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시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오기 마련이다. 극복이 여의치 않다면 어떻게든 버티는 수밖에. 여기, 그대가 고비를 넘기는 데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일기장에 쓸 법한 자기고백부터 역경을 넘길 수 있는 마음가짐, 나아가 버티는 삶 자체에 관한 통찰까지 총 10가지 이야기를 준비해놓았다.

호인 대(對) 호인

민태홍

평소와 같이 네 팔다리를 베어낸다

각진 얼굴을 앞에 두고

동글동글 비명을 지른다

어처구니없게도

우리는 그것을 미덕이라 부르기로 했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손과 발을 내뽑자

몸뚱이만 빙그르르...

정육 냄새가 비릿하고

잘린 부위는 영 내보이고 싶지 않다

만수무강

그냥 밖에서 멍 때리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많은 사람이 다 무엇에 의지해서 무거운 삶을 지탱하는 걸까 싶다. 그나마 모래밭 흙벽 자갈 구덩이면 좋으련만 멀리서 보기에도 가파른 구십 도 경사 절벽 틈에 뿌릴 박아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들이 견디는 무게에 대해 생각해 본다, 어쩌면 뿌리 내릴 힘은 어깨를 짓누르는 하중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죄책감, 떠맡은 책임들, 지긋지긋한 관성이 가지를 짓눌러서, 사실은 발 빼고 훌훌 떠나고 싶지만 그러지 못해 개미지옥에 박혀 있는 것은 아닐까? 염세적인 (그리고 쓸데없는) 상념에 푹 취해 있다가 결국은 야매 결론을 내린다. 그래도 개똥밭에 구르더라도 이승이 낫다고 했던가, 포기하지 않고 버틸 수 있게 해 준다면 그게 하중이든 용기의 원천이든 사실 중요하지 않겠다고. 내가 이 땅을 박차 버리고 장마 홍수에 막 떠내려가고 싶을 때 내 어깨를 꾹 눌러 주는 이가 있다면 그게 부담이든 격려든 참 고마울 것 같다고.

12:18

나에게 과거란 참 매력적인 버팀목이다. 과거도 결국은 내가 버티고 있는 현재의 집합이겠지만, ‘지금’이라는 직책의 자격을 잃어버린 ‘현재’는 단단하게 나를 받쳐주는 힘이 된다. 추억은 차갑게도, 날카롭게도 그저 우리 곁에 남아있기에 따뜻한 단어로 불리기에는 부족하나, 버팀목이 되기 위해서는 추억의 온도가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꼭 행복한 기억만이 나의 삶을 지탱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불편한 기억이 지금 나의 기준을 만들고, 현재보다 힘겨웠던 시절이 또 다른 나의 발판이 된다. 지금 내가 서 있는 공간에는 사람들과 나눴던 대화가 양면성을 띠며 마구

뒤섞여있고, 무작정 길을 나서 위로를 받는 풍경에는 수없이 지나쳐온 다양한 감정이 자취가 되어 남아있다. 나를 지치게 하는 건 목표로서 내 앞에 우뚝 서 있지만, 나를 지탱하는 것은 뒤에 남아 묵묵히 나의 곁을 지킨다.마냥 따뜻하진 않지만, 내가 쌓아온 나의 기억은 나를 혼자 남겨두지 않는다. 지금 흔들리는 나의 상황도 결국은 미래의 내가 먹고사는 기억이 될 것이다.

zero

지나온 시간들을 들이켜보면 너무나 많은 후회가 묻어있어, 어디부터 지워나가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지워내려 하면 할수록 그 흔적은 너무도 빠르게 번져 오늘이라는 곳에도 새로운 흔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고개를 돌려 다시 앞을 바라보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새로운 페이지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흔적들을 문대고 짓이기는 대신, 새로운 그곳에 마음대로 적고, 붙이고, 색칠하기로 했습니다. 좋아하는 걸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무언가에 푹 빠져있다는 사실 자체가 설렘으로 다가왔습니다. 반짝이는 무대 위 어떤 사람이든, 화려한 사진이 가득한 여행집이든, 좋아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페이지에는 후회 대신 즐거움만 가득했으니까요. 지금 이 책은 미완성작입니다. 그러니 부디 이 책을 만나시거든 섣부른 평가나 지우개질 대신, 책장을 넘겨 새로운 이야기들을 기다려보시길 바랍니다.

