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건용은 1970년대 아방가르드 그룹 ST와 AG의 주요 작가로 활동한 것을 시작으로, 지난 50년간 설치, 퍼포먼스, 드로잉에서 그만의 방법론을 통해 한국 현대미술의 지평을 넓혀왔다. 특히, 80가지가 넘는 자신의 퍼포먼스를 ‘이벤트-로지컬’이라 부르며, 1975년부터 현재까지 계속해서 재연, 변형, 추가하고 있다. 작가는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의 대규모 회고전, 2023년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의 한국 아방가르드 특별전에 초대된 만큼 한국 실험미술의 대표자로 인정받으며, 최근 몇 년 사이에는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블루칩 작가로 떠오르다 지난 1월 세계 정상급 갤러리인 페이스(Pace)와 전속 계약을 체결했다. 이른바 ‘이건용 신드롬’이다.

2022년 1월 15일, 이건용은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편집위원 민태홍과 함께 자신의 학창시절부터 50여 년에 걸친 작품세계와 근황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2월 7일, 2월 10일 추가 통화로 마무리된 12시간의 인터뷰 내용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홍익대 서양화과 졸업(1976), 군산대 미술디자인학부 교수 역임(1981-2007)   ▷ 팔라초카보토(2022), 페이스갤러리(2022/2019/2018), 갤러리현대(2021/2016), 부산시립미술관(2019), 국립현대미술관(2014), 관훈미술관(1986/1983) 등 개인전 50회 개최.  ▷ 뉴욕 구겐하임미술관(예정), 국립현대미술관(26회), 서울시립미술관(2회), 리움미술관, 상파울루비엔날레, 파리비엔날레, 광주비엔날레, 부산비엔날레(2회), 리스본국제전(2회), 까뉴국제회화제 등 단체전 215회 참여   ▷ 국립현대미술관, 리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테이트 모던 등에서 작품 소장.

 

어린 시절이 남달랐을 것 같아요. 언제부터 예술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호기심이 많아서 여러 가지 관찰하기를 좋아했어요. 6.25가 터져 9살 때 부산으로 피난을 갔는데, 바닷가에 나가서 군함을 보고 사람이 만들었다고는 믿기 힘들 정도의 크기와 정교함에 환상을 보는 줄 알았어요. 근처 산동네 판잣집들을 보고는 어떻게 그 많은 깡통을 펴서 집 전체에 정교하게 붙였을까 상상하며 감탄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무언가 그리거나 만들겠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외삼촌이 그림 그리는 것을 본 뒤로 인간 활동 중에 이런 것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서울이 수복되어 상경한 뒤로는 미술책들에 실린 남의 그림을 흉내 내는 것에 매진했어요. 주변 풍경이나 사물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게 아니라, 좋은 평가를 받는 사람에게 ‘잘 그리는 방법’이 있을 것이라며 그들 예술의 방법론을 탐구한 거죠. 한 번은 초등학교 사생대회에서 잘 그린다는 친구 뒤에서 그 친구가 그리는 것만 보고 있다가 선생에게 꾸중을 들었어요. 어떻게 잘 그리나 연구하는 중이니 걱정하지 마시라 답했죠.

     

유년기에 예술의 방법론에 관해 고민하시다니, 탐구욕이 강하셨습니다.

지독한 독서가였던 아버지 덕에 집안에 인문학책이 만 권 정도 있었어요. 어릴 때부터 문학, 종교, 철학을 자연스레 접할 수 있었지요. 청빈한 목사셨지만 책 사는 데에는 돈을 아끼지 않으셔서,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미술책도 사다주셨어요. 중학생 때는 새로운 그림을 더 관찰, 연구하기 위해 국공립 도서관의 미술책들을 시작으로 프랑스, 독일, 미국 등 문화선진국의 대사관과 문화원을 뒤져가며 외국 잡지나 서적을 봤어요. 2차 대전 이후의 뉴욕파나 프랑스 앵포르멜과 같이 당시 최첨단의 작가들과 경쟁한다는 마음으로 그림을 정말 많이 그렸죠. 무엇을 그리던 왜곡, 과장, 생략된 제멋대로의 그림이었어요. 이후 예고에 진학하고자 했는데 어머니는 제가 의사가 되어야 한다며 반대하셨어요. 반항심에 학기말 시험에 전 과목 백지를 내기도 했으나 결국 배재고등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런데 고등학교 1, 2학년에 들은 논리학 수업이 제가 작가로 성장하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해줬어요. 독일 유학파 강사가 2차 대전 이후의 현대철학에 관해 얘기해주었는데 미술 다음으로 재밌었습니다. 비트겐슈타인의 언어분석철학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접한 게 후일 작업에 큰 영향을 주게 돼요. 이때 시간이나 공간적 사실을 취급하는 ‘사실학’이 아니라, 사실에 입각하여 본질을 구명하는 ‘현상학’을 공부했기에, 작업이 실제를 직면하며 현실 세계를 향하게 되었죠. 비트겐슈타인에 흠뻑 빠져 외대에서 여는 언어학 학회에 참석하려 학교를 종종 결석하기도 했어요. 아버지 옷을 입고 빵떡 모자 쓴 채 참석했는데, 끝날 무렵 통성명이나 하자고 말을 붙이는 사람이 있으면 대답을 흐리다가 도망갔어요. 그림도 계속해서 그렸는데, 수채화를 그려서 국전에 입선한 적이 있어요. 고등학생이 지원한 게 건방지다며 상 받은 게 취소될까 두려워 부모님께도 숨겼죠.

 

중·고등학교 시절 여러 퍼포먼스도 하신 걸로 압니다.

