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 글은 릴레이 소설로, 와우의 모든 에디터와 디자이너가 참여하였습니다.
#1
금요일 오후 7시, 서대문구 연희동.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퇴근하기 전, 민재는 마지막으로 메일을 확인한다. 기다리고 있던 회신 대신 모르는 주소에서 온 '안녕하세요'라는 간결한 제목의 메일만이 유일하게 확인하지 않은 메일이다. 일어서서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로 열어본 메일함이었지만, 어느새 민재는 다시 책상에 앉아 있다. '그래 뭐, 다음 버스 타면 되지.' 그렇게 열어본 메일은 무뚝뚝한 제목에 비해 귀여운 내용을 가지고 있었다. 메일의 주인공은 잡지의 오랜 독자로, 학생 때부터 꾸준히 당사의 잡지를 좋아해 왔으며 이제는 시간이 흘러 자신도 한 권의 책을 출판한 작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흐뭇한 마음에 집에 가는 버스에서 바로 답장을 보냈고, 그렇게 둘은 여러 차례 메일을 주고받게 된다. 그러면서 알게 된 것은, 사실 그는 작년부터 상당히 주목받는, 심지어 큰 상을 받기도 한 작가라는 것이다. 개인적 신상이 밝혀지는 것을 꺼려 아직 누구와도 인터뷰를 진행한 적이 없었지만, 첫 인터뷰를 작아도 오랜 시간 좋아했던 잡지와 하고 싶다는 의사를 내비친다. 그렇게 속전속결로 성사된 인터뷰. 그는 자신의 책을 출판한 국내 대형 출판사에서 만나자고 한다.
약속 당일, 민재와 지윤은 로비의 대형 크리스마스 트리를 지나 리셉션에 도착한다. "A작가 인터뷰를 위해 왔는데요." 민재가 얘기한다. 하지만 그런 약속은 전달받은 적이 없다는 직원. 다행히도 무슨 일인지 알아봐 주겠다며 회사 내의 누군가와 통화를 한다. 길지 않은 통화임에도 불구하고, 점점 직원의 표정이 안 좋아지는 것이 보인다. 통화를 마친 뒤, 다시 웃으며 민재와 지윤을 옆에 통창 회의실로 안내한다.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시면 도와드릴게요." 그렇게 10분쯤 지났을 때, 갑자기 요원처럼 보이는 인물 넷이 들어온다. "함께 가주셔야겠습니다. 조용히요.“
#2
선택의 여지가 없음을 느낀 민재와 지윤은 요원들의 안내에 따라 이동한다. 눈에 띄지 않는 임원진 전용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검은 양복의 요원 한 명은 가장 높은 층인 31층을 재빠르게 누른다. 하지만 민재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 엘리베이터는 내려가고 있다는 것을. 그렇게 어딘지 모를 층에 도달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렸을 때, 민재와 지윤의 눈에 닿은 풍경은 이내 그들의 눈동자를 거세게 흔들리게 만들었다. 이들의 감정은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는 듯 무감각한 표정으로 자신을 K라고 소개한 남성은 가보라는 건조한 한마디로 요원들을 돌려보낸다. 민재와 지윤에게 자신의 명함을 건네는 K. 명함은 K가 이 출판사의 대표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K는 민재와 지윤에게 자리에 앉으라는 제스쳐를 보인다.
감정 따윈 없어 보이는 공허하고 푸른 눈동자, 주름 하나 없는 네이비색 수트, 깔끔하게 넘긴 포마드 헤어. 민재와 지윤이 일하는 잡지사의 편집실과 소름 돋을 만큼 똑같이 재현된 이 공간에, K는 너무나도 이질적인 존재다. 민재는 이곳이 당연하게 K의 공간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곧 K는 단조로운 목소리로 민재에게 말을 건넨다. “A는 왜 이런 공간을 만들었을까, 왜 당신을 그토록 만나고 싶어 했을까, 그게 늘 궁금했습니다.” 이윽고 이어진 K의 말은 한마디 한마디가 충격적이다. 대강 K의 말은 이렇다. A는 석 달 전에 자살했다는 것, A의 책 제목과 잡지사는 큰 연관이 있다는 것, 특히 민재가 썼던 한 기사에 관해 A가 입버릇처럼 떠들어댔다는 것, 그래서 K는 A가 죽은 이유를 찾기 위해 A의 행적을 밟던 중, 그의 이메일함 속 임시저장 메일을 하나 발견했다는 것이다. 그 메일이 바로 민재가 금요일에 받은 메일이고, 임시 저장된 날짜는 A가 죽은 바로 그날이라고 한다.
