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라는 단어는 어디서나 들어볼 수 있는 흔한 단어로 그 뜻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마디로 정의 내리기 어렵게도 그 안의 사람과 풍경은 매 순간 달라져 고정된 것이 없는 신기루 같다. 그래서 우린 같은 도시라는 공간을 살아가도 다른 의미를 부여하며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스윗 홈 스윗, 밝은 네온사인에 지는 그림자까지 사랑하고픈 도시 속 동상이몽을 엿들어보자.
태홍
도시에서 사람을 떼어놓고 생각하기는 쉽지 않다. 정치적 기호인 ‘시민’은 고사하고, ‘도시인’이라는 수사에서조차 도시 자체는 잘 읽히지 않는다. 사전적 정의인 `인(人)의 집단 거주지`라는 맥락도 충분치 않지만, 물리적 실체로서의 도시는 더욱 찾아볼 수 없다.
도시와 사람의 대등한 만남은 하루가 저물어갈 때에야 가능하다. 해가 떨어져야 비로소 건물 창문의 표정이 살아나고, 가로등과 자동차 라이트를 받아 도로의 생김새가 선명해진다. 사람들이 숨어들 때가 되면 도시는 잠시 과거로 돌아간다. 제작 시기가 제각각인 인공물이 만들어내는 시간, 규모의 비현실성은 인간의 흔적임에도 인간적이지 않다. 도시가 사람에서 분리되는 흔치 않은 순간이다.
민재
고향에 가면 공기부터 마음가짐까지 달라진다는 사람들이 낯설다. 사람들 모여 사는 도시라는 공간에 별 감흥이 없다. 내일 당장 포르투갈로 이사를 간다고 해도 싫을 것 없다. 말하자면 뿌리 없는 사람이다. 벼락 맞아 쓰러진 나무 둥치는 아니고, 부레옥잠 개구리밥 회전초처럼 둥둥 떠다니는 새로운 타입의 실향민! ... 그래서 언젠가부터는 유목민 같은 현대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자신을 섬으로 삼아 스스로 의지하며 살라, 하는 누구 말씀이 귀에 마음에 박혔던 것 같다. 위대하신 칭-칸처럼 세상을 정복하는 사람은 못 되더라도, 어디든 던져져도 카멜레온처럼 스며드는 사람이 되어야지 싶었다. 없는 향수는 이상한 곳으로 향해서 태어나기 전 90년대를 그리워하고 영어 캠프 3주 다녀온 발렌시아를 그리워하고 영화 속 판타지 마을을 그리워한다. 디딘 순간 잃은 고향이니 여전히 실향민인 것은 다를 바 없다. 열심히 가상 고향 생각에 집중하면 피어오르는 손톱만 한 감상을 곱씹으면서, 이게 집 떠나 슬퍼하는 내 룸메 마음 비슷할까 상상해 본다. 아무도 날 부르지 않는 때가 오면 가서 살 곳을 찾아야 할 텐데, 어디로 가면 좋을지 고민이다. 이미 나는 태어났는데 새로운 고향을 가질 수 있을까?
영원
레인보우 샤베트 맛 아이스크림이 어떤 맛이냐 물으면 다들 어떻게 대답할까? 내 대답은 ‘쌔그럽다’였다. 예쁜 색깔에 이끌려 담아 달라고 했던 레인보우 샤베트는 너무 시고 맛이 강해서 내 입맛에 맞지 않았다. 이 이야기를 동기에게 들려줬을 때 그게 무슨 말인지 전혀 알아듣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서울에서 나고 자란 서울 토박이였기 때문이다. 그 외에도 음식을 나눠 먹고 싶을 때 ‘반틈’씩이라 하면 처음 들어보는 말이라며 당황했고, 반대로 함께 수업을 듣다 무심코 나왔을 ‘잠 온다’ 대신 친구의 ‘졸려’라는 말은 내 귀에 어색하게 들렸다. 그래서 내게 서울이란 도시는 레인보우 샤베트 같은 곳이다. 평생 대구에서 썩고 싶지 않다는 작은 소망을 품었던 대프리카 흔한 고등학생의 환상은 무지개처럼 다채롭고 아름다웠지만, 직접 느껴본 맛은 기대와는 다르게 쌔그러웠던 것이다. 그 혼란 속에서 나는 이방인이란 꼬리표에 우울했고, 당장 1년 뒤의 내가 어디 머무를지 모른다는 사실이 두렵기도 했다. 사람들과 어울리기도 했지만 놀이터에서 갖고 놀던 스티커가 집에 돌아올 때까지 몸에 붙어서 끈적거리면 불편한 것처럼, 나는 어딘가 잠깐 걸쳐져 있는 상태라는 생각은 떨칠 수 없었다. 언제쯤이면 내가 겉도는 스티커 따위가 아니게 될까. 나는 아직도 그 방법을 찾기 위해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승효
중학생 시절, 우리 학교에선 창밖을 내다보면 남산타워가 보였다. 수업을 듣다 지루해지면 멀거니 바라보는 것이 일상이었던, 지겹고 지루한 풍경. 학교가 산속에 있던 탓에 내 안의 여름철 남산타워란 초록색으로 빽빽이 물든 나무들 사이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인위적인 건물이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 남산타워와 달리 사진 속, 내가 다니던 중학교와 정 반대편에서의 모습이 담긴 남산타워는 심히 인위적인 풍경 속에서 수수함을 뽐내고 있었다. 용산에 사는 친구는 오히려 이러한 모습이 익숙하다고 말했다. 같은 도시인 서울에 살면서도 하나의 건물을 보며 다른 감상을 느낄 수 있다는 점도, 주변 익숙한 건물의 새로운 풍경 속의 모습도 참 신선했다. 서울이라는 한 도시 속에서도 우리는 다양한 것을 볼 수 있고 같은 것을 보고도 이렇게 다르게 느낄 수 있구나를 느꼈다.
