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앉아 펑펑 내리는 눈을 보고 “나는 눈 같은 거 질색이야.”라며 한겨울에 내린 눈을 매정하게 대하곤 했다. 그리고는 겨울이 다 지나가 봄바람이 코끝을 살짝살짝 스칠 무렵이 되어서야 눈사람을 만들며 행복해하던 사람들의 마음을 부러워했다. 포근한 겨울의 눈을 그리워하게 된 것이다. 사라질 것에는 정을 주지 않겠다고 다짐하곤 하지만 항상 사라진 후에야 그리움의 노래를 부르는 나이기에, 이제는 사라지기 전에 충분히 사랑하려고 한다.

을지로의 진짜 모습

나에게 ‘을지로’는 아침 등굣길에 정신없이 시계와 안내 전광판을 번갈아 확인할 때, 대충 넋 놓고 쳐다보던 지하철 노선도를 채우는 어딘가에 불과했었다. 사람들의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있던 추억을 되살려 준 레트로, 뉴트로의 열풍과 함께 일어난 을지로 붐으로, 사람들이 흔히 알고있는 모습의 을지로를 처음 접했다. 사람들의 많은 관심을 받는 을지로의 모습은 오래된 골목에 들어와 빈티지한 소품으로 꾸며진 카페들. 그리고 밤거리를 꽉 채우는 노가리 골목의 술자리처럼 화려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을지로의 진짜 모습이 아니었음을.

1학년 2학기, 사진 수업을 들었을 때 을지로와 익선동으로 출사를 나간 적이 있다. 그때, 내가 마주친 을지로의 모습은 요즘 사람들이 좋아하는 빈티지한 카페도, 화려한 밤거리도 아니었다. 직접 손으로 쓰고 조각해 걸어놓은 가게의 간판들과 오랜 시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켜온 듯 보이는 공업사들. 그것들이 을지로의 진짜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자리를 지켜오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을지로는 없었을 테니까.

이런 을지로의 모습의 중심에는 세운상가가 있었다. 1968년에 무려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완공되었다는 세운상가를 중심으로 한 상가들과 조명, 공구, 인쇄 등 다양한 산업시설이 밀집해 공업지대를 이루며 한국의 근대화를 이끌었다고 한다. 그렇게 각광받던 을지로는 강남지대와 용산전자상가의 개발로 점차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을지로는 결국 서울 속에서 어둡고 활기를 잃은 지역이라는 인식을 안고 제거 대상이자 재개발 대상 1순위가 되고 말았다. 그 이후로 계속해서 언급되던 재개발 계획은 진행되고 엎어지고를 5번이나 반복했다. 여러 번의 우여곡절을 겪은 을지로는 ‘도시 재생’으로 이름만 바꾼 재개발 계획에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고 한다.

알게 된 지 얼마 안 된 진짜 모습의 을지로를 이제 곧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을지로를 향해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와 2년 만에 다시 마주한 을지로의 모습은 조금 오래되어 보이긴 했지만, 평범하고 익숙한 서울의 모습이었다. 지도 어플에 ‘세운 상가’를 입력하고 조금씩 걷기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몇 골목을 지나쳐 들어왔을 뿐인데 옛날로 여행을 떠나온 느낌의 낡은 거리를 마주할 수 있었다. 나무판자에 손글씨로 쓰인 간판들이며, 허름해 보이는 모습을 한 건물들은 이곳만 과거에 머물러 있는 듯 착각을 하도록 만들었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봤던 것만 같은 그 골목은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조용했다. 오래된 오토바이를 타고 지나가는 아저씨가 아니었더라면 그 자리에 서서 한참 동안 상상의 나래를 펼쳤을지도 모르겠다.

