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뚝-하고 떨어진 천재와 작품은 없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태어나는 순간부터 사회의 산물로서 살아가며 보고 접하는 수많은 것들을 자연스레 흡수한다. 작가와 감독, 화가라고 다르지 않다. 그들 역시 이전 시대의 거장, 동시대의 동료, 둘러싼 환경 등에 끊임없이 영감을 받고 있다. 물론 영감을 새로운 영감으로 만드는 일은 오로지 이어가는 자의 몫으로 남겠지만!

책과 영화

책은 단연코 가장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소재이지만 그렇다고 만만하지는 않다.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는 만큼, 그것을 이어가는 자에게는 나머지 사람들의 상상보다 자신의 것이 더 멋진 것임을 설득해야 하는 책임이 있다. 책을 단순히 ‘좋은 재료’로만 바라보아서는 안 된다. 같은 재료가 주어져도 요리사에 따라 수많은 요리가 나올 수 있는 것처럼, 책 역시 읽는 사람에 따라 수많은 세계가 태어나게 한다. 그런데 그 요리를 많은 사람에게 맛보게 하려면, 당연히 그들이 부엌에서 뚝딱 만들었을 때의 결과물보다는 좋아야 하지 않겠는가?

이탈리아 출신 감독 루카 구아다니노의 영화 <Call Me by Your Name>은 안드레 애치먼의 동명 소설을 바탕으로 만들어졌고, 앞선 비유로 설명하자면 이 영화는 아주 빼어난 요리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가 처음부터 주방장이었던 건 아니다. 그는 소설을 영화화하려 힘쓰는 제작자 중 한 명이었다. 책을 영화화하려는 시도는 2007년부터 수년간 계획에만 머물러 있었고, 그동안 여러 감독이 이 계획을 지나갔다. 그러나 결국 돌고 돌아 루카 구아다니노에게 오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운명에 대해 자신이 영화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영화가 자신을 고른 것이라 얘기하며, 감독 일이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duty)와 같았다고 얘기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헌신하게 만든 것일까? 그는 책이 엘리오와 올리버, 그들만의 특별한 감정을 다루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인류 공통의 언어인 사랑에 대해 섬세히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매력으로 꼽았다. 즉 모두에게 영감이 될 수 있는 이야기인 것이다. 

영화는 책을 원작으로 한 것은 맞지만 완전히 같지는 않다. 제일 큰 차이점은 관점이다. 책은 일인칭 시점으로 엘리오의 풋내나지만 복잡하고 솔직한 심정이 그대로 드러난다. 그러한 덕에 독자는 엘리오가 느끼는 모든 감정을 이해하며 같이 겪게 된다. 그가 사랑에 빠지거나 혼란을 느끼거나 괴로움에 몸부림치면, 독자도 그의 감정선을 그대로 따라가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엘리오의 시점 속에서 올리버의 생각은 알 수 없으니, 독자도 자연히 엘리오와 마찬가지로 올리버의 마음을 이해하고 싶어 전전긍긍하게 되었다. 영화에서도 엘리오의 내레이션을 넣어 일인칭의 느낌을 재현할 수 있었지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은 그것을 원하지 않아 색다른 시도를 했다. 인디 음악가, 수프얀 스티븐스에게 찾아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결정은 훌륭한 선택이었다. 스티븐스는 소설을 읽은 뒤 영화를 위한 2곡의 OST를 만들어 주었는데, 이 노래들이 서사적으로도 심미적으로도 완벽한 내레이션의 역할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점이 바뀌고 OST 속 가사가 내레이션의 역할을 하게 되며, 소설에서 엘리오가 비밀을 털어놓는 존재였던 비미니는 더 이상 필요가 없어졌다. 대신 관객은 엘리오와 올리버 둘만의 관계에 더욱 집중하게 된다.

