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지 속 잡지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여기, 전 세계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두근거리게 하는 한 잡지가 있다. 수많은 잡지사의 부록 전쟁은 우습다는 듯 부록 하나 없이 그 위상을 유지하며 당대 최고의 스타만을 찍고, 최신 유행만을 다루는 <VOGUE>. 이번 와우에서는 이 콧대 높은 잡지를 소개한다.

보그의 역사

프랑스어로 ‘스타일’이라는 뜻의 보그는 뉴욕에서 1892년에 시작된 잡지로 원래는 사회 주간지였다. 이후 1909년 지금과 같은 패션지의 모습을 띠게 되었다. 패션지로 탈바꿈한 이후 첫 호부터 보그는 상류층 여성들을 타깃으로 한 패션지를 만들어 나갔다. 이후 1, 2차 세계대전, 대공황이라는 혼란 속에서도 위기를 기회로 삼으며 오히려 판매량을 늘리는 등 영리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백 년 넘게 그 자리를 굳건하게 지키고 있다.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1988년부터 현재까지 보그는 패션계의 교황인 안나 윈투어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우리에겐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의 실제 주인공으로 유명한 그녀는 영화와 같이 매우 까다롭고 무섭기로 유명하다. 몇몇 일화들을 살펴보자면, 안나 윈투어는 일에 방해가 될까, 자신의 임신 소식을 알리지 않았으며 파리 컬렉션에 참석하기 위해 유도분만으로 아이를 낳았다고 한다. 그녀가 자기관리를 위해 매일같이 5시에 기상하여 10시에 취침하고, 모든 파티에 20분 이상 머무르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안나 윈투어가 얼마나 독한 사람인지 감이 잡히는가? 하지만 그녀의 능력과 경력을 살펴보면, 그녀의 고약한 성격도 절로 납득이 간다. 고졸 출신의 영국인인 그녀는 미국 보그의 편집장이 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20년이 넘는 기간 동안 미국 보그를 단 한 번도 패션지 1위 자리에서 내려오거나 내려올 위험에 처하게도 하지 않았다. 런던-밀라노-파리-뉴욕이었던 4대 컬렉션에서 뉴욕 컬렉션이 다른 도시의 컬렉션을 베낀다는 이야기가 나오자 그녀는 단숨에 4대 컬렉션의 순서를 뉴욕-런던-밀라노-파리 순으로 바꾸는 등 보그뿐만 아니라 미국을 패션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이외에도 지금은 흔히 볼 수 있는 전문 모델이 아닌 연예인을 표지에 싣는 것을 처음으로 추진한 인물이기도 하다. 이렇듯 그녀는 한발 앞서야 하는 패션계를 한 발 더 앞서 이끈 전설적인 인물이다. 안나 윈투어가 패션계에 어떠한 영향력을 미치는지는 월스트리트저널이 작성한 한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을 것 같다. “스티븐 스필버그의 축복 없이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 수 있고, 빌 게이츠의 축복 없이 실리콘밸리에서 소프트웨어를 출시할 수도 있지만, 안나 윈투어의 축복 없이 패션계에서 성공하는 건 불가능하다.”

Met Gala

매년 5월 첫째 주 월요일, 전 세계의 내로라하는 셀럽들은 ‘멧 갈라’에 참석하기 위해 뉴욕으로 모인다. 멧 갈라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 의상 연구소의 자금 마련과 전시회 개막을 기념하기 위한 자선모금 행사로 1948년부터 시작되었다. 1975년부터 보그가 참여하기 시작하였고, 이후 1995년부터 안나 윈투어가 기획, 게스트 선정, 자리 배치, 테마 선정 등 총괄을 맡게 되었다. 그녀의 지론인 “아무나 참석할 수 없고, 아무나 초대하지 않는다.”에 따라 이전과는 다르게 보그의 초대를 받은 각 분야의 유명 인사들만 참여할 수 있게 되었으며, 전 세계의 엄청난 이목을 받으며 패션계의 최대 행사로 자리 잡게 되었다. 멧 갈라는 매년 정해지는 테마에 따라 셀럽들이 다양한 하이엔드 브랜드와 협업하여 테마에 맞는 옷을 입고 온다.

