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꾼도시사람들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너무 많은 걸 다 기억하고 살아야 하는 세상이다. 수많은 사람과 패턴 비밀번호들. 기억할 게 많아서 잊히는 것도 빠른 세상. 가끔은 좀 잊고 살라고 술이라는 게 있는 거 아닐까?”

-술꾼도시여자들 3회 중에서-

술로 이루어지는 도심 속 연대

술과 도시는 떼어놓을 수 없는 필연 관계이다. 사람의 무리가 모여 도시를 이루고, 그 도심 속에서 개개인은 저마다의 이유로 술잔을 기울인다. 가끔은 슬픔에 때로는 기쁨에, 오늘은 누군가를 위한 위로를 위해, 그렇게 각자의 이유를 대며 술상 앞에 우리가, 내가 마주 앉는다.

다양한 핑계를 대며 다양한 사람들과 술자리를 함께해도 본질은 같다. 바로 술을 통한 ‘연대감’.

연대감 형성을 위해 술자리에서는 다양한 행위가 이루어진다. 대표적인 건 건배사가 아닐까? 어색한 사람들끼리는 분위기를 고조시키기 위해서, 동료들끼리는 서로를 격려하고자, 친구들끼리는 반가움을 표시하고자 말이다. 취기로 인해 이미 붉어진 얼굴과 꼬인 혀로 다 함께 잔을 들어 올리며 크게 구호를 외친다. 목소리 큰 주도자 한 명이 구호를 선창하면 나머지 사람들도 따라 외친다. 힘 넘치는 구호와 함께 부딪힌 술잔을 한 번에 털어놓으며 우리는 알코올에 젖고 또, 연대한다. 그렇게 연대한 우리는 술기운에 웃거나 울다가 다음 날 아침 각자의 방법으로 해장을 하고 똑같은 하루를 살아간다. 삶은 그렇게 계속된다.

이 글을 쓰며 연대와 술, 두 단어의 상관성에 대해 유심히 생각해보았다. 둘의 상관성을 설명하지 못한다면 이 글은 그저 아무 이유 없이 술을 권하는 본격적인 맥락 없는 음주 권장 글이 되어 버릴 테니 말이다.

진정한 연대를 하려면 어색함이 없어야 하는데 많고 다양한 사람이 함께 어색함을 잊는 데에는 술만 한 것이 없다. 처음 만난 술 동무와 서서히 취기에 젖어 드는 과정은 너무나도 매력적이다. 처음에는 어색해 날 서 있던 분위기가, 부끄러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우리가 술을 한잔 두잔 기울이며 둥글해지는 것, 내가 술을 좋아하는 유일한 이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니 말이다.

혼술의 매력

하지만 누군가는 술을 통한 연대에 쉽게 지치기도 한다. 외향인과 내향인 딱 그 중간에 서 있는 나에게 연이은 술자리는 가장 피하고 싶은 존재이다. 그렇다고 술이 싫냐고 물으면 그건 아니다. 지친 하루 혼자 마시는 술이 가지는 또 다른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20살의 나는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독학 반수를 했다. 공부도 어려웠지만, 더 힘들었던 것은 서울이란 거대한 도시가 주는 고립감이었다. 낯선 도시가 주는 무서움과 외로움을 혼자 달랠 방법을 몰랐기에 이곳과 친해지기 위해 학원이 끝나는 금요일 밤이나 휴일에는 무작정 다양한 음식점에 들어가 밥을 먹었다. 태어나 혼밥이란 것을 처음 해보았던 초반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해 음식을 다 먹지도 못하고 나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차츰 힘들었던 일주일을 정리하며 음식을 씹다 보니 한순간 느긋하게 나만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사람은 여유가 생기면 알다 모를 패기가 생긴다. 어느새 내 손은 이미 소주 한 병을 시키고 있었다. 22살의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지만 20살에는 소주를 즐길 줄 알아야 진정한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소주가 내 첫 혼술 주종이었다. 어찌 되었든 학원과 집 근처를 벗어나기는 어려웠기에 초반에는 학원이 위치한 강남역 주변에서 혼밥에 혼술을 즐겼다. 하지만 모두가 알겠지만, 금요일 밤의 강남역은 혼자 소주를 즐기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곳이다. 여럿이 모여 왁자지껄하게 마시는 술자리가 대부분인 곳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란을 피하고자 학원 앞 조용해 보이는 작은 이자카야로 대피하였다. 주방을 둘러싼 기다란 테이블에는 개인마다 칸막이가 쳐져 있었고 그곳에는 나와 같이 오롯이 자신만을 위해 금요일 밤을 쓰고 싶은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시끄러운 외부와 단절된 듯 생각보다 조용하던 분위기에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두리번거리던 나에게 주인 아저씨는 커다란 메뉴판을 건내었고 난 신분증을 보여주며 재빨리 빈자리에 착석했다. 다양한 술과 안주로 가득한 메뉴판 속에서 내일이 있어야 하는 수험생이 간단히 즐기기에 가장 좋았던 술은 우메보시 하이볼 한 잔이였다. 취향에 맞는 간단한 술 한 모금과 맛있었던 숙주 볶음에 이자카야 특유의 경음악을 곁들인 그 순간 서울이란 타지의 맛과 향에 취할 수 있었다. 혼자 한잔하기에 외롭지 않고, 되려 혼자만의 시간에 낭만을 더하니 말이다.