다시 현실로 돌아와 낡은 공업소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좁은 을지로 뒷골목을 따라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세월이 그대로 남아있는 골목을 구경하며 걷다 보니 자연스레 카메라 셔터를 누르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굳게 닫힌 셔터에는 ‘상공인 죽어간다! 생존권을 보장하라!’라고 적힌 스티커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골목 입구에 걸린 재개발을 멈추어 달라는 현수막을 보고 있자니 가슴 한편이 아려왔다.

간간이 자리를 지키고 있는 상인들도 있었다. 꿈과 희망을 품고 열심히 일했을 사람들. 열정 가득했던 젊은 날이 지나가고, 이제는 그들의 공간으로부터 쫓아내려 혈안인 사람들에게 ‘우리는 아직 떠날 준비가 안 됐다.’, ‘여기는 우리들의 공간이다.’라고 외치는 듯 하다. 오늘도 열심히 일하고 있는 그들의 어깨는 축 처져 보였다.

세운상가, 서울 종로구 청계천로 159

어딘가 무거운 마음으로 그들과 골목을 뒤로하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세운상가에 거의 도착해 내가 처음 마주한 광경은 청계천 주변을 두르고 있는 공사 현장과 하늘 높이 뻗어있는 크레인들이었다. 정적인 골목과는 다르게 분주한 공사현장을 마주하니 벌써 을지로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리고 멀리서 찬찬히 둘러보던 중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공사 현장 주위를 둘러싼 컨테이너 박스들이었다. 컨테이너 박스 안에는 그들의 터전을 내어준 상인들이 자리 잡고 있었다. 재개발을 진행하는 동안 컨테이너 박스에서라도 영업을 이어갈 수 있게 해달라는 조건을 걸고 터전을 내어준 그들은 결국 없어지게 될 자신들의 운명을 힘없이 받아들이고 있었다. 재개발 소식에 코로나까지 가세해 사람들이 많이 다닐 대낮임에도 거리에서는 방문객을 보기가 힘들었다.

얼어붙은 분위기 속 찾아간 세운상가는 도시 재생 사업이라는 ‘다시-세운 프로젝트’로 새 단장을 한 모습이었다. 을지로의 랜드마크인 세운상가는 ‘세상의 기운을 끌어온다’라는 의미와 함께 큰 포부를 가지고 만들어진 건물이라고 한다. 3층 공중에 시민이 다닐 수 있도록 데크를 만들고, 옥상에 정원과 광장을 설치한다다는 개념은 당시 어디에서도 볼 수 없었던 최신 건축 기법이었다. 3층 광장 한가운데에 서서 그 당시에 이러한 공간의 발상을 했다는 점에 감탄했다. 그렇게 광장 곳곳을 둘러보다 상가 안으로 들어섰다.

상가 안에는 기존의 가게들이 영업을 계속하고 있었다. 리모델링을 하며 세운 옥상을 마련해 많은 사람들이 찾아오곤 했다는데, 코로나로 인해 사람들의 발걸음이 줄어들어 상가 안은 조용했다. 3층 광장에서 보이는 가게에는 기존의 가게들과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온다는 카페가 같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중에서도 오래된 가게라는 느낌을 풍기면서도 세련된 입구를 자랑하는 호랑이 카페에는 유독 많은 이들이 들락날락하고 있었다. 가게 안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해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내부는 좁았지만 그 안을 가득 채우며 커피를 사가는 사람들은 가게 밖의 초라한 광장과 꽤 대조적으로 느껴졌다. 커피를 사서 문을 나서면 가게 바로 건너편으로 아직 개발을 시작하지 않은 오래된 골목의 모습을 마주할 수 있다. 가장 낡은 곳에서 유행을 선도한다는 이 모순적인 조합에 많은 이들이 러브콜을 보낸다는 걸 한눈에 알아보았지만, 또 한편으로 그들이 사랑받을 수 있는 이유는 결국 공업지대라는 을지로의 정체성 때문임을 다시 한번 알 수 있었다.