정윤
내가 아주 어릴 적, 우리 가족은 서울에서 경기도 용인으로 이사 왔다. 지금 온갖 건물이 들어서며 ‘난개발의 도시’라는 오명을 가지고 있는 용인이지만 그때 엄마는 부동산 직원과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도대체 이 아무것도 없는 곳에서 어떻게 살지’라는 생각을 하며 갓 돌 지난 나를 안고 한숨을 쉬셨다고 한다. 다시 생각해보면 엄마의 생각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나는 기억도 안 나지만 당시 우리 가족은 서울 한복판에서 이사 왔고, 특히 어렸을 때부터 강남에 산 엄마가 보기엔 대체로 어디든 인프라 부족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어쩄든 그렇게 성인이 될 때까지 쭉 용인에 살았다. 그리고 내가 대학에 합격하자 다시 서울로 돌아왔다. 고향을 찾아 바다에서 강으로 오는 연어 마냥. 중학교 사회 교과서가 생각나기도 한다. ‘도시가 발달하고 팽창하면서 도시 주변에 주거 기능 등을 분담하는 위성도시가 생기게 됩니다…’ 연어들은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그들만의 신비한 이유가 있다던데, 내 삶은 왜 사회 교과서의 예시 같은지.
한비
파주에 산다고 하면 사람들은 잠시 조용해진다. 그리고 “아 거기 출판 단지 있잖아!”라며 다시 운을 뗀다. 뭐 책을 시키면 빨리 오긴 한다. 그러나 그곳은 내가 떠올리는 나의 도시와는 거리가 멀다. 내가 사는 이곳엔 아파트밖에 없고, 또 아파트가 아주 많다. 그게 눈에 보이는 이 도시의 유일한 특징이다. 차를 타고 지나가다 보면 ‘한반도의 수도, 파주’라는 홍보 문구를 발견할 수 있다. 그니까 여기는 ‘한반도의 가운데’라는 지리적 특징 말고는 딱히 홍보할 게 없는 것이다. 이 아무 특징 없는 무색무취의 도시가 나에게는 고향이고, 여행을 떠나면 늘 돌아가야 하는 집이 있는 곳이다. 집 앞에는 작은 호수 공원이 있다. 내가 재수할 때 우리 엄마의 소원은 딸이랑 같이 그 공원을 산책하는 것이었고, 정말 대학에 가서 2년 동안 엄마와 그 공원을 많이 걸었다. 공원에서 언덕길을 올라가면 동네에서 가장 좋아하는 곳인 도서관이 나오고, 집 앞 육교를 건너면 졸업한 중학교가 나온다. 가장 친한 친구라 할 수 있는 중학교 동창들과는 여전히 5분거리에 산다. 홍대에 가려 버스정류장에 서 있으면 그 중학교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많이 보게 된다. 그 교복을 처음 입었던게 8년 전이라는 사실에 기분이 묘하다. 아무튼 남이 보기엔 경기도의 여느 신도시와 다를 게 없는 평범한 곳일 테지만, 나에게는 나의 도시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곳이다.
지원
나에게는 두 개의 도시가 있다. 열일곱까지 살았던 인천, 그리고 그 이후 살게 된 서울. 인천을 떠나던 그날은 이제 기억이 흐릿하다. 서울은 낯선 도시이지만, 동시에 익숙한 도시이기도 하다. 인천에 살 때부터 나와 친구들은 재밌게 놀려고 마음먹으면 자연스럽게 서울로 향했기 때문이다. 서울로 이사를 오고서 주거지로서 경험한 서울은 또 다른 도시였다. 모든 게 바삐 흘러가는 삶, 그리고 그 속에는 종전과는 다른 결의 새로움이 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 새로움은 잦아들었고, 어느샌가 익숙함이 더 커졌다. 수험생이었던 언젠가 친구에게 이런 말을 했던 기억이 난다. ‘스무 살이 되면 이제 홍대를 벗어나서 서울의 다른 곳도 가보자.’ 하지만 나는 공교롭게도 마포구의 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또다시 마포구에 위치한 홍익대학교에 진학했다. 친구와의 만남에서도 교통의 요지라는 이유로 몇 년째 홍대 부근을 선회하며 이 주위를 빙빙 돌고 있다. 이렇게 나의 서울은 지금도 계속해서 홍대와 홍대 부근으로 작아지는 중이다. 물론 매일매일 새롭게 발견해나가는 도시의 조각도 존재하지만, 언젠가 이 편안한 곳을 벗어나게 된다면 그것은 그것대로 나름 아쉬울 것도 같다.