중학생 때 뚝섬의 둑 위에서 비를 맞으며 수채화를 그리곤 했는데, 이게 제 최초의 퍼포먼스일 겁니다. 기후를 작업 안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였는데 빗물과 바람에 번져 묘한 그림이 나오곤 했어요. 동네 애들이 그러면 그림 다 망치지 않냐고 묻길래, 그래서 하는 거라고 답해줬어요. 소몰이꾼은 멈춰 서서 한참을 보다가 젊은 애가 참 안됐다며 혀를 차고 가더라고요. 이런 사람들의 반응도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한 번은 삼복더위에 아버지의 털 오버와 털모자, 두꺼운 장화를 신고 홍릉에서 경희대 정문까지 왕복한 적도 있어요. 그때 더위 먹어서 열흘은 고생했어요. 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상황을 인위적으로 더 악화, 극대화했다가 그걸 그만두었을 때의 체험을 통해, 현재를 재인식해보는 실험을 해보고자 했죠. 퍼포먼스를 끝내고 입었던 것들을 다 벗고 나니 정말 시원했어요. 갔다 오는 과정에서는 지나가는 사람들을 안 보는 척 유심히 살펴보니 반응이 더 재밌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무심히 가는 줄 알았더니 뒤돌아서 몇 번을 보고 가고, 노인 한 분은 덥지 않냐며 걱정해주고 가더라고요.

고등학교 1학년 여름에는 그때까지 그린 수채화를 학교 건물 근처 고목 아래에 전부 모아두고 불을 질렀어요. 그런 쓸데없는 짓이라도 하지 않고는 못 견딜 지경이었거든요. 중학교 때부터 의사와 같이 사회에 쓸모 있는 인간이 되라는 어머니의 말씀을 듣다 보니, ‘예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고민을 자주 했어요. 이에 ‘예술이란 예술이 아닌 다른 어떤 개념들과 다른 예외적 개념에 속하며, 그것은 일반적인 가치 기준에 비추어 쓸데없는 짓을 적극적으로 밀고 나갈 때 예술적일 수 있다’는 식으로 예술 개념을 규정했죠. 그림에 불을 지른 건 이것을 실현하고자 한 퍼포먼스였어요.

 

홍익대 서양화과에 입학한 뒤로는 어떤 작업을 하셨나요? 한창 유행하던 엥포르멜과는 거리가 있으셨던 거 같아요.

중·고등학생 때부터 국내외 미술 현장의 변화에 민감했기에, 고등학교 졸업할 무렵 앵포르멜에 더는 새로움을 느끼지 못했어요. 그러니 대학 선배들이 앵포르멜 추상화나 조각으로 실기실을 채우는 모습이 좋게 보이지 않았습니다. 책에서 본 장황한 이론을 빼고 봤을 때, 작가의 감정이나 필력, 또는 작업에 동원된 물질들이 저를 매료시킬 만큼 구체적이지 못했거든요. 굳이 저렇게 침침하게 해야 하는지 의문이었죠. 다른 쪽에서는 정강자, 심선희, 김문자 같은 동기들이 팝아트의 영향을 받아 밝은 작품을 하길래 새롭기는 했지만, 그때만 해도 한국에 대중 미디어가 그리 발달하진 않았기에 작품과 현실 사이 어딘가 이질감이 들었어요.

3, 4학년 때 실기 담당 교수가 목우회의 거두인 이마동 선생이셨어요. 연구하고 실험할 것들이 많아 방해받기를 싫어했던 저에게 이마동 선생께서는 비무장 지대 같은 분이셨습니다. 제가 사실적인 그림도 잘 그려서 그러셨는지, 저를 신뢰해주셔서 많은 실험을 할 수 있었어요. 과제 심사에서 여인 누드도, 물고기도 아닌 가오리 형태의 환상적인 그림을 그리기도 했죠. 큰 브러시에다 물감을 묻혀 뿌려서 형태를 만들기도, 오브제 이물질을 가져다가 캔버스에 붙이기도 하고, 하다못해 캔버스 화면을 불태우는 작업도 했습니다. 별의별 짓을 다 하고 학교 도서관에서 살다시피 연구도 해보았지만, 예술의 방법론에 관한 욕구가 채워지지 않는 채 졸업을 맞이하니 초조했어요. 그래서 졸업 후에는 미술 학회를 조직해서 해외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며 토론하는 장을 만들어야겠다는 다짐을 했죠. 그렇게 탄생한 게 ST(Space and Time)예요.

 

ST는 ‘아트 뉴스(Art News)’에서 출발했다고 알고 있어요. 나중에 전시를 하기도 했으나, 원래 스터디를 하기 위한 단체였죠?

네, 맞아요. 정보가 부족한 시대였기에 새로운 정보를 교환하고 공부하자는 취지에서 1968년 ‘아트뉴스’를 조직했어요. 당시 ‘미술수첩’, ‘아트포럼’, ‘아트 인터네셔널’, ‘아트프레스’ 등 외국에서 발행하는 잡지와 서적에서 중요한 텍스트를 회원들과 함께 번역해서 책으로 만들었죠. 제 윗세대 분들도 많이 참여했는데, 아무래도 자주 뭉친 아랫세대들이 더 구체적인 그룹을 형성해보자고 한 게 ST로 이어졌어요. 그런데 1969년 결성한 ST에서도 3년 동안은 이전처럼 스터디만 했어요. 조셉 코수스의 「철학 이후의 미술」(1969) 같이 난해한 텍스트는 분석철학 전문인 서강대 교수에게 찾아가서 질문했습니다.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1969)도 메를로-퐁티의 현상학, 니시다 기타로의 철학, 노장사상 등 미리 알아야 할 내용이 많아서 골치 아팠어요.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까 싶어 의동골에서 유학자를 모셔두고 노장사상을 배우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스터디만 하다가 멤버들 몸이 근질근질하니 1971년 《제1회 ST전》을 열었어요.