카페 주변의 풍경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다, 시끌벅적한 카페 옆에서 조용히 가게 안을 지키고 계신 한 할아버지를 보고 조심스럽게 가게 문을 두드려 들어갔다. 세운상가와 을지로에 대해 이런저런 질문을 하던 중 할아버지는 을지로 사람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어서, 이렇게 주변이 철거되고 조금씩 사람들이 떠나가면 나머지 사람들도 남아있을 이유를 잃게 된다며 쓸쓸하게 말씀하셨다. 나와의 대화로 다시금 생각에 잠기신 할아버지를 뒤로하고 조용히 가게를 빠져나왔다.

그들이 떠나간 후 남게 될 ‘새로운 을지로’가 과연 기존의 을지로처럼 젊은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공간으로 남을 수 있을까. 떠날 생각이 없다는 사람들과 그들의 터전을 사라지기 전에 미리 그리워하겠다며 카메라를 들고 찰칵거리는 내 모습이 그들을 떠나게 만드는 데에 보탬이 되는 것 같다는 생각에 괴리감이 느껴졌다.

카페 죠-지 서울, 서울 중구 을지로12길 6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왠지 더 외로워 보이는 세운상가를 뒤로한 채 을지로 골목에 숨어있다는 카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찾기 정말 힘드니 일단 지도를 따라가보라는 블로그 후기 덕에 핸드폰과 거리를 번갈아 보며 목적지로 걸었다. 지도 어플이 알려주는 곳에 도착했지만 눈앞에 보이는 거리에는 닫혀있는 공업소들 뿐이었다. 이 골목 저 골목을 헤매다 겨우 찾은 건물의 계단을 오르면서도 몇 번이고 이 건물이 맞나 두리번거리던 찰나, 문틈으로 흘러나오는 음악 소리를 듣고 제대로 찾아왔음을 알 수 있었다. 다들 어떻게 이리도 잘 찾아오는 건지 카페 안은 텅 빈 거리와는 다르게 손님들로 가득 차다 못해 대기 명단까지 있었다. 많이 기다려야 하나 싶어 직원분께 여쭤봤더니 바 테이블을 권유받아 냉큼 자리에 앉았다. 낡은 건물이 다 드러나 보이는 천장과 어두운 내부였지만 사람들은 핸드폰을 꺼내 들어 가게 이곳저곳을 찍고 있었다. 나도 함께 사진을 찍으면서도 염치없이 이곳을 찾은 이들도 나와 같이 을지로가 없어지지 않기를 바랐으면 했다. 찾기 힘든 낡은 건물에 위치한 이 카페의 방문객들이 즐기는 것은 메뉴일까 아니면 애써 노력해 찾아오게 만드는 을지로 때문일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곧 없어질지도 모르는 을지로를 생각하며 구경하던 메뉴판에서 내 눈길이 닿은 곳에는 진토닉이 있었다. 오랜 세월 자리를 지켜온 사람들이 떠나가고, 네모반듯하게 높이 솟은 건물들이 들어온 후 이런 카페들만 남겨져도 여전히 이곳은 매력 있을까? 낡은 건물이 그저 낡은 건물로만 느껴지지 않게 하는 을지로만의 매력이 사라지지는 않을까? 한 모금, 두 모금 쌉싸름한 진토닉을 넘기며 생각했다.

시간이 멈춘 듯 보이는 골목을 따라 걷다 보면, 정확하다는 핸드폰 지도도 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리는 을지로. 그런 을지로를 ‘을지로답게’ 만들어주는 사람들과 공업지대가 사라질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작년에 매정하게 대했던 겨울의 눈은 또다시 찾아올 겨울에도 만날 수 있겠지만, 조만간 사라질 지금의 을지로는 다시 찾아오지 못할 것이다. 공업지대 곳곳에 숨어있는 공간들을 찾아가 보며 그들을 숨겨주는 지금의 을지로도 당신의 가슴 한편에 함께 남겨두기를.

이승재  andyworld_@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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