#3
“잠깐, A가 죽었다고요?” 민재는 K에게 되묻는다. K는 대답 대신 초점이 살짝 엇나간 눈으로 민재와 지윤 사이 어딘가를 응시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민재와 지윤은 황당한 눈빛으로 시선을 교환한다. 지윤은 이상하다는 듯 K에게 조심스럽게, “A가 민재 메일 주소로 남긴 마지막 메시지가 그때 금요일이라면, 민재가 이후에 메일을 주고받은 사람은 누구죠?”라고 따진다. 민재는 땀이 스미는 손을 움켜쥐고 K로부터 한발 물러선다. 지윤의 말을 들은 K는 당황한 기색으로 눈동자를 굴린다. 그리고는, “… 죄송하게 됐습니다. 그건 A인 척 제가 쓴 말들입니다.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거짓인지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저는 A가 지나온 생활을 토대로 메일을 이어갔을 뿐입니다.” 말한다. 한없이 건조했던 K의 목소리에 이슬에 맺힌 듯 호소하는 그의 말에 민재와 지윤의 표정은 한없이 얼어붙는다. “당신, 지금 무슨 일을 벌인 건지나 알아? 이건 기만이라고.” 언짢은 표정으로 노여워하는 지윤과 무표정의 K. 그 사이에 미간을 찡그리고 손가락으로 턱을 건드리며 생각에 잠긴 민재. 몇십 초 동안 흐르는 정적. 민재는 A와의 첫 메일 속에서 보았던 의심쩍은 문장을 떠올린다. 민재가 속삭이는 혼잣말은 기분 나쁜 정적을 더욱 끈적이게 한다.
“검은 개미는 더 이상 땅 위를 기어 다니지 않습니다… 그리고는 바다가 뒤집힐 겁니다……”
민재는 K에게 묻는다. “혹시 여기가 저희 편집실 공간과 모든 것이 같을까요?” 이에 K는, “예… A는 두 분이 일하시는 잡지사의 광적인 독자였습니다. A의 죽음을 밝히려면 모든 게 같아야만 하겠지요.” K의 말이 끝나자마자 민재는 똑같이 재현된 자신의 책상으로 다가간다. 그리고는 두 번째 책상 서랍에서 A와의 인터뷰를 위해 민재가 조사해둔 A의 저작 리스트를 꺼내 확인한 뒤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나열한다.
“암갈색 돌고래와 암초. 흰색 하마와 붉은색 악어. 노랑갈기 사자. 긴 팔 재색 원숭이가 검은 숲을 빠져나온 시간. 개와 고양이….
A는 저에게 다음 저작에 붙을 제목이 '검은 개미의 성'이라고 했어요. 이건… ”
그 순간, 민재의 책상 틈 사이로부터 검은 개미들이 기어 나온다. “으악!!” 세 사람은 패닉에 빠진다. 지윤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개미를 자세히 본다. “잠깐, 이거 로봇이야!”
#4
지윤은 개미 로봇을 집어 들곤 말한다. “카메라가 달려있어.” 지윤은 그들의 진짜 사무실을 떠올린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부터 회사에 개미가 나왔지... 당신들 이런 로봇으로 우리 사무실을 감시한 건가요?” 이에 민재가 빈정거리면서 덧붙여 말한다. “이런 대형출판사에서 로봇을 가지고 하는 짓이 영세 잡지사 흉내라니, 정말 대단하네요” K는 언성을 높이며 항변한다. “이 공간을 만든 건 A입니다!” 그런 K와 대조되듯 지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가구랑 인테리어 정도는 누구나 따라 할 수 있다고 쳐요. 하지만…” 지윤이 자신의 자리처럼 보이는 곳에 있는 회사의 마스코트가 그려진 볼펜을 집어 들며 말한다. “이건 제가 디자인부터 발주까지 직접 한 볼펜이에요. 지난 하계 워크숍에서 손수 나눠줬다고요. 이게 왜 여기에 있죠?” “아까부터 말했지만, 이 공간은 A가 만들었어요.”