     

당시에 다룬 텍스트 중에 기억에 남는 것이 있나요?

말씀드린 조셉 코수스의 「철학 이후의 예술」과 이우환의 「만남의 현상학 서설」이요. 코수스의 예술론은 비트겐슈타인, 에이어, 카르나비와 같은 언어분석학자들의 말을 짜깁기한 것으로 당시 예술과 예술품을 같다고 보던 시각에 맞섰어요. 예술과 예술품을 분리하여 ‘예술의 사고시스템’을 예술의 본질로 봤는데, 시각예술을 보이지 않는 예술로 규정하여 읽고 생각하는 사고 자체로만 보겠다는 지점만은 새로웠어요. 초등학생 때부터 ‘미술이란 무엇인가’에 관해 고민하며 새로운 변증법적 논리를 갈구하던 당시 저로서는 코수스가 그 갈증의 이유를 명쾌히 논리화해준 것 같았죠. 한편, 동양의 노장사상과 메를로-퐁티의 현상학을 바탕으로 ‘장소론’과 ‘신체성’을 결합한 이우환의 모노파적 이론은 서구의 현대미술이 고수해 왔던 주관적 대상화에 정면으로 반박하는 박진감을 주었어요.

 

아트 뉴스나 ST에서 진행한 전시, 세미나에는 다양한 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몇 사람이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모임을 조직해놓고 엘리트 의식을 가진다거나, 작가가 소통 없이 자기 상상력만으로 작업하는 태도를 싫어했어요. 그래서 다른 대학 학생들은 물론 일반 대중도 참여하도록 프로그램을 기획했어요. ST 그룹전을 할 때 전시에 관심 있어 보이는 사람들을 붙잡고 주소, 이름, 직업을 물어봐서 주소록을 만들어 초청장을 보냈어요. ST 좌담회에는 중고등학교 학생들이나 주부, 자영업자도 많이 참여했는데, 무슨 얘기가 오가든지 진지하게 들어줬어요. 작가, 철학자, 문학가에 일반 대중이 섞여 들어가 좌담을 하니 문화 횡적인 유대가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1974년도는 ST 스터디의 절정이었어요.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공개 세미나를 크게 열었는데, 동기 김복영이 주 연사가 되어 ‘현대미술의 역사성과 반역사주의’라는 주제를 발표했고, 이일 선생이 사회를 봤어요. 토론자로는 당시 『공간』 주간이었던 박용숙, 철학 교수 임범재, 문화평론가 김주연, 음악과 교수 김정길, 영화감독 하길종 등 당대 지적으로 튀던 분들을 죄다 모셨습니다. 현대미술에 관한 세미나지만 예술 전반에 관한 것을 가지고 얘기를 할 것이니 다들 나오라 한 겁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까마득한 선배들께 겁도 없었죠. 세미나가 시작하기 20분 전에 지하 소강당이 관객들로 꽉 찼는데, ‘ST가 소통을 실현했다!’라는 생각이 들며 정말 뿌듯했어요.

 

작품, 전시에서 ST만이 갖춘 성격은 무엇인가요?

작업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서로 질문하며 “그거보다는 이게 더 낫지 않느냐?”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했던 그룹은 ST 말고 없었을 겁니다. 오늘날 남의 작품에 대해 그렇게 말했다가는 원수지간이 되죠. 가령, 이승택 선생이 올림픽공원에 기와로 한 작품 아시나요? 거기에 당신과 사모님의 쇠통을 집어넣는 아이디어는 제가 인사동 어느 오프닝에 가서 얘기한 내용이 수용된 거예요. 사람들은 아이디어를 비밀이라 생각해서 공유하는 걸 굉장히 싫어합니다. 아이디어를 가져다 먼저 발표하는 것에 대해 내 것을 훔쳐갔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그게 아니거든요. 모든 것을 가져다 놓고 자유롭게 토론, 비판할 수 있는 상황이 되어야 합니다. 비단 예술만의 문제가 아니라,토론은 문화 전반에서 일어나는 운동이어야 해요.

 

ST와 그 멤버 대부분은 미술계에서 오래가지 못했다고 알고 있어요. AG와 ST 두 그룹에 모두 가담하신 입장에서 둘 간의 차이가 있었을까요?

당시 AG에는 소위 기성 작가들이 많았어요. 국전이나 민간 공모전의 수상자가 많았고 각 대학의 교수급 사람들이 계속해서 제자를 배출하니, AG 작가들은 현재까지 원로로 잘 살아남았어요. 반면, 무명작가들이 주를 이뤘던 ST는 특정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던 당시 미술계에서 버티기 어려웠어요. 중간에 빠져나간 이들은 물론 작가 활동을 그만둔 사람도 많았죠. 송정기는 작품이 참 좋았는데 어느 순간 사라졌고, 김용민은 정신병동을 4-50년 왔다갔다하다 얼마 전에 별세했어요. 성능경도 한때 공황장애가 와서 치료를 받았죠. 작품 비용부터 대관료까지 각자 벌어서 메꿔야 했는데 팔리지 않는 작업이나 퍼포먼스를 하다 보니 돈 나올 구석이 없었어요. 요새 같이 각종 지원 정책이나 대안공간이 있던 것도 아니었고요. 난 이게 작가들만의 책임이 아니라 생각합니다.

