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공미술이라 하면 도심에 설치된 해외 유명작가의 거대 조각이나 전국 곳곳에 그려진 벽화, 지자체에서 만든 특산품 홍보용 조형물이 떠오르기 쉽다. 하지만 오늘날 공공미술에는 정의되지 않은 형태의 다양한 작업이 있으며, 이들이야말로 유의미한 공공성(Public)을 시사하는 경우가 잦다. 우선 전형적인 형태의 공공미술이 어떻게 시작되어 국내에 상륙했는지 살펴본 뒤, 이들을 가리키는 새로운 용어이자 지향을 만들어 제시하고자 한다.

공공미술의 등장

공공미술(Public Art)이라는 용어는 1967년 영국의 미술행정가 존 윌렛의 저서 『도시 속의 미술 Art in a City』에 처음 등장했다. 그는 공공미술을 소수의 전문가가 아닌 대중을 위한 미술이라 설명하며 이를 전시장의 미술과 구분했다. 소수 전문가를 바탕으로 한 시장 미술이 대중을 대변할 수 있느냐는 윌렛의 물음과 함께, 서구의 공공미술은 1960년대를 거치며 점차 기념비적 전통에서 벗어났다. 예술가, 큐레이터, 행정가, 지역 주민 그리고 미연방 조달청과 NEA(미국국립예술기금)로 대표되는 민관의 다양한 지원 체계들이 도시 재생과 관련한 사회적 필요 등 많은 요인들과 얽히며 공공미술에서 공공(Public) 개념은 계속해서 변화했다.

1967년 NEA가 ‘공공장소에서의 미술 프로그램’을 시작했을 당시 프로그램의 지원 목표는 탁월한 재능을 보여준 예술가를 지원하고, 대중에게 미국 현대 미술을 경험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프로그램의 지원을 받은 여러 미술가의 대형 조각들은 공공미술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는 논란에 처했다. 헨리 무어나 알렉산더 칼더의 조각은 대중에게 난해한 모더니즘 추상작품으로 받아들여졌을 뿐, 장소가 지닌 공공성에 기여하지 못했다. 이들은 단순히 공원, 대학, 광장과 같이 공공장소라 여겨지던 곳에 배치되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공미술이라 불렸다. 주변 환경의 특성이나 맥락과 무관하게 풍덩 놓여있다는 플롭 아트(Plop Art)라는 비판을 받으며, 일부는 부동산 개발이나 상류층의 부를 과시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반발로 1970년대 중반 이후의 공공미술은 해당 장소에 적합한 형태, 소위 장소-특정성(Site-specific)을 갖춘 미술로 변모해갔다. 장소-특정성이란 미술 작업을 장소의 물리적 조건들에 직접 연계시킴으로써 대중의 접근성을 높이고 사회적 책임을 지는 성질을 뜻한다. NEA는 이 추세에 발맞추어 대지작업, 환경미술과 같은 비전통적인 매체를 비롯한 다양한 매체를 활용하여 공공적 상황에서 미술적 가능성에 창조적으로 접근할 것을 장려했다. 이에 작업 대부분이 건축이나 환경 디자인과 구분되지 않게 되며 문화적인 도시 환경 조성의 목적 아래로 공공 개념이 변화했고, 공공미술은 실용성과 기능성을 강조하는 공공디자인의 영역으로까지 확장되었다. 이때 장소-특정성이 내포하던 사회적 책임이 점차 미술품의 사용 가치와 기능주의적으로 동일시되며 공공미술이 자연스레 상업화되었다. 이에 공공성을 다시 한 번 상기하려는 시도로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New Genre Public Art)이 등장했다.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은 수잔 레이시(Suzanne Lacy)가 처음 사용한 개념으로 서구에서 1980년대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담론화된 공공미술의 새로운 패러다임이었다. 레이시는 이를 “다양한 관객과 함께 그들의 삶과 직접 연관있는 쟁점에 관해 소통하기 위해 전통적 또는 비전통적인 매체를 사용하는 모든 시각예술”이라 정의했다. 매체의 경계 구분을 완화하고 설치와 퍼포먼스, 그리고 개념미술에서 행해진 방법들을 공공미술에 녹여내어 관객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자 했다. 이후 공공미술은 인종주의, 성차별, 에이즈와 같은 사회적 의제에 개입하기 쉬워졌다.