“그걸 묻고 있지 않아요. 설마 A가, 저희 기자 중에 있나요?”
“…….”
“볼펜은 딱 12개만 만들었어요. 한 사람당 하나씩 가지게요.”
지윤은 가방 속에서 똑같은 볼펜을 꺼내 마치 뭔가를 증명하듯 K와 민재에게 보여준다. 이에 민재도 가방에서 서둘러 볼펜을 꺼낸다. 똑같은 디자인의 볼펜, 틀림없이 워크숍에서 그들이 나눠 가진 그 볼펜이다. 민재가 지윤에게 속삭이며 묻는다. “우리 중 누군가가, A에게 볼펜을 준 걸까?” “사람이 기껏 만든 걸 팔아버린 놈이 있을 수 있지.” 지윤이 냉소적으로 대답한다. 어찌 됐든 두 사람은 같은 생각에 사로잡혀 있다. 이 가짜 사무실에 있는 볼펜의 주인을 찾아야 한다는 것.
#5
"방법은 이것밖에 없어." 민재는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무언가를 찾아보기 시작한다. 구글 이미지 검색이라는 최신 기능은 예상보다 쉽게 그들을 새로운 길로 안내했다. 비록 그 길이 진실로 향하는 길일지, 더 미궁 속에 빠지는 길일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지만. "이것 봐." 구글이 가리키고 있는 건 'blackant'라는 아이디로 작성된 한 블로그 포스팅에 삽입된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사진과 함께 쓰인 글에 시선이 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모방하는 건 쉽다.
단 한 줄의 문장이었다. 블로그에 게시된 다른 글들을 차례로 읽던 민재와 지윤은 동시에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 블로그 속 기록된 모든 글이 민재와 지윤이 만들어 내고 있던 '그' 잡지를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왜일까, 단순한 잡지 아카이빙이라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잡지 자체보다는, 기자 한 명 한 명을 읽어내는 느낌이었다. 아직은 심증뿐이었기에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민재, 더 생각나는 건 없어?"
#6
"잡지보다는 우리 기자들을 분석한 글 같은데... 도대체 이게 무엇을 모방하려는 걸까?"
아무리 봐도 처음 본 게시글이 신경 쓰였던 민재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A의 사망 원인을 찾아낼 수 있는 주된 단서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민재가 단서에 대해 고민할 때, 지윤은 앞서 K가 말한 A에 관한 내용 중 두 가지에 주목했다.
하나는 A의 이제껏 제목들이 출판사와 관련있는 점, 또 다른 하나는 A가 민재의 기사 하나를 지속적으로 언급했다는 점이었다.
"A가 언급했던 민재의 기사가 뭐였나요?" 지윤은 K에게 물었다.
"나르키소스와 에코의 이야기에 대한 기사였어요." K가 답했다.
"그 기사라면...?"
"나르키소스를 사랑했기에 모방할 수밖에 없었던 에코와, 자신을 따라 하던 귀찮은 에코를 내쳐냈을 때 자기가 완전하다고 여기게 된 나르키소스의 오만함에 대해 쓴 글이었어." 지윤의 질문을 민재가 가로채듯 답했다.
"네, 맞아요. A는 나르키소스가 자신을 모방하던 에코를 통해 본 모습을 파악할 수 있었음에도 호수에 비친 자신의 완벽함'만'을 사랑했고, 완전한 자신을 보지 못한 오만함에 죽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다녔습니다." 의미심장한 표정을 한 채 K가 질문에 대한 답을 마무리했다.
