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 감정적으로 휘둘려본 적 있나요? 부족한 나와 달리 그 사람은 너무 대단해서 계속 의존하게 되던가요? 어떤 말을 해도 이해해주지 않고, 오히려 당신이 이상한 사람으로 여겨지진 않았나요? 과연 이것도, 사랑일까요?

1. 가스라이팅이란?

가스라이팅이란 정신분석가이자 심리치료사인 로빈 스턴이 규정한 개념으로, 타인의 심리나 상황을 교묘하게 조작해 그 사람이 자신을 스스로 의심하게 만듦으로써 타인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행위를 의미한다. 가스라이팅은 항상 자신이 옳다고 여기며 자존심을 세우고 힘을 과시하는 가해자 ‘가스라이터’와 상대방이 자신의 현실감을 좌우하도록 허용하는 피해자 ‘가스라이티’ 사이에서 일어난다. 피해자는 가해자를 이상화하고 그들의 인정이나 사랑, 관심이나 보호를 받기 위해 가해자가 자기 생각이나 행동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한다. 로빈 스턴 박사가 분석한 가스라이팅의 징후는 다음과 같다.

가스라이팅은 언론이나 일상 대화에서 자주 등장하지만, 정식 병명이 아니다. 따라서 아직 가스라이팅에 관한 약물치료나 정형화된 상담치료 절차가 마련되지 않았고, 관련 학술 연구도 제대로 이루어지고 있지 않다.

2. 가스라이팅의 발생 원인

소아청소년클리닉과 지능개발 연구소를 운영하는 오은영 박사는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공통 특성으로 ‘자기애적 인격장애’를 가지고 있다고 분석했다. 누구에게나 자기애적 욕구는 있지만, 보통의 사람들보다 훨씬 착취적으로 자기애적 욕구를 실현하는 사람들을 자기애성 인격장애라 한다. 가스라이팅 가해자들은 자아, 외모, 능력 등 자기 자신의 특징에 대해 과도할 정도로 가치를 부여하고 언제나 자기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상대방을 가스라이팅 하면서도 ‘네가 잘못됐다’라고 한다. 이들은 대부분 타인을 조종해 ‘심리적 이득’을 얻고자 가스라이팅을 시작하며, 피해자를 반복적으로 비난하며 무기력하게 만들고, 결국 자신에게 의존하게 함으로써 자신의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시킨다. 물론 자기애성 인격장애가 없더라도 가스라이팅을 시작할 수 있다. 타인을 조종해 금전적이거나 물리적인 이득, 즉 실체적 이득을 얻고자 하는 경우가 여기 해당한다.

전문가들은 특히 한국의 경우 유교 사상과 가부장제로 인한 수직적인 서열문화가 존재하기 때문에 가스라이팅이 일어나기 쉬운 환경이라고 지적한다. 가스라이팅은 직장, 가족 등은 물론, 부부나 친구, 연인 관계에서도 불균형한 권력 상황이 구축되면서 가스라이팅이 발생할 수 있다. 가해자는 상대방을 비난하면서도 '나 정도 되니까 너를 받아준다'라며 피해자를 안심시키고, 피해자는 가해자에게 인정받고자 노력하는 관계가 형성된다. 이때 가해자는 부족하고 못난 피해자를 자신이 받아주었다는 자기애적 욕구를 충족하고 심지어 스스로 너무 착하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피해자는 가해자의 반복적인 비난으로 인해 자기 의심을 지속하고, 결국 가해자가 자신을 받아주었다는 만족감으로 의존 욕구를 충족한다. 가스라이팅이 친밀한 관계에서 쉽게 일어나며 피해자, 심지어 가해자도 가스라이팅 상황을 인지하지 못하는 이유이다.

