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오상(b.1974)은 홍대 조소과 3학년 때 사진으로 만든 조각을 선보임과 동시에 2000년대 초 동시대 미술계의 스타로 부상했다. 이를 두고 모 평론가는 ‘누구보다도 빠르고, 세련되고, 완벽한 데뷔’라 평한다. 권오상의 독특한 작품세계는 사진과 조각, 평면과 입체의 경계를 다루고 있으며, 현대사회에서 예술의 의미와 조각가로서의 정체성을 끝없이 탐구한 결과물이다. ‘사진조각’이라 일컬어지는 <데오도란트 타입>을 선보인 이후 <더 플랫>, <더 스컬프처>, <매스패턴스>, <뉴 스트럭쳐>, <릴리프> 시리즈 등을 꾸준히 발표하며 자신만의 조각 세계를 확장하며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를 누볐고, 유명 브랜드 및 세계적인 스타들과 협업을 진행했다.
지난 1월 18일과 19일, 광명시 소재 작업실에서 권오상은 편집위원 민태홍과 함께 자신의 학창시절부터 25여 년에 걸친 작품세계와 근황, 미술계를 바라보는 시각과 앞으로의 행보 등에 관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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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 예술에 관심을 가지셨나요? 특히 조각을 택한 이유가 있을까요?
보통 미대생들이 미술학원에서 잘한다고 칭찬을 들으며 예중 예고 생각하게 되는데, 저는 미술잡지를 통해 미술에 흥미를 붙였어요. 중학생 때 ‘계간미술(현 월간미술)’을 구독해서 도판과 인터뷰 위주로 봤는데, 거기 나오는 류인이나 김영원 같은 조각가들이 마냥 멋지고 대단해 보였죠. 로뎅이나 부르델 같은 거장들도 좋아했습니다. 중학생 때 친구들이 밴드나 가수에 빠져있을 때, 저는 현대미술가들을 록스타로 여겼어요. 예고에 진학한 뒤에는 자연스레 ‘나는 작가다’라는 자의식이 생겼어요. 이미 작가가 된 줄 알고 작업으로 무언가 해보겠다는 의혹으로 충만했던 시절이었죠. 디자인, 동양화, 서양화, 조각 등 다양하게 시도하다가 결국 조각을 택하게 되었습니다.
베토벤 두상을 흙으로 똑같이 카피해야 하는 모각 수업에서는 석고상의 얼굴에 완전히 밀착하여 구경하게 됩니다. 이때 코에서 시작해서 눈으로 이어지는 공기의 흐름에 매료되었어요. 눈의 형태나 코의 형태가 아닌, 이들 사이에 공간감에 집중한 거죠. 가령, 헨리 무어의 조각 중간에 구멍이 뚫려 있잖아요? 특정한 조각에서 그 형태만 보는 게 아니라 이런 마이너스 형태, 즉 조각 외에 공간에서의 아름다움도 느낄 수 있어요. 이외에도 점토로 조각을 모델링하는 수업이 아주 만족스러울 정도로 재밌었고, 여러 사물이 지니는 볼륨에 흥미를 갖다 보니 홍대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학과 분위기는 어땠나요? 홍대 조소과 94학번에 유독 큰 작가로 성장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조소과 커리큘럼 자체는 아카데믹했지만 실제 수업에서 커리큘럼을 따르진 않았어요. 당시 왕성한 작가 활동을 하던 작가들이 교수로 있어서 수업이 굉장히 활기찼고, 교수들이 학생을 끌고 가는 태도도 열정적이었어요. 이수홍, 이형우, 홍성두와 같이 유학을 다녀온 작가들은 어떻게 하면 새롭고 아방가르드한 조각을 만들 수 있을지 학생들과 고민했어요. 또, 제가 입학한 94년도가 마침 홍대 앞 인디씬이 서서히 부흥하며 사회적으로 X세대라는 말이 나올 때여서 학내 분위기도 많이 바뀌었어요. 93학번까진 열심히 작업하는 선배들 중 상당수가 운동권이었는데, 94학번부터는 운동권이 사라진 채 새로운 분위기가 지속된 거죠. 이형구, 구동희, 백현진과 같은 훌륭한 동기들을 많이 만났어요. 1학년 때 다들 술에 취해 형구 형 집에 가서 자곤 했죠. 이형구 작가와는 5~6년 작업실을 함께 썼고, 같이 산 적도 있고, 한때 아라리오 전속 작가로도 같이 있었어요. 돌이켜보면 좋은 선생과 동료들 덕에 즐겁게 학교에 다닌 거 같아요.