 

작품 얘기를 해볼게요. <신체항>을 통해 국내외 화단에 화려하게 데뷔하셨습니다.

<신체항>은 약 2m 높이로 잘린 아름드리나무를 지층 채 상자에 넣어 전시장으로 옮겨 놓는 작품입니다. 마르셸 뒤샹이 공장에서 나온 기성품을 가져다 명칭을 붙여서 예술품으로 출품한 것처럼, 예술이 철저하게 아닌 <신체항>을 예술이라고 갖다 놓음으로써 관객으로 하여금 전시장에 관한 새로운 생각, 예술과 예술 아닌 것에 관한 생각을 하도록 만든 겁니다. 당시 큰 껍질째의 나무, 뿌리가 심어진 상상 속의 지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는 장(場)을 보며 벅찬 감흥을 느꼈어요. 비트겐슈타인이 사물과 언어를 떼어내어 언어를 반성하였듯이, 저는 언어로부터 사물의 신체를 떼어내어 신체가 매개항이 되는 세계를 열어 현전시키는 장소를 실현했다고 확신했습니다.  《제10회 한국미술협회전》(1971)과 《제8회 파리비엔날레》(1973)에 출품된 <신체항>을 통해 당시 나라 안팎에서 모두 주목을 받았는데, 특히 파리비엔날레에 참가한 뒤 외신에서 호평을 받았습니다.

《제8회 파리비엔날레》(1973)에 설치된 <신체항> [갤러리현대 제공]

 

《제8회 파리비엔날레》에 다녀오신 이후 작가님의 신체를 직접 매체로 삼는 퍼포먼스를 하시기 시작했습니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요?

《제8회 파리비엔날레》에서 개념적인 작업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특히 무엇을 예술적으로 표현한다기보다 주체와 대상이 상호작용하며 생각을 전개하거나 변화시키는 관계론적 특성이 부각된 작업들을 보고 자극을 받았어요. 정적인 장(場)에 놓인 입체물의 한계를 벗어나서 행위 자체를 장과 연결해볼 수 있겠다고 자각했죠. 귀국하는 비행기에서 <신체항>에서 돌, 흙, 나무를 매체로 쓴 것에서 나아가서 ‘작가 자신의 신체’야말로 탁월한 예술의 매체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게 됐어요. 귀국 후에도 한동안은 이전처럼 무언가를 객체적으로 제시하거나 관계론적으로 조성하는 입체(설치) 작업을 지속하다가, 1975년 《오늘의 방법전》에서 <실내측정>과 <동일면적>을 실연한 것을 계기로 5년간 50여 가지 퍼포먼스를 집중적으로 선보였습니다. 이들을 포함해서 현재까지 진행되는 제 모든 퍼포먼스를 통틀어 ‘이벤트-로지컬’이라 부르고 있어요.

 

‘이벤트-로지컬(Event-Logical)’이라는 용어는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으며, 무엇을 의미하나요?

당시는 군사정권 시절로 논리에 맞지 않는 말로 국민을 속이는 상황이 자주 벌어졌고, 근대화 바람이 부는 혼란 속에서 거리를 지나가다 서로 쳐다봤다는 이유만으로 싸움이 나던 시대였어요. 감정 과잉에 대한 처방으로서 ‘로직(논리)’을 떠올렸습니다. 관념주의와 형이상학을 로직으로 치료하고자 했던 비트겐슈타인의 의지를 이어받아, 제가 행하던 ‘이벤트’ 뒤에 ‘로직’을 붙였습니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벤트’는 사실 자체를 어떻게 드러내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깊어요.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가 ‘해프닝’이라는 단어를 쓰기 전에 이벤트라는 말을 자주 썼는데, “나는 이벤트를 하는데, 이 행위는 행위 자체를 정확하게 하려는 것이다.”라는 그의 말이 크게 와닿았어요. 해프닝이 단지 우연히, 즉흥적으로 일어난 것이라면, 이벤트는 당사자를 포함한, 당사자도 관심을 둘 만한 것으로서 그 자체로 규명되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상반되는 의미인 ‘이벤트’와 ‘로지컬’의 결합은 일견 모순적입니다.

우선, 이벤트는 우연에 가까우며 예외적인 무언가로 파생되는 것이지 논리적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건이 일어난 대상, 즉 세계적 측면에서 본다면 그 대상에는 나의 논리가 아니라 그 대상의 논리가 있어요. 이벤트는 사건적으로 일어나는 것이고, 사건이 생김으로써 그 안에 필연적으로 논리가 파생되는 거죠. 그래서 이벤트가 논리에 우선하는 것이고, 로지컬-이벤트가 아니라 이벤트-로지컬이 된 거예요. 사실 ‘이벤트’와 ‘로직’은 합성되기 어려운 단어입니다. 사건이 논리적으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사건이 아니고, 논리적일 때는 사건이 일어나지 않죠. 하지만 예술에는 이 두 요소가 공존합니다. 만약 예술 안에 로직이 없다면, 타인과의 진정한 공감과 소통이 불가능해져서, 감정 차원의 가벼운 공감에서 끝나버려요.

 

말씀하신 예술 안의 논리는 관객과의 소통을 어떤 식으로 끌어내나요? 여타 많은 퍼포먼스가 구사하는 충격적인 서사나 화려한 스펙터클과는 관계가 없어 보입니다.