이렇게 거창하게 시작했던 20살의 혼술은 차츰 간단해졌다. 나중에는 집에 들어오며 사 왔던 네 캔 만원의 맥주와 즉석 안주가 가장 흔한 메뉴가 되었고 점점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는 방법을 터득했다. 그 방법은 ‘자유로움’이었다. 좋아하는 방송 프로그램을 보며 혼자서 술을 마시는 동안만큼은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 내게 집중을 하며 오로지 내 감정에 솔직해지는 그 자유로움. 웃긴 장면이 나올 때는 크게 웃고, 슬픈 장면이 나올 때는 훌쩍이고. 그렇게 매주 금요일의 가벼운 혼술은 친구 하나 없이 독학 재수를 하던 20살 외지인이 자신의 감정을 표출하는 유일한 시간이 되었다.

이러한 매력에 흠뻑 취한 나는 가끔 만났던 친구들에게 혼술의 장점을 설교했고 그때마다 걱정 어린 욕을 들었다. 제일 많이 들었던 말이 ‘사람은 그런 씁쓸한 술을 계속하면 우울해져’였나. 당시에는 아 그런가? 하며 혼술의 매력에 대한 확신을 갖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의 혼술 3년차(?)는 당당하게 말할 수 있다. 혼자 술을 마시는 것은 주책맞거나 외롭지 않으며 자유롭고 평온한 것임을 말이다. 대학생이 되고 많은 사람을 만나며 요즘에는 이전보다 혼술을 즐기지 못한다. 하지만 여전히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생기거나, 살아가며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 생길 때는 혼술을 한다. 일을 한 발짝 멀리서 바라보게 해주며 잠시 고조되었던 감정을 정돈하기에 큰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는 사람 중에서 술은 좋아하지만, 아직 혼술을 해보지 않은 이에게는 한 번쯤의 혼술을 권해보고 싶고 나처럼 이미 혼술을 즐기고 있는 이에게는 당신은 어떠한 매력에 혼술을 즐기는지 물어보고 싶다. 그 매력을 찾으며 마시는 혼술에는 더 큰 재미와 의미가 생기기 마련이니깐.

도시인들이 유일하게 솔직해지는 순간, 취중진담의 매력

평소라면 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것에 술이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오죽하면 ‘취중진담’이라는 말도 있을까. 이는 최근 ‘술꾼도시여자들’이란 드라마가 인기를 끈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하다. 절친한 여자 셋의 이야기를 취중진담을 통해 풀어내는 스토리를 가진 이 드라마는 사실 4년간 모든 방송국에서 거절당했다고 한다. 하나같이 여자 셋만을 주인공으로 하며 술만을 전면에 내세우는 내용은 리스크가 크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보란 듯이 성공하며 시즌 2의 제작이 확정되었고 이는 많은 2030 세대가 이들의 술 먹방에 공감했음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들의 취중진담에 공감했을까? 답은 드라마의 제작 의도에서 찾을 수 있었다.

[부당해서 친구들과 술을, 낙담해서 친구들과 술을, 견딜 수 없는 부채감에 친구들과 술을 먹는다. 그 몹쓸 사회가 자꾸 술을 권한다. 술 먹지 않고 도무지 털 방법이 없어 도시 술꾼 여자들은 매일 술을 마신다.]

드라마는 30대 여성이 겪는 사회적 편견과 말 못 할 속내를 술과 안주를 먹으며 서로에게 털어놓는 세 명의 주인공을 통해 시청자에게 ‘너는 어떠니?’ 라는 질문을 던짐으로써 본격적으로 술을 권해 시청자의 취중진담을 유발한다. 즉, 시청자의 실패에 건배를 청하며, 쓴 술을 함께 해주는 안주 같은 드라마가 되었기에 많은 시청자의 사랑을 받을 수 있었다.

“술에 취하면 별것도 아닌 일이 다 별게 된다, 진짜 별거였던 일은 순식간에 별일이 아닌 게 된다.”라는 대사가 있다. 개인적으로 이 대사에 취중진담의 본질적 매력이 담겨 있지 않은가 싶다. 자존심에 말하지 못했던 고민도 술기운을 빌려 상대에게 이야기하며 입 밖으로 내뱉는 그 순간 사고와 감정이 정리되며 별일 아닌 일이 될 수 있는 그런 점 말이다. 물론 지나친 취중진담은 상대에게 부담이 될 수도 있다. 취중고백이 가장 대표적일 수 있겠다. 그런 가사가 있지 않나. “그래, 나 취했는지도 몰라, 실수인지도 몰라” 어찌 보면 가슴앓이해오던 사랑을 술을 핑계로 끝내 고백하는 가사 같지만, 그 고백에 준비되지 못한 상대는 얼마나 당혹스러울까. 그러니 지나친 취중진담은 금물이다. 비극을 질겅질겅 씹으며 미지근한 소주 한잔과 들이킬 안주거리로 삼는 딱 그 정도의 취중진담이 적당하다.