좋은 분위기와는 별개로 조소과 전반에 조각가, 미술가로서 패배감이 있기도 했어요. 조소과를 나와 밥 벌어 먹고살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 많은 시기였습니다. 학교 다닐 당시 이불, 최정화 빼고 아무도 없었거든요. 데뷔를 일찍 해서 작가 활동하는 와중에 열심히 작업하는 후배들에게 선배들이 작업은 권오상이나 하는 거지 너희들이 무슨 작업을 하려고 그러냐는 식의 말들을 종종 했대요. 저도 초기에는 미술학원 아르바이트를 하며 작업을 했는데, 절 고용한 선배들에게 이제 정신 차리라는 말들을 많이 들었고요. 순수 미술 계통의 패배감은 전 세계 어디에나 있는 거 같아요. 세계 최고의 대학들도 예외는 아니더라고요. 독일 뒤셀도르프를 가보니 졸업생들 대부분이 아르바이트는 필수이고 작가 살아가는 것에 회의감이 있었어요. 미국 예일에서도 학생들이 입학 직후는 분위기가 좋은데 마지막 학기에는 울적하다고 해요. 예일 나온다고 다 생존 가능한 작가가 되는 건 아니니까요.
대학생 때 이미 작가님의 평생 과업인 사진조각을 선보이셨습니다. 당시 주변 반응은 어땠나요?
새내기 때 조소과 사진 동아리에 가입해서 학교에 카메라 가방만 메고 다녔어요. 사진 찍는 게 자연스러워질 무렵에 전통 조각 대신 사진 인화지 이용한 작품을 만들고 싶더라고요. 조각이라는 장르가 너무나 좋아서, 내 방 안에서도 뚝딱 나올 수 조각을 만들고 싶었어요. 근데 나무, 대리석, 브론즈 등 전통 조각을 만들려면 장비를 풀세트를 착용한 채 오랜 시간 걸려 완성해야 하고 옮기기에 무거운 거예요. 그런 재료들이 건강에도 좋지 않고요. 전통 재료를 사용한 조각에 깊은 애정이 있지만, 이걸 내가 내 몸으로 만들고 싶지는 않았죠. 또, 홍대 조소과에서 매년 ‘야외 조각전’이라는 걸 했었는데, 커다란 작품들을 만들어 한 달 전시한 뒤에 전부 부숴서 버리는 풍경도 거슬렸어요.
그래서 2학년 때 조각의 입체와 사진의 평면을 연결시키는 작업을 시도했고, 3학년 1학기에 제대로 된 사진조각이 나왔어요. 당시 제 작업에 교수님들은 관심이 없었고, 친구들은 이상한 거 하니 재밌다는 정도의 반응이었어요. 새로운 발상의 작업들을 환영하는 학과 분위기였음에도 막상 새로운 작업이 나왔을 때 큰 반응은 없었던 거죠. 저는 이 새로운 조각을 가지고 어떤 역할을 해낼 수 있겠다는 느낌을 받아 1년 넘게 쭉 이어 갔는데, 실기실에서는 벌써 아직도 그거 하냐는 식의 지겹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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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곧바로 1999년 대안공간 루프에서 전시하신 뒤 승승장구하셨어요. 한국 동시대 미술 태동기에 핵심 작가로 계셨습니다.
당시 루프는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출신들이 운영하던 곳으로 유학파 출신이나 이동기 같이 이미 유명한 국내파 작가를 주로 전시하던 곳이었어요. 그런데 어느 날 조소과 선배 심승욱이 무작정 루프에 가서 조각 잘하는 우리를 전시해 준다면 너희에게 좋을 것이라고 해가며 전시를 따냈죠. 전 거기에서 선배들 작품 사진 찍어주다가 너도 고생하니 작품 내보라는 소리를 듣고 《진공포장전》의 막내로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루프의 세 번째 단체전이었는데 큐레이팅은 저희 담당이던 김현진 씨와 전시에 참여한 사람들끼리 했었고, 글은 나중에 김인선 씨가 써줬어요. 루프를 통해 데뷔하고 곧바로 아트선재, 성곡미술관 같이 유명한 기관에서 전시를 하며 미술계와 언론에 큰 관심을 받았습니다.