퍼렁별

내 삶을 지탱할 수 있는 건 나밖에 없다. 나의 많은 사색이 내려준 결론이다. 힘들 때 남들에게 의지하고 손을 내밀며 도움을 청하고 위로를 구하는 사람들이 틀렸다는 건 아니지만, 나는 그것을 그닥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처한 상황을 잘 아는 건 나고, 그 과정을 겪으면서 느끼고 생각하며 해결해야 하는 사람도 나다. 남한테 이야기해서 얻을 수 있는 건 위로와 조언일 뿐 해결책이 되지는 않는다. 그 속에서 나 자신의 뿌리가 단단하게 지탱되어 있지 않으면 외부에서 주는 양분과 수분은 자라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사람과 부대끼며 살아가고 그 사람들과의 관계에 맞춰가며 살아가지만 그 속에서도 나 자신의 뿌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20대는 남들과의 비교에서 얻은 열등감을 에너지로 바꿀 수 있는 사람이 강하다고 한다. 타인과의 비교에서 절망과 무기력에 빠지지 말고 내 뿌리를 더 깊고 넓은 영역으로 뻗을 수 있는 일을 하는 데 집중하며 자기개발을 하는 게 더 유의미하다는 생각을 요즘은 한다. 나만 잘 되고 나만 잘 살게 해주세요. 개인주의 같고 이기주의 같지만 정신 차려야지. 이 각박한 세상 속에서!

ENFJ

아이폰 플래너는 이번 주도 형형색색 색칠되어 있고, 걱정되어 5분 간격으로 맞춰 놓았던 알람은 오늘도 시끄럽게 울며 나를 채찍질한다. 계획, 계획, 계획 없이는 못 사는 ENFJ형 인간, 그 촘촘한 계획을 못 지키면 또 자신을 자책하는 이상한 사람이 바로 나다. 이런 나를 계획의 늪에서 꺼내주는 건 언제나 나와 반대 성향 친구들의 연락이다. 배낭 하나 가지고 떠나는 여행을 전날 계획해서 출발하고, 친구 자취방에서 놀다가 집에서 자려던 나를 새벽 2시에 불러내는가 하면, 저녁 약속이라고 나갔다가 그대로 버스 타고 강원도에서 1박 2일을 하고 온 날도 있다. 다음 주까지 과제가, 내일 아르바이트가, 이런 핑계는 통하지도 않고, 이제는 하지도 않는다. 과제는 여행 가서, 다음날 아르바이트는 혼자 일찍 복귀하며 해결한다. 그날만큼은 내일보다 오늘을 살자고, 오늘만 할 수 있는 경험을 즐기자고 생각한다. 그런 어이없는 기회에서, 새로운 활동력을 받아 다시 앞으로 달려간다. 언제 다시 이렇게 떠날지는 모르지만, 누군가와 함께하는 계획으로부터의 일탈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알기에, 나는 오늘도 계획적으로 살아간다.

장기리 알터

지극히 경험적이고 안정적인 것을 좋아하는 사람. 나는 정말 딱 이 말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나는 수평이 잘 맞은 사진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또, 따듯한 계통의 색 혹은 비슷한 종류로만 옷장을 채운다. 밥이나 음료를 먹을 때도 그렇다. 많은 메뉴 중에서도 내 눈으로 직접 보고 입에 넣어본 확실한 메뉴만 고른다. 틀에 박힌 선택을 반복하던 나는, 곧 권태로워졌다. 나의 의지대로 조절할 수 없는 갈등, 언제부턴가 나는 이것들을 천재지변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이것들은 모두에게 공평해야만 하지만, 나한테만 유난하다고 생각했다. 그럴 때마다 종종 나는 가끔 일기라 하기도 뭐한 쪽글을 써본다. 내일 무얼 먹을지, 내일 어떤 걸 입고 누구랑 이야기할지, 꼭 지키지 않아도 상관없는 일 말이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이렇게 하루를 마무리한다. 내일은 안경을 쓰고 시계를 차야겠다. 그리고 달고 시원한 음료수를 마셔야겠다. 다 쓴 글을 문자 그대로 살펴보고, 다른 날의 나를 생각하다 보면, 모진 바람에도 더는 내가 싫지 않다.