#7
"잠깐, 오만함에 죽을 수밖에 없다고?" 민재는 약간 커진 목소리로 질문한다. "네? 네... A는 늘 그렇게 말했죠. 왜 그러시죠?" K는 민재의 커진 목소리에 당황한 듯 대답한다. “아니 그게 무슨, 내 기사는 나르키소스의 오만함에 대해 지적하고 있긴 하지만, 궁극적으론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본 나르시시즘의 이점에 대해 이야기한 글인데…" 민재는 잡지의 광적인 팬이라던 A가 이조차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이때 지윤이 약간은 지친 듯한, 짜증 난 목소리로 말한다. "그래서 우린 언제 갈 수 있죠?" 어느덧 시간은 열 시를 훌쩍 넘기고 있었다. "하, 뭐라도 좀 찾을 거라 생각했는데..." K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혼잣말을 했다. "우선은 돌아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혹시 생각나는 게 있다면 아까 드린 명함의 번호로 연락해 주세요. 꼭이요." 갑자기 손을 덥석 잡아 오는 K 때문에 민재와 지윤은 당황했지만, 그의 간절함을 느낄 수 있었다. "네? 아, 네 그러죠."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한 후, 요원들의 감시인지 보호인지 모를 동행과 함께 건물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지윤은 기지개를 키며 말한다. "민재야 이게 무슨 일이냐... 어후, 집에 가자." "자살, 개미, 볼펜, 모방, 나르키소스... 자살, 개미, 볼펜, 모방, 나르키소스..." 민재는 지윤의 말도 듣지 못하고 중얼거리고 있다. 그리곤 무언가에 홀린 듯, 곧장 택시를 타고 잡지사로 향한다. 그리고 자신의 자리, 위에서 4번째 칸, 열쇠로 굳게 잠긴 서랍을 연다. 그리곤 무언가를 꺼내 든다.
"설마..."
#8
꺼내 든 것은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검은색 서류철.
“칠흑같이 어두운 성에서 검은 개미는 눈에 띄지 않는 법이지.” 민재가 서류철 사이사이를 뒤적거리다 한 장의 봉투를 집어 들고는 들릴 듯 말 듯 한 혼잣말로 작게 중얼거린다.
“사직서? 누구 퇴사했어?” 민재가 집어 든 봉투를 보고 지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정말 기억 안 나? 우리 잡지사 전 편집장.”
“5년 전쯤이었나…, 이 사직서 한 장만 달랑 남기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는데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유를 몰라. 그 후로는 행방이 묘연해. 일절 연락도 되지 않고.” 민재가 무미건조하게 답했다.
“아, 기억났다. 그날이 20주년 기념 특별 호 출간을 앞둔 마지막 회의일이었는데 편집장이 갑자기 연락 두절되는 바람에 기자들이 수습하느라 아주 골머리를 썩였었지… 다들 추가 근무에, 야근에 난리도 아니었다고.” 지윤이 투덜거렸다. “그런데 그게 왜? 전 편집장의 갑작스러운 퇴사와 A의 죽음 사이에 무슨 연관성이 있어?” 당최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지윤이 되묻는다.
#9
“음, 아직 확실한 건 아니야. 그전에 이 A라는 작가에 대해서 더 조사해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좋아, 일단 인터넷부터 뒤져보자.”
자료를 붙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민재와 지윤의 의문은 깊어져만 갔다. 작가 A는 신비주의를 고수하기라도 한 것인지 저작 리스트와 수상 경력 외의 정보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대면으로 진행된 시상식에서도 대리인을 내세워 참석했던 것이다.
“뭐야! 찾을 수 있는 정보가 전혀 없잖아...”
“정보도 없을뿐더러 K의 말에 의하면 A는 석 달 전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데, 그에 대한 기사나 게시물을 하나도 찾아볼 수가 없어.”
“뭐라고? 하긴, 그러니까 민재 네가 아무런 이상함도 느끼지 못하고 연락을 주고받은 거겠지?”
“그래, 그리고 이것 좀 봐.” 민재는 지윤의 말에 긍정하며 휴대전화 화면을 들이밀었다.
민재가 보여준 화면에는 A 작가의 작품들이 출판 연도에 맞춰 정렬되어 있었다. 이게 뭐 어쨌다고? 하고 되묻는 지윤에게 민재는 리스트의 가장 위쪽에 있는 저서를 가리키며 말을 이어갔다.
“이 『암갈색 돌고래와 암초』는 A의 데뷔작이야. 그런데 출간된 날짜를 한번 봐봐.”
“이 날짜는... 전 편집장의 사표에 적혀있는 날짜와 정확히 똑같잖아?”
“맞아. 그리고 이 ‘blackant’ 블로그의 첫 게시물 작성일도 5년 전 그날과 같은 날이지.”
“... 그렇다면 혹시 전 편집장이?”