등장하지 않는 것은 비미니 뿐만이 아니다. 올리버가 미국으로 돌아가기 전 엘리오와 함께 로마에서 열린 한 출판 행사에 참여한 일, 시간이 흐른 뒤 둘이 재회하는 이야기 등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진 장면이라도 영화에서는 연출되지 않은 것이 많다. 감독은 소설의 내용을 하나도 빠짐없이 담으려 하지 않고, 영감을 받되 새로운 자신만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소설은 그 배경이 이탈리아 어딘가의 작은 마을이지 결코 어느 곳이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감독은 자신에게 고향과도 같아 큰 애정을 가지고 있는 크레마를 영화의 배경으로 설정했다.

책의 몇몇 특징들을 유추해보았을 때 실제로 작가가 떠올린 장소는 ‘보르디게라’라는 해안 도시로 크레마와는 다른 분위기를 띤다. 이로써 소설에 바탕을 둔 영화는 새로운 이야기가 되었다.

소설에서 매력을 느낀 부분과 동일하게, 루카 구아다니노 감독이 초점을 맞춘 것도 엘리오와 올리버의 ‘사랑’ 이야기였지 ‘엘리오와 올리버’가 아니었다. 그래서 감독은 소설 내내 엿보이는 엘리오의 성격과 올리버에 대한 외적 묘사를 배우들의 대사를 통해 표현하려 애쓰는 대신 스토리에 집중했다. 그래서 그저 공백을 메우기 위한 공허하고 의미 없는 대사는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또한 구아다니노는 불확실한 것들이 갖는 힘을 알았다. 대본에도 쓰여있지 않은 장면들을 찍는 것을 좋아했고, 가끔은 그러한 장면들이 대본에서 유의미한 장면들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양의 대사보다 그런 장면들이 채워주는 미를 알았기 때문이다. 그의 이러한 노력은 책이 시각화된 영화를 보면서도 관객이 여전히 상상을 이어갈 수 있게 한다.

오랜 기간 준비한 영화는 2017년 개봉하며 좋은 반응을 얻었고 관객들은 자연스레 원작 소설에도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에 힘입어 작가 안드레 애치먼은 책 <Call Me by Your Name>의 후속작인 <Find Me>를 2019년 발표하기도 했다.

음악과 건축 

신화가 그림으로 다시 태어나고 소설이 영화가 되는 것은 많이 보았지만, 음악이 건축으로 이어질 수 있을까? 우리가 흔히 연결 지어 떠올리는 분야는 아니지만, 사실 건축과 음악은 꽤 인연이 깊다. 아름다움의 원천이 균형과 조화에서 오고 이것이 수의 과학인 음악의 탁월성에서 나온다는 주장은 오랜 시간 설득력을 가졌다. 특히나 중세 기독교 시기에는 숫자에 의미를 부여하여 상징으로 사용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한다. 12세기 중세 유럽의 주교였던 기욤 드 파사방은 건축가를 작곡가라 칭했으며 “음악을 이해하는 것은 모든 사물의 질서를 이해하는 것”이라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영국 건축사무소 ‘챈스 데 실바 아키텍츠(Chance de Silva Architects)’의 건축가 스티븐 챈스는 런던의 한 공연장에서 프랑스 작곡가 에릭 사티의 그 유명한 ‘백사시옹(Vexations)’을 듣게 되었다. 백사시옹이 유명한 이유는 바로 곡의 연주 길이 덕분이다. 작곡가인 사티의 요구대로 연주하면 백사시옹은 완곡에 스무 시간가량 소요된다. 그러나 연주 길이와 유명세에 비해 악보는 달랑 한 페이지로 매우 짧다. 주제부를 연주하는 왼손은 피아노의 12음 중 11음만을 사용하고, 주제는 이 위에 2부 화음을 얹는 형식으로 진행된다. 악보에 표시된 악상기호에 따라 왼손과 오른손은 화음에 변주를 주며 계속하여 반복하는 것이다. 곡에는 총 17개의 화음이 사용되었는데 그중 15개는 감3화음으로 장3화음이나 단3화음에 비해 불균형적이며 따라서 어딘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들게 한다. 사티는 이 곡을 연주하게 될 자에게 “이 동기를 840회 연속으로 연주하세요. 미리 준비하고 절대적인 침묵 속에서 미동도 없이 연주하세요.”라는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1963년 존 케이지가 뉴욕에서 백사시옹을 완주한 뒤 지금까지도 곡을 완곡한 경우는 몇 차례 없다. 완곡에 성공한 존 케이지는 840번의 반복을 거친 뒤 자신이 완전히 바뀌었다고 말했으며, 사티 또한 840번의 반복은 840번의 창조라 언급하기도 했다.