그렇다면 이제는 내가 생각하는 대표적인 도심 속 음주 스팟들을 소개해볼까 한다.

홍대의 술, 을지로의 술

서울의 가장 대표적인 음주 스팟을 꼽으라고 하면 난 망설임 없이 홍대와 을지로를 고를 것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대비되는 두 곳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홍대는 젊음의 새로운 만남의 술자리, 대학가의 어색함을 없애기 위한 술자리가 가득한 공간이기에 날술(주법을 갓 배워서 서툴게 마심. 또는 그렇게 마시는 술)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래서일까 길거리 곳곳에는 자제하지 못한 술에 취해 붉어진 얼굴을 한 채 몸을 가누지 못하는 청춘들로 가득하다. 나도 그들 중 하나이고 말이다. 술을 무기로 성인이 되어 만난 새롭고도 낯선 세상에 맞서고 있는 우리의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면 어울리는 노래가 생각난다.

“♬작전명 청춘”

“어른이 된 오늘 내게 세상이란 곳

어릴 적 그리던 꿈속 전쟁터구나

그 속에서 나는 다시 영웅이 되려

선포한다 작전명 청춘

비틀비틀 넘어갈 듯

하루하루가 흘러갔지만

결코 쓰러지진 않을 테니

난 문제없어

오오오, 오오오, 오오오

청춘, 청춘

(Yes, who we are?) 청춘

(Yes, who we are?) 청춘”

반면, 을지로와 명동은 직장인들이 지친 업무 이후 회사 동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많다. 그래서 홍대의 날술보다는 주로 고된 업무 후 적절한 음주와 회포가 이루어진다. 자신을 놓아버리고 마시기에는 서울의 직장인은 제약이 많기 때문일까. 내가 본 을지로와 명동의 직장인들은 대부분 긴장한 채 술을 마시는 듯했다. 명동에 좋아하는 간판도 없는 위스키 바가 있다. 그곳에 가면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많이 볼 수 있다. 한번은 회사 팀원들이 단체로 회식을 하러 그곳에 온 걸 볼 수 있었는데 속으로 ‘아, 정말 회식 문화가 많이 바뀌었구나.’라고 생각하며 신기하게 생각했다가 그들의 대화를 듣고 섣부른 생각임을 깨달았다. 대화 내용이 글쎄 더 나은 성과를 위한 업무 이야기뿐이었기 때문이다. 결국은 위스키 바에서의 고급스런 회식도 명동의 직장인들에게는 업무의 연장선이 되어버린 셈이다. 그들을 보고 있자면 나의 빨간 포장마차 로망이 떠오른다. 어렸을 적 보았던 드라마 속 주인공은 지친 업무를 끝내고 회사 앞 포장마차에서 꼭 우동 한 그릇에 소주를 마시곤 했다. 술에 대해 무지하던 어린 내가 보기에도 그 빨간 포장마차는 주인공에게 커다란 위로를 주는 곳 같았다. 아마 노란 조명 아래 씁쓸하던 표정이 분위기에 취해 은은한 웃음으로 변하던 주인공의 얼굴을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블루버드, 스프레드 유어 윙스”

“반짝이던가

새들의 노랫 소리

여기 깨어진 꿈의 조각을

주워 가렴 oh woo

아침 햇살이

그 노래가 날 뱉으면

나는 또 날아볼래

I swear, I swear

Blue bird! Blue bird!

Come, get your life!

Believe you're be alright (you're be alright)”

해운대의 술

고향인 해운대는 내겐 언제나 돌아갈 수 있는 안식처이다. 매번 부산에 도착해 택시를 타고 광안대교를 지날 때 느껴지는 그 벅참은 한 시간 동안 이야기할 수 있는 미묘한 감정이다. 하지만 고향이 아닌 많은 이들에게 해운대는 여행지로서 느껴지는 설렘의 벅참이 더욱 큰 곳이다. 여름이 다가오는 지금, 해운대 해변가에서의 술, 낭만적이지 않은가. 낮에는 모래 위에서 시원한 맥주를, 밤에는 터지는 폭죽을 보며 해변가 앞 바에서 와인 한 잔을,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술을 마신다. 이렇듯 다양한 해운대 속 음주 스팟 중에서도 내가 젤 좋아하는 술은 늦은 밤 미포항 등대 앞에서 마시는 맥주 한 캔이다. 첫술을 마신 장소여서일까. 등대에 비친 불빛을 보며 바다 내음과 함께하는 맥주 한 캔은 기분 좋게 알딸딸해지기 참 좋다.

하지만 요새 미포항 등대보다 내가 더 사랑하는 음주 스팟이 있다. 바로 동백섬 둘레길에 있는 흔들다리. 벤치가 여럿 있어 해운대 해수욕장과 달맞이길 야경을 보면서 술 한잔하고 싶은 주민들의 아지트랄까? 해운대 음주 스팟은 유명 장소밖에 몰랐던 모두에게 나만의 동백섬 음주 아지트를 공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