국내로 전파된 공공미술

한국의 공공미술은 2000년대 이전까지 주로 기념적인 성격의 동상 조각이나 전쟁기념물, 환경조각 등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었다. 해방 이전부터 일제에 의해 시작되었던 기념물의 건립은 해방 이후에도 지속되었고, 한국전쟁 이후 추모를 위한 충혼탑과 전쟁 용사의 동상들이 1950년대 전국 곳곳에 만들어졌다. 1960년에서 70년대에는 반공과 민족주의를 고취하기 위한 각종 동상 조각들이 체계적이고 전문적으로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념조형물들과 동상들은 공공장소에 놓여있다는 이유만으로 공공미술의 범주에 포함되지만, 실제 목적은 국가 권력의 상징과 이데올로기 생산이었다. 1980년대에는 공공미술의 제도적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건축물미술장식법’이 제정되면서 건물 앞을 장식하기 위한 각종 모더니즘 조각들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일정 규모의 건물을 지을 때 건축비의 일부를 건축물 외부 조형물을 설치하는 데 사용하도록 한 이 제도는 86아시안 게임과 88올림픽 같은 국제적 행사를 치르기 위한 환경미화가 주된 목적이었다. 때문에 국제적으로 유명한 조각가의 작품을 설치하거나 장식적인 측면이 강조되었다.

건축물미술장식법은 사실 1934년 미국에서 실직 미술가를 위한 뉴딜 정책의 일환으로 미술가에게 공공건물을 장식할 벽화나 조각을 의뢰하기 위해 처음 고안된 것을 우리나라 정부에서 차용한 것이다. 미국의 공공미술도 제도비판(Institutional Critique)에서 자유롭지는 않지만 관객, 지역적 맥락, 사회적 참여, 탈미술관, 거리의 문화 등 공공미술에 내재하는 다양한 개념을 지향하는 작업이 위주였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건축물미술장식법은 공공미술에 대한 인식 자체가 전무한 채 출발했다. 공공건물을 위한 벽화와 조각 등 공공부문에서 시작된 서구의 제도가 국내에서는 민간부문의 사적 건물을 규제하기 위해 시행됨에 따라 서구와는 다른 기형적 형태의 공공미술이 양산되었다. 공공(Public) 개념에 관한 논의가 부재한 채 환경미화를 위해 세워진 조각들에 관해 시각공해를 일으킨다는 비판적 시각들이 쏟아져 나온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한편, 90년대 말부터 국내에서도 서구의 영향을 받아 관객 참여형 작업이 시도되기 시작했고, 상당수가 기획 단계에서부터 수잔 레이시의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을 표방했다. 하지만 이들 작업은 점차 정부나 지자체 중심의 공공 서비스나 관광 사업의 형태를 띠며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뿐 아니라 넓은 의미에서 참여 미술의 방향성과도 멀어지고 있다. 자금 조달이 어려워 제도권을 벗어나기 힘든 참여 미술의 존재 목적까지 관제화 되어버린 실정이다.

수입 용어 사용의 문제

한국에서 ‘공공미술’이라 하면 공공장소 속의 미술이나 도시 계획에 치중한 작업이 떠오른다. 시기상 더 최근의 경향인 참여적 미술이 공공미술이라는 용어에서 오히려 흐려진 듯하다. 참여적 미술을 지칭할 수 있는 용어가 필요하다. 서 살펴본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을 비롯해 클레어 비숍의 ‘참여 미술’과 파블로 엘게라의 ‘사회 관여적 미술’ 등 여러 용어가 있지만 이들의 사용에는 고민해봐야 할 지점들이 있다.