한 번의 연주에 840번 혹은 그 이상의 창조를 일으킨 백사시옹은 영국의 건축가 스티븐 챈스에게 새로운 창조의 영감을 불러일으켰다. 영감은 챈스가 스스로 건축가이자 설계자가 되어 런던의 북부에 주택 ‘Vex’를 짓는 프로젝트를 진행하게 했다. 음악과 건축이라는 새로운 시도에서 나아가 챈스는 일랙트로닉 작곡가인 스캐너(로빈 림바우드)에게 함께 일할 것을 제안했다. 스캐너는 곡을 바탕으로 세 개의 사운드 트랙을 제작했고, 챈스는 그것을 토대로 건축에 들어갔다. 완성된 콘크리트 주택은 세 개의 층과 발코니로 이루어졌다. 각 세 개의 층은 서로 다른 모양의 콘크리트 드럼으로 골판지와 같은 주름이 그 외벽을 이루고 있다. 

주택에 숫자 ‘3’이 자주 등장하는 것은 백사시옹의 화성이 3화음만을 사용하고 있다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주름의 물결도 드럼마다 상이하다. 반복되지만 동일하지는 않은 백사시옹의 특징을 담아낸 것이다. 주택 내부에 위치한 계단은 각 층마다 위치가 다르고 창문의 모양도 제각각이다. 나아가 콘크리트 드럼은 완벽한 원이 아니라 약간씩 불완전하다. 앞서 곡이 12음 중 11음만을 사용하고 감3화음 때문에 불안정한 느낌을 자아낸다는 것을 떠올릴 수 있다. 또한 드럼의 물결은 멀리서 보면 잘 눈치채지 못 할 수 있지만 실제로 모두 다르다. 반복되지 않는 물결을 표현하기 위해서 목수들은 콘크리트 거푸집을 수작업으로 진행해야만 했다. 그리고 곡의 주제선율에 연속음이 없고 높은음과 낮은음이 차례대로 나타나는 양상도 외관의 물결에 건축적인 특징으로 반영되었다. 

Vex 주택의 창문 중 다른 하나와 같은 창문은 하나도 없다. 주택의 창문은 백사시옹의 악보를 상당히 직관적으로 나타내려 하였다. 창문의 위치와 모양을 정하기 위해 설계사는 주택의 모형에 곡의 악보를 둘렀다. 그리고 악보의 모양을 따 그대로 창문을 만들었다. 

실제로 Vex 주택이 완성되고 나서 건축에 참여했던 작곡가 스캐너는 ‘Vex’라는 앨범을 제작했다. 백사시옹이 3화음만을 사용하고 Vex 주택도 3층으로 이루어졌던 것처럼, Vex 앨범 또한 3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었다. 곡에는 주택을 지을 때 녹음한 공사 소리와 콘크리트를 붓는 소리 등을 비롯하여 Vex 주택을 청각적으로 담고 있다. 스티븐 챈스의 Vex 주택 프로젝트는 콘크리트 건축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고 평가되며 많은 동료 건축가들은 그의 작업에서 다시 영감을 받아 가고 있다.

영화와 기술 

기술이 영화로부터 영감을 받는 것은 쉽게 그려지지 않는다. 영화는 예술, 기술은 과학이므로 후자가 더 진지한 것이라는 우리의 편견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또 한편으론 서로 닿지 않는 분야 같기도 하다. 예술과 과학은 대척점에 있는 것처럼 여겨지곤 하니 말이다. 그러나 영감에 정해진 원칙 같은 것은 없다. 영감을 잘 찾아내는 자는 오히려 의외의 분야에서 남들이 생각해내지 못하는 것을 연결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편견을 버린다면 영화에서 과학으로도 영감이 전해질 수도 있다.