<의자 프로젝트>*는 관객과의 예술적 소통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2015년 당시 대구에서 화제가 되었어요.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사용하는 의자를 전시장으로 들여와 설치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기록하고, 관객들이 그 의자에 앉아 영상을 감상하는 게 기본 골격이었습니다. 전시장 근처의 음식점, 가게, 사무실을 찾아다니며 작업 취지를 설명하고 의자를 빌렸는데, 처음에는 반응이 미지근했지만 나중에는 제공해주시겠다는 분이 많아져서 전시장을 의자로 가득 채웠죠. 오프닝 때는 관객이 몰려 퍼포먼스 공간이 비좁을 정도였어요. 또, <이어진 삶 79-2>(1979)을 실연할 때에는 관객이 자기도 함께 행위하고 싶다고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어요. 손수건, 지갑 등 자신의 소지품을 하나하나 이어나가다가 마지막에는 자신의 몸까지 이어서 하나의 라인을 만드는 걸 ‘이어진 삶’이라고 하는데, 제 퍼포먼스가 끝난 지점에서부터 자기가 이어서 행위하겠다는 거예요. 그간 단지 필요에 의해서만 갖고 다닌 물건이 주머니 밖으로 나와 일렬로 연결되니 인생에 관한 사유를 했다고 하더라고요. 이렇듯 이벤트-로지컬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논리를 통한 소통의 퍼포먼스이지, 감정적인 충격을 주기 위한 기행이 아니에요. 해프닝은 충격을 통해 재미를 줄 수 있지만 공감할 지점은 적은데, 이벤트-로지컬은 싱겁게 느껴질지라도 그 의미를 이해하고 미소 지을 수 있습니다.

*2008년 대구 봉산문화회관에서 초연한 <의자 빌려오기>와 같은 퍼포먼스인 것으로 추측되나, 작품명 정리는 아직 이루어지지 않은 듯하다.

 

반대로, 이벤트-로지컬에서 우연성이 중요한 측면이 있을까요?

이벤트-로지컬을 위해 수많은 글을 쓰고 스케치를 하지만, 그렇다고 제 퍼포먼스가 각본처럼 전부 짜여있다는 건 아니에요. 매번 같은 행위를 하더라도 상황이 벌어지는 환경과 조건에 따라 차이가 생긴다는 지점이 중요해요. 논리는 작가의 행위가 일어나는 그 순간 현장에서 나오는 것이지, 만들어 놓은 답에 짜맞추는 게 아닙니다. <다섯 걸음>(1975)에서는 일정한 지점에서 반복적으로 다섯 걸음씩 걸으며, 멈춘 지점의 발 앞에 분필 선을 하나씩 긋습니다. 같은 지점에서 같은 사람이 시작한 다섯 걸음인데도, 선이 그어지는 위치가 달라집니다. 같은 논리, 같은 행위에서도 차이가 생긴다는 거예요. 그 차이는 곧 우리가 살아가는 사실의 세계이기도 하고, 그로 인해 논의가 발생하여 서로 말을 걸며 소통의 계기가 마련돼요.

 

당시 독재 정권을 은유적으로 비꼬는 이벤트-로지컬을 하시다 곤욕을 치르신 걸로 압니다. 개념적인 작업임에도 사회 현실을 반영하다 보니 벌어진 일인 거 같아요.

민중미술처럼 반정부적인 강령을 내걸거나 정치에 참여하겠다는 의식은 없었지만, 작업이든 철학이든 현실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가지고 총체적인 삶에서 나오는 작품을 만들어 왔어요. 그러다 《제4회 ST전》(1974, 국립현대미술관)이 문제였는지,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벤트-로지컬은 사이비 전위 예술이므로, 앞으로는 당 관에서 할 수 없다.’라는 공문이 오더라고요. 당시 화가 나서 바로 태워버렸습니다. 다음 해 4월 AG 해체 전에서는 <이리 오너라>와 <내가 보이느냐>를 발표한 뒤에 안기부에 끌려갔습니다. 무릎을 꿇은 채 구둣발로 밟혀서 10년 동안 후유증을 앓았어요. 자유롭게 예술을 하지 못하는 비극적인 시대였던 거죠. 최근에는 2018년 페이스갤러리 베이징 개인전에 몇 작품을 못 가져가는 일이 있었어요. 그 또한 정치성을 반영한 작품들이어서 제지당했습니다.

 

1976년에는 그간의 이벤트-로지컬과는 결이 조금 다른 <신체드로잉> 시리즈를 발표하셨습니다. 행위의 흔적이 회화적으로 남아 독특했어요.

‘그리다’는 문제도 이벤트-로지컬의 맥락에서 생각한 겁니다. ‘그리다’는 것에는 보통 화면에 마치 대상이 있는 것처럼 일루젼을 일으키거나, 작가의 감정을 투영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이와 달리 ‘그리다’는 것의 더 본질적인 의미를 관객을 앞에 둔 현장에서 감정이 아닌 필연적인 논리에 의해 드러내고자 했어요. 1976년 《제5회 ST전》에서 현재까지 공개한 <신체드로잉>의 방법론 9개 중에서 이미 7개를 발표했는데, <신체드로잉 76-1>을 예로 들어봅시다. 제 키와 똑같은 170cm 합판 한 장을 세워놓고, 화면의 뒤로 가서 앞쪽으로 손을 내민 뒤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선을 계속 긋습니다. 그것이 끝나면 그어진 선의 평균치 되는 부분을 가로로 잘라냅니다. 남은 합판에서 같은 동작을 반복하고 같은 방식으로 잘라냅니다. 이 과정이 반복되는 동안 몸을 점점 앞쪽으로 구부려 선을 긋게 되는데, 마지막 남은 합판에서는 완전히 구부린 자세에서 촘촘한 선을 그을 수밖에 없어요. 끝으로, 그동안 잘려나간 합판 5개를 순서대로 모아 잘리기 전처럼 한 화면에 연결해 붙입니다.