2022년 멧 갈라의 주제는 ‘In America: An anthology of fashion’, ‘미국; 패션의 시집’이고, 드레스 코드는 ‘Gilded Glamour’, ‘도금 시대의 화려함’이었다. 도금 시대는 급속한 산업화와 공업화가 진행된 1870년부터 1900년까지의 미국 경제의 대호황기를 말한다. 우리에겐 가십걸의 주인공으로 알려진 블레이크 라이블리의 의상은 최고의 의상으로 뽑히기도 하였다. 블레이크는 베르사체와 협업하여 자유의 여신상에서 영감을 받은 드레스를 착용하였는데, 원래 자유의 여신상은 구리색이었으나 산화되며 현재의 모습인 청동색이 되었다는 점에 착안하였다. 그녀는 구리색의 드레스를 입고 등장하였고, 이후 드레스를 벗겨내는 퍼포먼스를 통해 청동색 부분을 드러냈다. 드레스의 아래쪽은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을 형상화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대부분 주제 그대로를 아름다운 의상으로 승화시켰으나, 주제를 재해석한 의상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도 있었다. ‘베놈’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리즈 아메드는 19세기 이민 노동자들을 기리는 의미에서 남색 노동복을 연상케 하는 의상을 입고 등장하였다. 그는 미국의 화려한 성장 뒤에는 이민 노동자들의 헌신이 있었고, 우리는 이를 기억해야 한다며 이민자들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를 담아 의상을 선택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깊은 뜻을 멧 갈라를 통해 널리 알린 그는 화려하지 않은 의상이었지만, 많은 이들에게 찬사를 받았다.

<VOGUE>의 혁신

보그는 우아한 백조처럼 굳건히 패션지 1위를 고고하게 지켜나가고 있으나, 그 아래에서는 쉴 새 없이 혁신을 위한 발길질을 하고 있다. 먼저, 단순히 종이 잡지와 웹사이트 운영에 그치지 않고 보그 비디오 채널, 유튜브 채널, 팟캐스트, 보그 앱, 보그피디아 등 다양한 매체로 ‘보그’를 선보이고 있다. 특히 보그의 유튜브 채널은 ‘ELLE’보다 5배 이상 많은 구독자를 보유하고 있으며 다양한 분야의 이야기를 보그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묶어낸다. Vogue Living으로 셀럽들의 집과 인테리어를 공유하고, Beauty Secrets, Getting Ready With Vogue 등의 콘텐츠로 뷰티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이외에도 Diary of a Model, Hairdos 등 구독자들의 흥미를 이끌 다양한 주제의 영상을 제공한다.

작년에는 27살이라는 어린 나이의 인플루언서 마가렛 장을 보그 차이나의 편집장으로 깜짝 발탁하는 일이 있었다. 마가렛 장은 보그 130년 역사상 가장 어린 편집장이며 에디터로서의 경험이 전무하다는 점에서 그녀의 편집장 발탁은 파격적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16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패션 블로거로서 대성공을 거두었다. 그리고 이에 그치지 않고 스타일리스트, 모델, 영화감독, 포토그래퍼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해 왔고 무엇보다도 100만 명이 넘는 팔로워를 보유한 인플루언서였다. “뛰어나고 다채로운 콘텐츠를 최대한 활용할 수 있도록 조직의 구조를 정의하는 것이 보그의 새로운 비전입니다.”라는 안나 윈투어의 말에 맞게 마가렛 장은 변화하는 시대와 새로운 세대를 겨냥하는 그야말로 혁신적인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외에도 레즈비언 커플을 표지에 실은 보그 코리아, 플러스 사이즈 모델을 표지 모델로 한 보그 러시아 등 보그는 끊임없이 ‘위험을 감수하고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있다.

흔들리는 왕위?