#10
5년 전 편집장이 이 모든 사건의 원인이자, 이제는 이 세상에서 흔적을 찾을 수 없다니. 순간 몰려온 적막은 이 말도 안 되는 명제를 증명하는 듯 대화 대신 둘 사이의 공백을 채운다. 안타깝지만 엮여 봐야 좋을 것 없던 작가의 자살 사건은 순식간에 ‘우리의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월요일 아침, 지윤과 민재는 제작한 볼펜의 실사용 후기 수집 및 다음 굿즈 제작이라는 얼토당토않은 핑계로 잡지사의 모두를 한 자리에 불러내는 데에 성공한다. 모두가 볼펜을 꺼내 자리 앞에 올려 둘 때, 빈손으로 사무실 언저리를 두리번대는 인원이 보인다. “어라, 분명 저번 주 반차 쓰고 조퇴하기 전에 여기 두고 갔던 것 같은데…” 머쓱하게 웃는 그를 보며 지윤은 고개를 절레 젓고 만다. “그거 아마 못 찾을걸요.”
그동안의 이야기를 공유하자, 예상과는 달리 기자들은 지루한 마감 일상 대신 찾아온 흥미진진한 미스테리에 눈을 반짝였다. 똑같다는 그 사무실에 놀러 가 보자느니, 개미 로봇으로 특허를 내자느니 하는 이야기와 함께 조금씩 입이 모이기 시작한다. 입사 이후 임기 동안 단 한 번의 에세이조차 싣지 않았던 사람이었기에 멤버들 사이에서 추측이 오가는 것은 자연스런 흐름이었다. ‘A는 사실 이중생활을 즐겼을 것이다’, ‘아니다, 그에겐 그럴 여유가 없어 보였다.’라며 의견이 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무렵, 타이밍 좋게 K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다. 일의 진전을 묻는 그에게 기자들은 대답 없이 역으로 A의 신상에 대한 질문을 퍼붓는다.
- ... 드릴 수 있는 말이 없어 아쉽군요. 얼굴 없는 작가답게 우리는 초판본을 받아볼 주소, 가상 계좌 몇 개를 제외하곤 A에 대해 그 어느 정보도 알지 못했어요. 심지어는 목소리도요. 요새는 각자의 사정으로 익명 투고를 요청하는 작가들이 많으니 그러려니 했죠. (그 정도의 글을 써낸 사람은 없었지만요, K는 약간 거만한 듯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검은 개미의 성』 일정 관련으로 메일을 주고받았는데, 그답지 않게 답장이 없어 실례를 무릅쓰고 자택에 찾아갔더니 아무것도 없는 빈집이더군요. 이후 집주인에게 거기 살던 양반이 얼마 전 죽었다고 전해 듣고는, 그의 죽음을 이해하기 위해 당신들에게 연락했던 겁니다. 그의 노트북에서 유작 몇 개와 당신에게 보내려던 메일을 확인할 수 있었고요.
“그래서 자살의 증거가 과연 어디에 있다는 건데요?” 통화가 연결되는 중인 핸드폰을 가운데 두고, 모여 앉은 사이 누군가가 참지 못하고 그의 말을 끊는다.
- 글쎄요, 물론 또 다른 쇼일 순 있겠지만, 적어도 우리가 아는 ‘작가 A’는 석 달 전 그날 죽었습니다. 혹은 적어도 그렇게 보이고 싶어 했거나.
스피커폰을 거쳤음에도, 사무실에 울리는 K의 목소리에서는 이상하리만치 깔끔한 냉소가 배어 있다. 그와 동시에, 실마리를 잡기 위해 Ctrl + F를 연타하던 한 기자가 단톡방에 ‘blackant’ 블로그 링크를 전송한다. [ 20XX. X. XX / 개미의 성은 개미가 지은 것이 아니라 결국 개미들로 이루어진 것, 물결치며 박동하는 검은색 응집력과 공동체 의식 틈새에서 개성은 의미를 잃는다. 더 이상 구별이 불가능할 정도로 동일시된 객체들에서 자아를 판별해낼 수 있을까? 모방이 유의미한 것은 나와 명확히 구별되는 타자가 존재할 때뿐이다. 검은 개미의 성에서 무한하게 반복되는 검은색은 더 이상 창조의 어머니가 아니다. 파괴적인 자가복제는 창작을 표방하면서 작가를 죽음으로 서서히 밀어 넣는다. ] 술 마시고 썼나 싶은 글과 함께 포스팅된 이미지는… 워드프로세서 화면을 개미처럼 가득 채운 검은 글자들, 당시 발간된 호의 원고 사진이다.