3. 가스라이팅의 유형

(1) 연인

한국형사정책연구원에서 2017년 발표한 '성인의 데이트폭력 가해 요인' 연구에 따르면 데이트폭력 가해 유형 중에서도 '누군가와 있는지 항상 확인했다.', '통화가 될 때까지 계속 전화', '옷차림 제한' 등의 통제 행동이 71.7%로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했다. 정상적인 사고

판단이 가능한 사람을 마치 자신이 부모인 양 통제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구속하는 행위는 명백한 가스라이팅이며 데이트폭력이다. 가스라이팅은 폭행, 감금 등 물리적 폭력으로 이어질 경우가 많으므로 더 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스라이팅이 데이트폭력이라는 사실을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데이트폭력은 관련 특별법이 부재해 형법상 폭행죄 적용을 받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반의사 불벌죄로 피해자가 원하지 않는 경우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 피해자가 가해자의 모든 폭력 정황을 ‘사랑했으니까 했던 행동들’로 인식하고 자신이 범죄의 피해자였음을 부정한다면 가해자는 처벌받을 수 없는 것이다. 가스라이팅이 그야말로 법률의 사각지대에 들어간 것이다.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이수정 교수는 이처럼 데이트폭력에 대한 처벌이 미비한 점을 지적하며 제도적 보완이 시급하다고 강변한다. 피해자 신변 보호와 가해자 접근금지 등 임시조치가 가능한 가정폭력처벌법을 UN에서 명명한 ‘파트너폭력 처벌법’으로 대폭 개정해 활용할 필요가 있으며, 이것이 혼인신고 하지 않은 상대에 대해서도 임시조치가 이루어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2) 아동

부모가 아이에게 가하는 가스라이팅은 정서적 학대에 포함된다. ‘이러니 누가 널 키우고 싶어 하겠니?’, ‘너는 어떻게 항상 네 언니 반만도 못하니?’ 등 말로 자존감을 깎고 마치 자신이 아니면 양육할 사람이 없으니 잘하라는 식의 폭언이 여기에 해당한다. 이러한 정서적 학대 아동은 대부분 방임과 신체 폭력을 함께 당하며, 피해 아동들은 가해 부모가 무서워 분리 의사를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아 적극적인 구제를 받기 어려운 상황이다.

가족 내 가스라이팅은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로 인해 계속되는 경우가 많다. 정상 가족 이데올로기란, 결혼제도 안에서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을 이상적 가족의 형태로 간주하는 사회 및 문화적 구조와 사고방식을 말한다. ‘정상 가족’ 안에서는 자녀를 소유물처럼 대하고, 자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을 증명하려는 부모의 권력이 용인된다. 또한 ‘정상 가족’의 바깥에서 비정상으로 여겨지는 가족관계에 속하는 아이들은 비정상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넘어 생명의 위협을 받는 상황에 놓이기 쉽다.

아이가 자라 성인이 되어도 가스라이팅이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마치 디즈니 애니메이션 <라푼젤> 속 모녀처럼 말이다. <라푼젤> 속 고델은 라푼젤의 머리카락으로 자신의 젊음을 유지하기 위해 라푼젤을 납치했고, ‘바깥세상은 너무나도 위험하다’라고 세뇌하며 걱정하는 척 구속한다.

영화 속에서 고델이 라푼젤에게 했던 것처럼, 성인이 된 자녀에게 무리한 통금시간을 정한다거나, 옷차림을 지나치게 지적한다거나, 직장이나 친구 문제에 간섭하여 행동을 통제하는 것 역시 가스라이팅에 해당한다. 오은영 박사는 가족관계 안에서 가스라이팅을 당하면 관계 단절이 절대 쉽지 않다고 지적한다. “조심스러운 이야기이긴 하지만, ‘너밖에 없어’ ‘널 위한 사람은 나뿐이야.’ 이런 말들은 좀 의심하고, 일반적이고 기본적인 불신은 가지는 게 좋다”며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단단하게 가져야 한다”라고 말한다. 아무리 부모라고 하더라도 자신이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없도록 방해한다면 그에 대한 거부 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스스로에 대한 확신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3) 직장