특정 용어나 이에 내포한 담론에 비추어 개별 작업을 분석하다 보면 작업의 세부적인 맥락이나 동기가 가려지기 쉽다. 그래서 다양한 작업이 등장하고 발굴되려면 작가는 평론가나 미술 이론에 의존하지 않는 대담한 시도를 하는 게 좋고, 비평가는 미술사 연구를 할 때가 아니라면 수입 용어를 중심으로 한 현장 비평을 지양해야 한다. 특히, 참여 미술이나 사회 관여적 미술 같은 과거의 수입 용어에는 국내 현장의 긴급성이 온전히 반영되기 어렵다. 이들을 활용할 때에는 다른 용어보다도 더욱 세심한 접근이 필요하지만 방금 말했듯이 용어의 맥락을 하나하나 따져 이를 개별 작업과 비교하다 보면 현장 비평의 관점에 어긋날 수 있다.

이에 파토스적 실천(Pathetic Practice)’이라는 용어를 새로이 제창하여 참여적 미술을 가리키는 단어이자, 참여적 미술을 바라보는 관점으로 제시하고자 한다. 수입 용어들에 담긴 다양한 논의 중 국내 참여적 미술 현장에 호응하는 것들을 추리고 재맥락화하여 새로운 용어에 담았다.

파토스적 실천

파토스적 실천에서 파토스(pathos)는 크게 세 가지 의미를 내포한다. 첫째, 현대에 정념이나 정동으로 번역되는 파토스는 고대 그리스어 paschein(받다)의 파생어로 ‘외부로부터 자극받은 감정상태’를 의미한다. 이는 주체로 하여금 파토스를 느끼게 해주는 외부의 존재를 상정하는데, 이 외부의 존재를 참여적 미술 작업의 기획자에 대응시켰다. 즉, 작업의 기획과 결과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관객의 자율성을 빙자하여 단순히 조력자가 되고자 하는 작가에 대한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의 염려를 국내 참여적 미술이 관제화되며 기획자의 자율성이 축소되는 문제로 확장시켰다.

둘째, 파토스는 이성적 판단으로 무언가를 정의하고 논증하려 드는 로고스(logos)의 반의어로서 사회 관여적 예술의 관념화를 지양한다. 참여적 미술을 이론화하는 과정에서 이론적 정교함에 집중하다 보면, 삶과 예술의 벽을 허무는 사회적 미학의 본래 지향을 잃을 위험성이 있기 때문이다. 파블로 엘게라(Pablo Helguera)가 강조했듯이 참여적 미술의 이론화 과정은 현실에서의 실천과 유리되어서는 안 된다. 뚜렷한 논지와 치밀한 논증으로 무장한 수입 용어들을 해석하고 적용하는 것에 몰두하다 작업의 세부적인 맥락이나 의도가 방기되지 않아야 한다.

셋째, 파토스는 다양한 예술 장르에서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위한 기교를 나타내는 말로 쓰여왔다는 점에서 파토스적 실천에 비예술과 구분되는 예술의 속성을 부여한다. 이는 비숍이 니콜라 부리오(Nicolas Bourriaud)의 관계 미학에서 관계 혹은 참여에 대한 질적 평가가 부재한다고 지적한 것과 같은 맥락을 취한다. 공공 서비스가 나쁘다는 게 아니라 공공 서비스화된 참여적 미술로부터 그렇지 않은 이들을 분리해 그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주자는 것이다.