<신체드로잉>의 선 긋기는 제가 의식을 갖고 무언가 드러내 보이려 한 게 아닙니다. 내 몸이 평면과 단계적으로 부딪히며 드러나는 현상으로 평면을 지각해 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그리다’라는 행위가 신체와의 관계 안에서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것, 즉 항(項)을 만드는 작업인 거죠. 제가 설정한 신체드로잉의 방법으로 휘저으면 그런 선이 나올 수밖에 없기에, 많은 수련을 쌓은 기술자에 의해서 그려진다는 개념을 벗어나서, 인류학적 측면에서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됩니다. 

<신체드로잉 76-1-78-2>, 1978, 나무에 유성마커, 163.8×91.2cm [갤러리현대 제공]

 

의식을 배제한 채 현상학적으로만 그리는 <신체드로잉>은 작가님께 어떤 느낌을 주나요? 어려움이 있진 않으셨나요?

<신체드로잉>은 더 본격적인 단계로 나아간 회화보다 신선한 기쁨을 주기도 해요. 인식론에서는 이미 자기가 했던 많은 경험들에 관념적으로 집중하느라 똑같은 결론을 지어 만들어 내는 것에 만족하죠. 그러면 새로운 가능성을 찾을 수 없어요. 반면, 지각론에서는 직접 만남을 통해 새로운 지점들이 생기고, 그 지점들을 함께 공유하는 것이야말로 성공적인 예술을 담보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익숙함의 동물이에요. <신체드로잉>을 처음 시도할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순수하게 선이 그어졌는데, 습관이 들어갈수록 화면이 눈에 보이지 않아도 머릿속에서는 어떤 식으로 선을 그으라는 요청이 자꾸 생겨요. 그걸 막기 위해서 딴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게 참 괴로운 일이에요. 순수하게 몸으로 느끼며 드로잉 하는 지점까지 간다는 건 굉장히 어려워요. 그래서 몇 주 동안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있을 때도 있어요. 그럼 아내가 지나가면서 어차피 안 보고 그리는데 무슨 철학을 하고 있냐고 하지만, 뭐든지 보다 순수한 지평이 있기 마련이거든요. 그게 내 예술의 난제이자 관건이에요.

2016년 갤러리현대에서 선보인 <신체드로잉 76-3> [갤러리현대 제공]

 

<달팽이 걸음>은 작가님의 1970년대 관심사가 응축된 작업으로 보이는데, 특히 <신체드로잉>의 영향이 많이 느껴져요. 또, ‘달팽이 걸음’이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의 전시명으로 쓰인 만큼 작가님께 남다른 의미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달팽이는 느린 속도 안에서 생명의 선을 탄생시킵니다. 갖고 태어난 신체의 제한된 스케일에서 생명의 속도와 유연함을 드러내요. 그래서 달팽이라는 말만 들어도 울렁울렁할 정도로 감동을 느낍니다. 《제15회 상파울루비엔날레》(1979) 프레스 오프닝 날, 저는 쪼그리고 앉아 분필로 바닥에 좌우로 선을 그으며 맨발바닥을 움직여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어요. 200평 정도 되는 전시장 가운데에 긴 파티 테이블이 사선으로 놓여 있었는데, 맞은편 끝에서 출발해서 테이블 밑을 통과하여 반대 벽면까지 가는 ‘달팽이 걸음’을 했던 겁니다. 처음에는 시선을 끌지 못했는데, 테이블 아래를 통과할 때쯤부터 사람들이 모여들고 기자들의 카메라 플래시가 터지기 시작했어요.

<달팽이 걸음>은 신체드로잉의 한 분야로서 선 긋기와 지우기라는 회화의 본질적이면서도 상반되는 행위를 동시에 드러냅니다. 바닥에 남은 선은 일부러 그려 낸 것이 아니에요. 평면 바닥에 몸이 부딪히며 발바닥이 지우고 나간 생태적 흔적이 손으로 그은 띠와 함께 드러나는 것에는 필연의 로직이 있습니다. 불과 20분 만에 끝나는 행위인데 장고한 시간의 축적이 이루어지며, 그 무게를 오롯이 느끼게 하는 행위입니다. 이 간단한 행위에 관객들의 탁월한 공감까지 더해지니 그간 국내외에서 가장 많이 재연한 퍼포먼스로 자리매김했고, 제 대표적인 이벤트-로지컬 중 하나로 꼽아요.

《제5회 ST전》(1980)에서 선보인 <달팽이 걸음> [갤러리현대 제공]

 

198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이전까지 했던 작업을 이어가는 한편, 삶, 문화, 사회의 영역을 더 직접적으로 드러내며 구체적인 메시지를 던지는 작업도 하셨습니다.

1979년 <이어진 삶 79-2>에서 벌써 그럴 기미가 보였어요. 일상의 소지품이 한 개인의 삶을 대변할 수 있지 않겠냐는 발상에서 시작된 퍼포먼스였죠. 그렇게 일상의 문제를 생각하다 문화, 사회, 정치 문제까지 다루게 되었어요. <물고문>(1987), <물로부터>(1989), <망각의 물>(1989) 등에서는, 물이라는 소재가 한국 현대사에서 금강산댐 모금운동, 물고문, 하다못해 홍수를 떠오르게 하기에 물로부터 많은 사람의 공감을 끌어낼 수 있겠다고 판단했어요. 또, 세대를 거쳐 꾸준히 지속된 한국 여성, 어머니의 문화를 나타낸 <모계>(1989)와 <독 속의 문화>(1989), 그리고 현대 산업사회의 문제를 다룬 <구조조정> 시리즈 등이 있어요.