#11
민재는 결국 다음 날 다시 K를 찾아가 대면했다. 그리곤 확신에 찬 말투로 K에게 말했다.
“K. 이 글을 쓴 게 당신이죠? 처음 출판사를 찾아가 복제된 공간에 들어선 순간부터 지금까지 당신은 우리가 모든 걸 알아 내주길 바라는 사람처럼 한발 물러서서 관음했어요.”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가 뭐죠?”
“글 쓰는 사람의 직감이죠. A를 타인처럼 말하고 있지만 사실 계속해서 애매한 태도를 취하고 있잖아요. 결정적으로 당신은 카메라가 달린 검은 개미 로봇을 우리에게 들켰을 때도 큰 동요가 없었어요.”
침묵이 공간을 건조하게 말려 오그라들 것만 같았다. 이윽고 K가 입을 뗐다.
#12
“모방이 아니었어.”
“뭐라고요?”
“모방이 아닌 메아리였어.”
상기된 얼굴과 가팔라진 호흡. 살집 하나 없는 그에겐 어울리지 않는 목주름을 따라 연신 땀이 흘러내렸다. 애써 유지하던 침착함을 포기한 듯, 상투적인 말만을 내뱉던 K의 입술에서 이전과는 다른 것들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나의 메아리(echo)는 결코 완전함을 추구하지 않았어. 자연스러운 공기의 흐름을 타고 풀과 나무, 벌레, 햇살에 부딪혀 잘리고 파편화된 멜로디였어. 아름다운 소리! 민재 너는 알고 있었잖아.”
“ … ”
“그래서 내가 잠적한 뒤에 나르키소스의 오만함과 에코의 억울함에 관한 글을 쓴 거잖아. 맞지?”
텅 비었던 K의 눈동자는 어느새 애원과 두려움, 증오로 가득 찼다.
“그런데 너희 기자라는 놈들은 왜 다 그 모양인 거야? 이 검은 개미들! 너희가 멀뚱멀뚱 고민했던 펜이 내가 복제한 13번째라는 것도 몰랐지? 글이든 뭐든 죄다 불협화음이 따로 없어!”
사건은 이러했다. 5년 전 K가 작성한 에세이가 기성 작가의 것을 베꼈다는 의혹을 받으며 문단에서 화제가 되자, 잡지사는 그를 권고사직 처리했다. 억울했던 K는 이번에는 정말로 모방을 하여 문학계를 조롱하기로 다짐했고, 여러 인물과 서사, 문장 표현을 철저히 짜깁기한 소설을 선보였다. 이로써 큰 상을 받게 된 K는 자신을 외면했던 잡지사와 수상 인터뷰를 함으로써 복수를 완성하고자 했다. 한편, 아이디 ‘blackant'로 작성된 블로그는 잡지사 기자 한명 한명이 표절을 했다는 주장하기 위한 일종의 보고서로서 작성된 것이었으나, 후일 그의 착란 증세를 파악하기 위해서만 사용되었다.
“K… 미안하지만 5년 전에 쓴 당신의 에세이는 기억도 나지 않아요. 당시 동료 기자들의 연락을 받지 않고 잠적한 건 당신이잖아요. 그리고 최근에 상을 받은 당신의 소설은 그 누구도 무언가의 모방이라 생각하지 않아요. 저희 잡지사 직원들도 큰 감명을 받았고요.”
“입 다물어. 개미 눈에는 하늘이 보이지 않는 법이지. 땅이나 제대로 짚으란 말이야!”
K는 얼굴을 가리고 울기 시작했다. 부모의 모방이라는 이유로 뜯어고친 이목구비와 렌즈를 껴 바꾼 눈동자의 색. 일그러진 표정과 눈물만은 자신의 것이라는 안도감 때문이었을까, 처음에는 흐느끼다가 이윽고 엉엉 소리쳤다. 복수의 허망함 때문인지, 그저 미쳐버린 것인지, 울음의 이유는 K 자신도 명확히 알 수 없었다.
박한비 외 와우 기자 일동 kkkanbi@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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