오류를 허용하지 않는 뛰어난 윗사람 아래에서 일하는 부하는 매우 조심스럽게 행동하기 마련이다. 엄정한 질책을 지속적으로 경험한 조직원들은 자신들의 능력 부족과 오류투성이라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혀 자신감을 잃고, 스스로 생각하고 결정하는 능력을 잃어버림으로써 오직 윗사람의 판단과 지시에 의존하게 되기 쉽다. 만약 스스로가 직장에서 어떤 결정을 내리기가 어렵거나, 사소한 일에도 자주 사과를 한다거나, 어떤 일이 벌어졌을 때 그 문제의 원인이 자신에게 있다고 느껴진다면 직장 내 가스라이팅을 의심해볼 수 있다. ‘아끼는 부하직원’이라며 자신에게 지나친 프레임을 씌운다거나, 자신의 업무를 무리하게 넘기고, 일대일로 있을 때와 다른 직원들과 함께 있을 때 다르게 행동하는 것 역시 가스라이팅에 해당한다.

직장 내 가스라이팅은 자신을 피해자로 규정하기가 더더욱 어렵다. 조직문화가 원래 그런 것인지 오해하기 쉽기 때문이다. 명확한 증거를 바탕으로 상사를 처벌하기는 어렵지만, 만약 자신이 가스라이팅 피해자라는 생각이 든다면 개인과 개인 간의 경계를 확실히 세우고 스스로 스트레스 관리를 하며,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을 표현할 수 있도록 개인 차원의 노력이 필요하다.

다른 범죄와는 달리 가해자도, 피해자도 범죄 상황을 인식하기 어려운 것이 가스라이팅이다. 아끼는 사람이라는 이유로 모진 말과 폭력이 그들에게는 순간의 실수로 기억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스라이팅은 물리적 증거를 남기기도 어렵다. 피해 사실을 증명하기도 어렵고, 인간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다툼으로 치부되기 너무나 쉽다. 피해자에게 ‘왜 그때 도망치지 않았느냐?’, ‘왜 그렇게 바보처럼 당했느냐’며 질책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다. 가스라이팅은 굉장히 친밀한 관계에서, 굉장히 잘해주고 좋았던 관계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4. 가장 좋은 해결책은 ‘단절’

누구나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될 수 있다. 가해자의 병리적 특성과 피해자 내면의 약점이 맞물려 나타나는 것이 가스라이팅이기 때문에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문제다. 따라서 평소 자신이 누군가의 눈치를 살피느라 늘 불안하고 우울감을 느낀다면 스스로 가스라이팅의 피해자가 아닌지 의심해야 한다.

만약 ‘내가 지금 가스라이팅 당하는 건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면, 주변 사람들에게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를 설명하고 고민을 털어놓자. 제삼자의 눈은 객관적으로 범죄 유무를 판단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만약 가스라이팅이 맞았다면, 서서히 가해자에게서 벗어날 준비를 해야 한다. 피해자의 상처는 회복될 수 있지만, 병리적 특성 이유로 가스라이팅을 하는 가해자를 바꾸기는 어렵다. 피해자는 ‘사랑으로 가해자를 변화시킨다’든가, ‘지금껏 당한 게 억울해서라도 상대방을 바꿔봐야지’ 하는 희망을 버려야 한다. 지금 당장은 사랑하는 사람, 존경하는 사람으로 생각되더라도 이 관계를 이어갔을 때 더욱 힘들 미래의 나를 위해 관계 단절을 조금씩 준비해나가야 한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다」의 저자, 로빈 스턴은 가스라이팅 관계를 끝내고자 결심했다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사항을 기억하라고 말한다.

피해자가 타인에게 의지하고, 그들과 자신을 비교하며 더 우월한 사람에게 기대고자 할 때 가스라이팅은 시작된다. 따라서 가스라이팅을 벗어나는 방법 역시, 기댈 수 있는 존재를 다른 사람이 아닌 자기 자신이라 여기는 것이다. 스스로가 자아 정체감은 타인의 인정에 달려 있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는 순간 가스라이팅을 끝낼 의지를 갖게 된다. 스스로가 좋은 사람이라는 확신을 가졌을 때, 이미 고치기 어려울 정도로 망가진 가해자에게서 벗어날 용기를 가질 수 있다.

김예진  dimplezynn@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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