<신체드로잉>의 경우 신체를 어떻게 그린다는 것이 증명되었으면 거기서 멈췄어야 하는데, 제게는 항상 표현에 대한 본능이 작동합니다. 1970년대에 매직을 가지고 원리와 관계성만을 드러내려 했던 것을 넘어, 색과 선을 더 다양하고 자유롭게 쓰게 됐어요. 최초의 순수성을 잃은 게 아닐까 고민되는 측면도 있지만, 내 예술은 언제나 당대의 현실을 반영하고 소통을 염두에 둬야 합니다. <신체드로잉>이 화려해질 당시 대중매체의 발달이 비로소 본격화되어 화려한 색감이 시대를 대변했기에, 그러한 경향을 반영한 자연스러운 현상이었어요. 단, <신체드로잉>의 방법론에 집중하여 이를 더 탐구하여 심화하는 작업도 잊지 않고 병행하고 있어요.

 

이상으로 대표 작업들을 살펴봤습니다. 우문일 수 있으나, 작가님 작품세계에 한국의 정체성이 반영되었다고 혹은 중요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국제 미술계에서 ‘한국 아방가르드’ 작가로 호명되시는 시점이라 드리는 질문입니다.

어떤 작품을 놓고 “이게 한국적이다!”라고 하기에는 막연해요. 바깥 세력이 센 것 같으면 자기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지만, 자기 힘이 어느 정도 커졌을 때는 고려할 범위가 넓어질 수 있죠. 1960-70년대에는 사회 전반에 걸쳐서 ‘한국성’, ‘정체성’에 대한 문제가 부상했는데, 저는 이를 ‘주체성’의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였어요. 한국이라는 나라가 너무 조그마해서 곧 사라질 것 같았거든요. 미술뿐 아니라 모든 분야에서 서양을 빨리 닮아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우리의 원형들이 사라질 것만 같은 위협을 느꼈어요. 그때 한창 구조주의를 공부하던 시기라, 인간의 문화나 인간관계 안에 원형이 되는 구조가 숨어 있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래서 한복 옷소매나 탈춤의 동작, 기와집 추녀 등에 깃들어 있는 선과 색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부터 잠시 <구조> 시리즈를 했어요. <신체드로잉>의 경우 제가 의도하진 않았지만 색이나 형태, 선의 성격, 캔버스의 크기에서 한국적인 무언가가 자연스럽게 반영된 지점이 있긴 하겠죠. 198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의 문화나 사회, 정치 문제도 다루었는데 <독 속의 문화>(1989)가 대표적이에요. 한편, 저는 우리나라 바깥에서는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가에 대한 관심도 항상 컸어요. 그래서 아트 뉴스나 ST를 조직해서 국제 조류를 공부했던 거죠. 요약하자면, 제 작업은 제 관심사에 관한 탐구를 바탕으로 하지만, 저를 포함한 집단과 그 너머까지 고려하려는 의식이 있었어요. 반복해서 말하지만, 제 예술은 언제나 소통을 위해서 당대의 현실을 반영합니다. 그뿐이에요.

 

작가께서는 그 누구보다 본인 작업에 관한 기록물을 많이 남겨서 보유하고 계십니다. 동시대 및 후대와의 소통을 예비하시는 것 같아요.

1970년대부터 기록의 중요성에 관해 주장해 왔어요. 1971년 <신체항>을 작업할 때도 스케치북 한 권을 채울 정도로 드로잉을 하고 글을 썼습니다. 제가 구상한 것들이 특정 장소에서 어떻게 실현될지 예상하며 미리 스케치하지 않으면 실감이 안 나서, 제 모든 행위, 설치, 신체드로잉에 관한 기록을 남겨왔습니다. 동료나 후배 작가들이 궁상이라고 했지만, 현재까지도 작업 노트를 쓰지 않고는 불안해서 작업을 못 해요. 제 작품과 기록들은 사유의 과정들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제 작업을 이해하는 데에 참고 자료가 될 거예요.

또, 기록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사유는 흐르는 것이기에 오늘 기록과 내일 기록이 다를 수밖에 없고, 바로 그 차이 때문에 끊임없이 기록해야 하며, 이런 기록들이 모이면 한국 현대미술사를 이룰 겁니다. 미국의 경우 유럽 미술을 끌어다 전시를 하는 와중에 조금씩 삐뚤어지는 지점을 차곡차곡 기록하다 보니, 어느새 이것이 큰 덩어리가 되어서 새로운 미술로 유럽을 압도하는 상황을 만들었죠. 우리도 AG면 AG, ST면 ST, 단색화면 단색화, 작가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왜 했느냐에 관한 이야깃거리가 일반인들에게 스며들었어야 해요. 그랬다면 서로 소통이 원활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 미술사 안에는 그런 스토리가 항상 부족했어요.

 

말씀해주신 기록의 문제를 비롯하여 한국 미술연구에서 개선되어야 할 지점이 있을까요?

평론가들이 전시에 오지도 않은 채 도록만 보고 글을 쓰는 경우가 있어요. 해외에서 논의된 이론이나 정보를 기반으로 글을 쓰는 것이 작가들에게 물어보는 것보다 낫다는 거죠. 이런 엉터리가 어디 있어요. 저는 평론가들이 작가한테 질문하지 않고 글을 쓰는 게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예전에는 작가들이 얘기하려고 하면 은사인 이일 선생을 비롯한 평론가들이 자기들은 다 알고 있다며, 작가가 작품으로 보여주면 끝나는 거지 왜 그리 말이 많냐 그랬어요. 이런 식이면 나중에는 당대의 사실 자체는 사라지고 논객들의 개똥철학만 떠돌게 될 것입니다. 역사적 사실에 관해서는 처음 접하는 사람처럼 진지하게 탐구, 질문하고 기록해 나갔으면 좋겠어요. 시간을 들이고 계획을 세워서 당대 중요한 작품이 무엇인지 검토하고, 사라진 것이 있다면 이를 추적하고 재현하면서 우리 문화 자산을 잘 정리해 나아가면 좋겠어요. 생존 작가에게는 당대 어떤 생각으로 작업했는지 질문함으로써 작가 자신의 개념도 끄집어내고요. 정확한 기술이 없다면 연구 또한 막연해집니다. 상황이 제대로 기술되어 있어야 후대가 이를 정확하게 인식하고, 거기에서 옹호나 반대 의견이 출발할 수 있어요.