이렇게 다양한 의미를 지닌 파토스는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에서 끌어온‘실천(Practice)’와 접합되며 파토스적 실천 개념을 이룬다. 참여적 미술이 예술로부터 새로운 실생활을 조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아방가르드로 인식되는 것에 동의함에도 불구하고 ‘파토스적 아방가르드’가 아닌 ‘파토스적 실천’을 제작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사회 참여적 예술에 관한 이론화 작업의 역사는 그 어떤 유형의 예술보다 짧다. 이 때문에 우리는 당대의 미술이론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이루어지는 참여적 미술 작업들의 정동, 즉 파토스에 더욱 집중해야 한다. 하지만 아방가르드에 관한 20세기 학자들의 논의를 떠올려 보라.2) 네오-아방가르드에 대한 뷔르거의 비관과 포스터의 낙관은 모두 아방가르드의 논의를 제도에 밀착시켜 이론적으로 논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뷔르거는 사회적 미학을 강조하며 유동적인 실체를 갖는 열린 예술의 성격을 무시했다. 모더니즘으로 제한된 그린버그식 자율성에 대한 비판에 몰두하다가 미술사적, 미학적 지형을 바꾼 예술의 다양한 동인을 획일화했으며, 아방가르드의 범위를 축소했다. 포스터의 네오-아방가르드 긍정 또한 네오-아방가르드(neo-avant-garde)로 불린 여러 시도의 성과와 가능성을 반제도라는 틀로 묶어 단일화했다.

이들 이론은 현장의 실천적 차원에서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뷔르거 본인이 말했듯이 미술제도는 무엇을 예술로 볼 것인가에 관한 질문과 맞닿아있기에 예술에 대한 수요와 공급, 즉 작업의 생과 사를 결정한다. 이때 파토스적 실천은 제도에 대한 관념적 논의에서 벗어나려 한다. 예술의 관계를 어설프게 정의할 바에 제도의 성격이 다층적이라는 점을 인정하고자 한다. 제도를 벗어나려 할수록 제도 안에 갇혀 맴돌았던 이전 학자들의 방식을 답습하지 않으려 한다. 이에 호응하여,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에서 끌어온‘실천(Practice)’은 파토스의 세 번째 함의인 예술의 속성과 긴장을 유지하며 파토스적 실천 개념을 이룬다. 파토스적 실천의 위치는 예술과 사회, 즉 ‘파토스’와 ‘실천’ 사이에서 모호할 수 있지만 상징적인 행위가 아닌 실질적인 행위인 사회적 실천(Social Practice)이며 예술을 통해 새로운 실생활을 조직하려 한다는 점에서 당대의 아방가르드로도 기능한다.

이제 파토스의 세 번째 의미인 ‘예술’에서 쓰이는 ‘관객과의 의사소통’이 어떻게 전용되었는지 명확히 알 수 있다. 관객과의 의사소통’이란 고대 그리스 시기에는 청중의 감정에 호소하는 기교를 지칭했다. 웅변가에서 관객으로의 일방향적 의사소통인 것이다. 이와 달리 파토스적 실천에서 내포하는 ‘관객과의 의사소통’은 90년대 이후 사회 참여적 미술이 관객을 작품에 공동 제작자로 동원하려는 경향인 ‘민주적 의사소통’을 의미한다.

현대 미술이론을 구성하는 용어 대다수는 상황의 특정성에서 비롯되었다. 이러한 특정성에 따라 텍스트를 직조해낸 결과가 미술사나 비평에서 유효한 텍스트이다. 하지만 텍스트의 행간에서 저자의 의도와 시대상을 탐색하고 또 그 짜임을 이해하려다 보면, 앞서 언급한 여러 부작용이 생길 수 있다. 이를 고려한 파토스적 실천은 레이시나 비숍의 용어에 비해 느슨하다. 뚜렷한 논지라기보다 하나의 관점이다. 용어의 구성을 단계적으로 설명한 것은 새로이 제작된 용어를 소개하기 위해서지, 조어 원리를 구체적인 작업에 일대일로 적용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파토스적 실천’ 안에서 다양한 참여적 미술 작업이 배양되고 격려받기를 바란다.

민태홍  mr.podob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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