보그의 꾸준한 노력과는 별개로, 현재 잡지라는 매체 자체의 위상은 나날이 떨어지고 있다. 이는 보그뿐만 아니라 패션지 전체가 큰 변화 앞에서 겪게 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제는 사람들은 더 이상 서점에 가지도, 잡지를 찾지도 않는다. 이전에는 패션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서는 패션지를 보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요즘은 인터넷, SNS 등의 발전으로 무겁고 귀찮은 종이 잡지 없이도 패션 관련 이야기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이로써 사람들은 자연스레 종이 잡지를 덜 보게 되고, 광고주들은 잡지에 광고를 싣지 않게 되었다. 잡지는 광고 수익으로 운영되는 체제인데, 광고가 중단되며 이제는 더 이상 수익을 내기 힘들어진 구조가 된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보그걸’이 폐간되기도 하였다. 2002년 3월에 창간된 보그걸은 ‘틴 보그’의 한국판으로 아기자기한 일러스트와 다양한 가십성 이야기들로 소녀들의 바이블로 불렸으나, 잡지 업계의 불황으로 2015년 12월 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

외부적 요인뿐 아니라, 내부의 다양한 논란들도 보그의 왕위를 흔들고 있다. 작년 미국판 보그 2월호의 표지에 등장한 카멀라 해리스 부통령의 사진에서 ‘화이트워싱’ 논란에 휩싸이기도 하였다. 화이트워싱이란 할리우드에서 배역의 인종과 상관없이 무조건 백인 배우만을 캐스팅하는 데에서 유래된 단어로 유색인종의 캐릭터나 인물을 매체에서는 백인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해리스 부통령은 최초의 비백인 부통령이며 자메이카 출신의 아버지와 인도 출신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인종차별을 해소할 인물로 촉망받고 있었으나 보그가 이러한 그녀의 피부색을 의도적으로 하얗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이에 보그 측은 그런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고 해명하였으나 이전에도 보그의 유색인종 차별에 관한 내부고발이 있었던 점 등을 이유로 사람들은 보그의 해명을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보그 코리아에서는 ‘보그체’가 문제가 되었다. ‘보그체’라는 말은 가독성이 떨어지고 영어를 섞어 사용하는 등의 보그식 말투를 비하하는 용어이다. 하이패션 잡지라는 특성상 영어로 된 패션 용어들이 불가피하게 쓰이는 경우는 있겠지만, 대체할 수 있는 한국 단어가 있음에도 굳이 영어를 사용하며 가독성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을 받는다. 예를 들어 ‘쿠튀르적인 느낌을 잘 드러내는 2022 S/S 머스트 해브 아이템이다!’와 같이 ‘동사와 어미 정도만 우리말을 사용’하는 것이 특징이다.

다양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그는 여전히 ‘보그’이다. 몇몇 논란에 무너질 보그가 아니며, 논란을 대하는 태도도 매우 적극적이다. 해리스 부통령 논란의 경우에도 안나 윈투어가 직접 나서서 보그의 의도를 설명하며 오해가 있던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하였다. 또 가끔은 의견을 굽히지 않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보그 코리아에서 2019년 1월 레즈비언 커플을 표지 모델로 내보냈다는 이유로 수많은 학부모 및 독자들의 항의 전화를 받았다. 이때 보그 코리아의 신광호 편집장은 항의하는 사람들을 ‘다양성의 범주’로 이해하였고, 같은 맥락에서 레즈비언인 커플을 싣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그는 “그녀들이 <보그 코리아> 표지에 등장한 이유는 인물의 매력, 미학적 기준, 도덕적 하자 없음이라는 선정 원칙에 부합해서이다.”라며 보그와 그의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VOGUE>

보그가 내뱉는 하나의 글과 사진 그리고 말은 단순히 전 세계의 패션을 넘어 정치, 경제, 문화, 사회 전반에 막강한 영향력을 미친다. 보그는 상업적인 가치를 넘어 ‘패션 바이블’이라는 하나의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이름 중 하나인 보그가 이때까지 해왔던 것처럼, 위기를 기회로 바꾸며 그들의 이름을 더욱 ‘보그답게’ 이어가는 과정을 기대해 본다.

박시윤 yoon1081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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