아서 C. 클라크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개봉한 지 50년도 더 지났지만, 여전히 최고의 공상과학 영화로 꼽히고 있다. 개봉 당시 제41회 아카데미영화제 특수 효과 부분에서 수상했을 정도로 영화에는 많은 기술이 자연스레 녹아있다. 지금 이 영화를 보는 사람은 그저 ‘세련된 SF 영화’ 정도로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여러 과학 기술들이 영화에서 최초로 선보여졌다는 점을 생각한다면, 이 영화가 정말 획기적이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영화에서는 목성으로 향하는 우주선 디스커버리호가 등장한다. 디스커버리호는 인공지능인 HAL 9000의 감시 아래 임무를 수행하며 저온학을 이용한 냉동인간을 비롯해 화상 채팅과 갖가지 우주식량, 음성 신분 확인 시스템, 태블릿 PC 등을 우주선 안에 보유하고 있다.

영화가 얼마나 우주 비행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냐면, 우주복을 입고 있을 때 나는 비행사들의 호흡 소리, 무중력 상태인 우주선 내부에서 비행사들끼리 충돌하는 방향, 승무원들이 신고 있는 무중력 전용 벨크로 신발, 행성 간의 상대적인 크기와 그것을 지나가는 우주선의 크기 등을 아주 자세하고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고려하고 담아내고 있는 영화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닐 암스트롱이 1969년 인류 최초로 달에 발을 디디기 1년 전인 1968년에 개봉하였다.

영화에 등장한 수많은 기술 중 저온학과 인공지능은 영화 이후 현실에서 실제로 실현된 대표적인 기술들이다. 그리고 이렇게 현실화한 기술 중에는 태블릿 PC도 있다. 비록 영화 속에서 사용된 태블릿 PC는 현대의 태블릿처럼 휴대할 수 있지는 않았다. 그것은 디스커버리호에서 우주비행사들이 지구와 소식을 주고받기 위해 사용되던 뉴스 보드였지만, 그 형태와 기능을 보았을 때 충분히 태블릿 PC의 원조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영화에 목성 탐색선으로 등장했던 디스커버리호는 실제로 10여 년 뒤 나사(NASA)에서 새 우주왕복선의 이름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하지만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단지 기술의 창의성과 과학적 정확성 때문에 높이 평가되는 것은 아니다. SF영화이면서도 인류와 문명의 역사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을뿐더러 한 장면에서 다른 하나로 넘어갈 때의 영상 편집 기술, 니체의 사상을 영화 내에서 풀어내려 한 점, 음악을 사용한 방식 모두 혁신적이다. 이렇게 각각의 요소들이 완벽하면 이를 모두 합친 전체는 단순히 낱개를 합친 것보다 큰 힘을 갖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경우에 영감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다. 스페이스 오디세이가 바로 그런 예이기에 많은 영화 제작자들이 스페이스 오디세이를 SF영화의 걸작을 넘어 영감의 원천으로 뽑는 것일 테다. 아바타를 제작한 제임스 카메론 감독, 트랜스포머와 인디아나 존스 등을 제작한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을 비롯해 무수히 많은 영화감독이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언급한다.

지극히 흔한 소재에서 영감을 받더라도 풀어내는 자의 능력에 따라 그 결과물이 상당히 다른 결과를 가져올 수 있고, 남들은 영감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소재나 영역에서도 무언가를 발견하고 끌어올 수 있다. 꼭 무언가를 창작하지 않더라도 우리의 삶에서 영감이 필요한 순간은 많다. 우리가 살펴본 이야기는 티끌의 먼지보다 작은 부분에 관한 것이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예상치 못한 순간 우리의 삶에 큰 영향을 가져올 지도 모른다. 우리가 열려 있는 만큼 들어오는 법이니, 좋은 영감을 위해 마음속에 한 편의 자리를 남겨 두자!

박한비  kkkanb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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