수경
나는 그동안 총 여섯 곳의 도시에서 살았다. 이사를 싫어하진 않았지만 딱 한 가지 안좋은 점을 말하자면, 새로운 도시에서는 길을 찾기가 너무 어렵다는 것이었다. 특히 나 같은 길치한테는 도시의 수많은 갈래로 나뉜 길 하나하나가 난관으로 다가왔다. 사방으로 나있는 길 한가운데 서있자면 어디로 가야할지 모르겠어서 어릴땐 새로운 동네에서 집 가는 길을 잃고 한참을 빙빙 돌았던 기억도 난다. 그래서 더 이상 길을 잃는 걸로 고통 받지 않기 위해 생각해낸 해결책이 간판 외우기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맞았다. 학교에서부터 집까지 걸어오는 길에 있는 모든 간판을 보고 또 봤다. 적어도 간판을 다 외운 순간부터는 길을 잃지 않았기 때문에 나름 괜찮은 해결책이라고 뿌듯해 했던 기억도 있다. 8살쯤부터 나의 길치 본능을 극복하기위해 시작한 간판 외우기라는 취미는 성인인 지금도 꽤 많은 도움이 된다. 예전에 살던 도시들이 그리울 때,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간판들을 나열해보면 그때로 돌아간 것 같은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다. 또, 새로운 도시로 이동해서도 금방 적응하게 해주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항상 어디를 가도 새로운 공간에서는 끝없이 이어지는 간판을 무의식중에 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현영
‘이거 어디까지 올라가는 거에요’’블루베리스무디!’, 부산에서 왔다고 하면 다들 왜 그렇게나 이걸 시키는지. 그래도 시킨 사람 무안하지 않게 앵콜로 ‘e의2승’’가가가가가’까지 해주면 어느새 테이블에 모두가 내가 부산 출신임을 알게 된다. 사실 난 뼛속까지부산 사람이 맞다. 4년의 해외살이를 제외하면 부산에서 태어나 20살 이전까지의 모든 시절을 살았으며 그 유명한 부산 갈매기의 골수 팬이니 말이다. 서울에 처음 왔을 때가 아직도 생각난다. 서울역에 도착하자마자 보였던 수많은 고층 건물에 압도되어 “내가 앞으로 이 도시에서, 이 수많은 사람과 융화되어 살아갈 수 있을까”하는 막막하고 두려운 감정. 생각해보면 내가 살던 해운대가 서울 어느 곳보다도 고층건물은 더 많은데 말이다. 아마 낯선 도시에 낯가리던 감정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던 것이겠지. 하지만 3년째 살다 보니 요즘의 난 완전한 융화를 고집하지 않는다. 아니 정확히는 바빠서 잊고 산다가 맞을까. 서울인으로 바삐 살아가던 중에 가끔은 잠실경기장에 원정 오는 갈매기들을 응원하고, 가끔은 지친 마음에 고향에도 내려가며 그 순간만큼만 부산인으로 돌아가는, 뭐 그렇게 산다. 그저 서울시 마포구에 거주하는 부산 갈매기로 말이다.
시윤
사투리, 거센 억양으로 유명한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나는 20여 년 동안 사투리가 표준어인 환경에서 자라왔다. 고등학교 수업에서 ‘표준어’가 나오면 우리들은 단체로 서울말이 왜 ‘표준’어냐며 괜한 반발심에 휩싸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투리에 대한 자부심이 가득했던 나는 서울로 대학을 진학하며 서울에 녹아든 사람이 되고 싶었고, 필사의 노력으로 표준어를 구사하려 했다. 덕분에 몇몇 사람들에게서는 사투리의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며 칭찬 아닌 칭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서울말을 연마하던 중, 우연히 서울에서 부산 사투리를 쓰는 누군가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나는 다시 사투리를 쓰기 위해 노력하였다. 뭔가 이상했다. 부산에서의 나는 사투리를 쓰지 않으려 노력하거나, 사투리를 과하게 쓰려고 한 적이 없다. 나는 그저 나의 말투로 대화했다. 그러나 아직 나라는 사람이 정의되지 않은 서울, 그리고 성인이 되어 새롭게 바뀐 내 세계와 나는 낯을 가리며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지 헷갈리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도 보이고 싶고, 저렇게도 보이고 싶은 스무 살의 고민이 사투리에서 마저 느껴지다니! 그 변덕의 과정 끝에 나는 내가 어떤 말투를 쓰는지 모르는 편안함의 단계에 이르렀다. 부산에서의 나처럼 그저 ‘나의 말투’를 구사할 뿐이다. 일 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서울과 나에 대한 낯가림이 조금은 수그러든 모양이다. 앞으로 변화하는 나의 세계와 이 도시를 한 번 기대해 본다
와우 기자 일동 wonvely020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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