 

근황 얘기를 해볼게요. 세계 4대 갤러리 중 하나인 페이스(Pace)와 얼마 전 전속 계약을 맺으셨습니다.

전속 계약이라는 걸 생애 처음으로 하다 보니, 페이스에 사인하는 과정이 길고 복잡했어요. 이건용의 촌놈 기질이 나온 거죠. 그동안 제가 성장하는 데에 ‘갤러리현대’, ‘리안갤러리’, ‘313아트프로젝트’에게서 도움을 받았으니, 페이스에게 앞으로도 이들 갤러리가 나와 함께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어요. 미술시장에서 전속 계약이란 경제적인 독점 행위를 보장받는 것이기에, 페이스 입장에서는 탐탁지 않아 했죠. 그래도 국내 세 화랑을 포함하지 않으면 페이스와 사인하지 않겠다고 버텼고, 결국 페이스와의 조율 하에 이들의 활동을 보장해준다 해줬어요. 그제야 사인했죠.

 

최근 갤러리, 옥션에서 주로 거래되는 작업은 <신체드로잉> 시리즈 근작입니다. 최근 아트테크를 주목적으로 삼는 컬렉터가 대폭 늘어난 만큼 쏠림현상이 염려됩니다.

갤러리현대에서 저번 개인전이 끝나고 아직도 20여 명이 대기 중이래요. 어떤 할아버지는 저한테 전화를 걸어서 작품 있는 거 알고 있으니 하나 내놓으라며 공갈을 쳐요. 아내는 왜 그런 쓸데없이 통화를 장시간 하냐고 하지만, 전 그게 재미나요. 이게 내 예술에 대한 반응이자 한국의 문화 현상이구나! 한국의 문화 지층은 그리 두텁지 않아요. 뭐든지 당장 남들이 선호하고 돈이 되는 쪽으로 쏠리다 보니 확 떴다가 확 무너져 내리기에 십상이죠. 미술시장에는 특히 돈만 벌려고 이벤트성이 있는 데만 끼어들어 판매에만 주력하는 사람이 많아요. 최근에는 부동산, 주식이나 세금 등 여러 가지 요인에서 미술시장이 급격히 불어난 측면도 무시하지 못하고요.

3년 전에 여기로 이사 온 뒤로 별의별 사람이 다 찾아왔어요. 미술시장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하던 참이었거든요. 이건용 미술관을 만들겠다는 사람, 고객 소개해준다고 딴 사람들 끌고 오는 사람, 이건용 상을 만들어서 세제 혜택을 보라는 사람, 땅을 사라는 사람··· ··· . 이런 것들은 한때 지나가는 바람처럼 앞으로 몇 번 겪어야 할 과정이라 생각해요. 경험을 쌓아 개인적, 제도적 대비를 하면 될 문제이죠. 그리고 애초에 전 사람들이 원하는 방향으로만 작업하지 않아요. 기회가 있는 대로 설치나 퍼포먼스를 해나갈 거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웃음)    

 

말씀 들어보니 제 기우였던 것 같습니다. 끝으로 앞으로의 계획을 알려주세요.

뉴욕 구겐하임미술관 단체전은 2023년 예정인데 구체적인 날짜는 아직 안 나왔어요. 페이스갤러리(홍콩) 개인전은 한창 하는 중이고, 베네치아 비엔날레 기간인 4월에 팔라초카보토 1, 2, 3층에서 개인전, 10월에 313아트프로젝트(파리)에서 개인전이 예정되어 있어요. 국내에선 9월 송은에서 100호 크기의 <신체드로잉>을 한데 모아 100점을 전시할 거고요, 같은 달에 리안(서울)에서도 개인전이 있어요. 갤러리현대와 함께 관객의 참여가 개입되는 <신체드로잉> NFT도 준비하고 있어요. 아아 정말 고민이에요! 아직 실현하지 못한 작업 계획서, 아이디어가 너무 많아요. 회화에서도 더 과감하게 해야 합니다. 미친놈 소리 들을까 봐 참은 것도 많은데, 이제 슬슬 풀어볼까 해요. 바빠요! 그래서 12살(120살)까지 살아야 해요. (웃음)

 

예비 작가들에게도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나는 내가 작업하고 내가 하는 예술 행위를 갖다가 의심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또, 내 예술이 소통이 돼서 확실하게 알려지기 전까지 다른 사람들이 나를 몰라봐 준다는 것에 분노한다든가 열등감, 조바심을 갖지 않았어요. 몰라보는 게 당연한 겁니다. 여태까지 하지 않은 새로운 일을 했기 때문에 사회에서 받아들이기까지 시간이 필요한 거죠. 그대가 새로운 일을 하는, 하려는 사람이라면, 그걸 사회가 금방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 출발하세요. 내가 작업하는 방향이 맞다고 생각한다면, 그걸 믿고 꾸준히 하시면 됩니다.

민태홍  mr.podobunja@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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