대물변제

초등학교 시절. 운동회 날의 교장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매일매일이 오늘 같았으면 좋겠죠? 그래도 막상 날마다 이렇다면 그것도 재미없을 거에요." 지금 생각하면 당연한 말이지만 11살의 나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지 궁금하다. 지금의 나는 하고 싶은 일, 좋아하는 일이 정말 많은 사람이다. 그 일들을 할 때는 더없이 행복하고 즐겁지만, 또 막상 일주일 내내 그러고 있자니 좀이 쑤시는 기분이다. 대학공부, 교지 활동 모두 내가 해보고 싶고 재밌어서 시작한 것들이지만 가끔은 힘에 부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면 재미가 없어질 때도 있고 내려놓고 싶기도 하다. 그럼에도 지금만 참아내면 그 뒤에 낙원이 있을 거라 생각하니 왠지 몸이 가벼워지기도 한다. 하루하루를 버티게 하는 무언가가 있을 테다. 내게는 취미활동이 그것인가 보다. "내가 이러니 당신도 그럴 거야"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난 이런데, 넌 어때?"라고 묻는 것이다. 이 글이 자신을 버티게 하는 그 무언가에 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다.

파란

나는 조금이라도 끌리는 일, 흥미로운 일이 있다면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실행하는 식으로 인생을 꾸려왔다. 학교에 들어와서 꾸준히 했던 학생회 활동도, 교지편집위원회에 들어온 것도 참 충동적이고 흥미를 추구하는 나다운 선택이었다. 하지만 흥미로워 보이던 것들을 내 인생의 일부로 만들고 나니 흥미가 쉽게 떨어졌다. 비슷한 상황을 여러 번 반복하고 나니 이런 충동적인 나의 삶의 방식에 회의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충동적으로 흥미를 쫓는 것이 나의 낙이자, 나의 삶 자체였는데 그것을 잃은 것이다. 처음에는 막막하기만 했는데 요즘은 그냥 잔잔하게 어제와 같은 오늘을, 오늘과 같은 내일을 살아가는 것을 조금씩 즐겨보려고 하고 있다. 비슷하지만 조금씩 다른 일상 속에서 소소한 행복을 발견하고 조금씩 저장하다보면 그게 다시 내 삶의 뿌리가 되지 않을까?

wase

내가 삶의 페달을 계속해서 밟아나갈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대단한 건 아니다. 다이어리에 소소하게 적어놓았던 행복한 일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어느 날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봐서 행복했다.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좋아하는 드라마에서 연기하는 걸 보는 건 언제나 조금은 벅차고 설레는 일이다. 그리고 그런 감정을 계속해서 느끼고 있는 요즘의 나는 삶을 계속해서 이어나갈 힘이 있는 사람이 된 것만 같다고 느낀다. 어느 날은 나의 메일함으로 도착하는 메일링 레터로 즐거워하기도 했다. 비슷한 관심사를 가진 사람이 정성을 담아 쓴 글을 매주 읽을 수 있다는 것은 하루 치 연료가 되기에 충분하다. 즐겨 하는 리듬 게임에서 내가 원하던 카드가 나오는 날도 소소하게 힘이 되어준다. 24시간의 하루 중 20시간을 게으르게 살았더라도, 잠들기 전 비적비적 일어나 공부를 하고 좋아하는 책을 읽다 잠이 드는 하루도 꽤나 행복한 기억으로 남는다. 내 삶의 뿌리는 이렇게 힘껏 좋아하는 무언가를 양분 삼아 나를 지탱해왔다. 하루하루 나의 뿌리를 채워주는 조금의 양분들이 모여 한 주를, 한 달을, 1년을 살아갈 수 있게 만든다.

민태홍  mr.podobunja@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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