지했다.
『이방인』에서는 죽음이라는 부조리에 대한 확신에서 오히려 자유를 느끼고, 이에 일관된 자세로 반항하는 뫼르소가 카뮈의 페르소나로 등장한다. 뫼르소는 어머니의 죽음에 무심했고, 법정에서는 사람을 쏴 죽인 이유로 눈부셨던 햇빞을 들었으며, 이에 선고된 사형 집행에 많은 구경꾼이 와서 증오의 함성으로 자신을 맞아주기를 바랐다. 이때, 기존의 도덕과 가치에 얽매이지 않은 뫼르소조차 니체가 제시한 이상적인 인간상 ‘위버멘쉬’에 미치지 못했고, 니체를 만족시키지 못할 뫼르소를 본 나는 부조리 문학의 위안을 거절하게 된다. 절대적인 운명을 인정한 카뮈보다 이조차 부정한 니체의 위버맨쉬가 자유인에 더욱 가까웠기 떄문이다.
뫼르소는 위버멘쉬의 조건을 겨우 하나 충족시켰을 뿐이었다. 허무주의를 넘어 이 세계를 긍정하고, 자기 입법적 가치를 창조하여 능동적인 결단을 내려 주인의 역할을 하는 위버맨쉬. 시지프, 뫼르소, 그리고 나와는 너무나 동떨어진 존재였다. 니체가 글을 쓸 때만 자신을 위버멘쉬로 착각했다는 세간의 조롱이 이해가 갔다. 니체조차 기존의 도덕과 가치를 부수기만 했지 대안을 제시하진 못했다. 신포도 앞의 여우가 된 나는 니체가 회복하고자 한 주인도덕 또한 대중과 소수 엘리트를 구분 짓는 귀족주의와 맞닿아 있다며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자유인을 논함에 있어 실패할 대로 실패한 나는 이후 학자, 그리고 주위 사람이나 여러 상황을 대면할 때 기존과 다른 방식을 취했다.
우선, 나의 한계를 인정했다. 여태까지 학자나 작가를 접하며 나온 다양한 생각은 그들에 관한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지 않았다. 제한적인 정보와 경험, 사유능력, 시간 등을 통한 불완전한 해석이었다. 가령, 현대 철학자 한 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주요 주제로만 따져도 인식론, 형이상학, 존재론에서 윤리학과 사회철학에 이르는 광범위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여기에 시대, 지역과 사조까지 따지는 총체적인 이해가 필요한데, 이를 고등학생 수준에서 갖추기는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어떤 대상을 이해하기를 포기해야 하는가? 대상이 이해가 안 되니 눈 귀 막고 그저 믿어버리거나, 대상 자체를 아예 없애버리는 짓은 두 번이면 족했다. 대신 나와 대상 A가 부딪히며 나온 일련의 생각, 그리고 내가 부족하게나마 이해한 A를 A’라 인식하여 A와는 구분하는 작업을 여태까지 만난 지성인, 예술가들에 소급 적용했다. 다소 조악한 방식을 통해 위대한 학자들 가운데 미약한 ‘나’를 사유의 주체로 자리매김 하려 했다. 이로써 학자의 사유를 온전히 보존할 수 있었기에 나중에라도 찾아와 학자를 재해석할 여지도 남겨두었다.
한계를 인정한 다음에는 이를 보완하고자 했다. 글을 잘 쓰려면 글을 읽고 쓰는 두 가지 행위가 함께 필요하다고 한다. 자유인이 되기 위해서도 이와 유사한 과정을 밟으려 했다. 자유인에 근접한 자들을 배우고, 특정 학자에게 기대어 생각을 전개해가다 방향을 잃었던 경험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나만의 의견도 틈틈이 정리했다.
또한 내가 원치 않았던 나의 속성을 능동적으로 제거하려 했다. 대표적인 제거 대상으로 나를 속박해온 대중에 대한 불신과 거부감이 있었다. 나는 이들을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유하는 ‘동시대성’에 관한 존중으로 극복하려 했다. 나와 동시대, 즉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 하나하나는 모두 축적된 인류의 지식과 경험 위에 서 있는 자이다. 이 축적분을 어떻게 활용할지에 관한 물음은 개개인에게 남아있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과거 인류와 비교했을 때 우리는 모두 현대의 시간을 살아가기에 이전 시대 사람들보다 유리한 위치를 보장받는다. 이 동시대성의 가능성을 인정하고자 했다.
포도 분자 씨의 존재는 더는 중요치 않았다. 보이지 않지만 있다고 믿고 싶은 무엇. 이 얼마나 기만적인가. 자유인을 찾을 때까지 포도 분자 씨를 4학년 교실에 묻어두기로 했다.
성인이 된 후에는 더 다양한 사람과 상황을 마주했다. 이전과 다른 경험과 정보를 얻을 수 있었고 머리는 더욱 복잡해졌다. 요즘에는 자유인이 스스로 부과한 의무를 어떻게 이행할 수 있을지, 유사 자유인을 자유인으로부터 어떻게 걸러낼 수 있을지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 자유인이 되지 못한 자들의 역할에도 관심이 간다. 학자로부터 얻은 정보 위주였던 생각은, 이들과 먼 자들의 입장까지 고려하며 전개해나가고 있다. 나의 자유인은 스스로를 속박한 상태에서 끝나지 않는다.
10년 가까이 머릿속을 도망 다닌 자유인은 이제 현실로 달려나간다. 특별한 예시를 들 것도 없이 현실은 예전과 다를 바 없다. 정보 통신 기술의 발달로 더욱 교묘한 가짜 뉴스가 탄생했고, 사람들은 여전히 보고 듣고 싶은 것만을 찾는다. 사회와 개인 간의 역할 전환, 즉 개개인이 사회를 주체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 때문에 자유인을 자유롭게 내버려 둘 수 없다. 자유인에게 이 역할 전환을 독려할 사회적 의무를 부과하고자 한다.
세속에 사는 자유인은 바쁘다. 이들에게는 스스로를 탐색할 의무와 주위 사람들과 함께 사회를 변화시킬 의무가 동시에 존재한다. 정의되지 않은 시지프의 돌덩이를 밀어올려야 할지라도.
민태홍 mintaehong9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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