당시 전 세계 미술계는 뉴밀레니엄이라는 새로운 시대에 어떤 작가들이 등장할 것인가 궁금해했어요. 그래서 각 나라마다 그 나라 학교에 재학 중인 학생들을 데려다 대안공간, 갤러리, 미술관에서 전시를 구성했던 거죠. 특히 한국의 상황은 특수했어요. 한창 유학을 많이 가던 시대에 IMF가 터져 집에서 유학비를 보내주지 못해 불가피하게 귀국한 젊은 작가들과 저나 함진과 같이 대학 졸업도 안 한 어린 작가들이 시너지를 이루며 한국 미술계가 급격히 팽창했어요. 마치 끓어오르는 용광로 같았습니다. 아트선재, 쌈지, 루프와 같은 대안공간도 생겼고, 영국, 미국, 파리, 독일, 일본에서 배우고 돌아온 작가들이 합류하니 한국이 마치 전 세계 미술계의 축소판 같은 분위기를 풍겼어요. 마침 세계에서 아시아 미술이 주목받으며 2000년대 초반에 당시 20대 후반부터 30대 중반의 X세대 작가들이 한국 미술의 대표 주자로 국제 전시 투어에도 자주 참여하며 큰 주목을 받았어요. 이들 중 일부는 현재 더 큰 작가로 성장했고요.
이후 2001년 인사미술공간에서의 첫 개인전 《데오도란트 타입》을 통해 화려하게 데뷔하셨습니다. 작품의 판매도 이때 처음 이루어졌죠?
개인전 당시 김선정 아트선재센터 관장께서 작품을 사셨어요. 작가 인생 첫 판매였고, 미술계의 유력 인사가 제 작품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에 고무적이었죠. 지금도 여전히 큰 영향력을 행사하시지만, 2000년대 초중반 소위 대안공간의 시대에는 여러 대안공간의 포트폴리오가 아트선재의 포트폴리오가 되고, 아트선재의 젊은 작가 포트폴리오들이 국제 전시의 포트폴리오로 곧바로 이어지는 구조였거든요. 실제로 이후 제 작업을 해외에 많이 소개해주셨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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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전 후에 사진조각 시리즈의 이름이 된 ‘데오도란트 타입’에 관해 설명해주세요.
‘데오도란트’는 어지간한 유명 화장품 회사가 전부 제조할 만큼 세계적인 일상용품이지만, 겨드랑이 냄새가 잘 나지 않는 우리나라 사람들은 잘 사용하지 않죠. 당시 니베아에서 한국에 처음으로 대대적인 광고를 했는데, 땀이 많이 나는 동남아시아 모델들을 기용한 게 미스캐스팅이라고 생각했어요. 또, 데오도란트가 체취를 가려 다른 냄새로 바꿔주잖아요? 이렇게 조금씩 어긋나는 지점들이 혼재한 제 사진조각과 유사하다 느꼈어요. 그래서 ‘다게레오 타입’, ‘암브로 타입’과 같이 사진사에서 얘기하는 ‘타입’을 염두에 두고 ‘데오도란트’에 ‘타입’을 붙여 ‘데오도란트 타입’이라 명명했습니다. 미술사에 등재되어 하나의 용어로 쓰이려면 형식을 부여해야 하지 않을까 고민했었는데, 이렇게 지으면 적어도 사진 기술사에는 남지 않을까 생각했죠.
데오도란트 타입(이하 사진조각)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지나요?
초기 작업은 내부가 텅 비어있거나 알루미늄 스틱으로 연살 같은 형태를 만들어 그 위에 사진을 붙였고, 2001년 개인전 이후로는 폴리스티렌으로 내부가 차 있어요. 2001년 이후를 기준으로 설명해 드리면, 폴리스티렌을 깎아 어느 정도 형태를 잡습니다. 그리고 여기에 붙일 사진을 직접 촬영할지, 이미지 자료 검색을 통해 진행할지, 혼용할지 정해요. 그렇게 마련한 사진들을 작업실 내부에서 일차로 가공한 뒤에 모두 전문 인화 회사로 보내요. 와중에 폴리스트렌을 계속해서 깎고 붙이며, 인화된 사진이 작업실로 들어오면 그 위에 사진들을 붙여나갑니다. 마지막으로 내구성을 위한 플라스틱 코팅을 하면 완성이에요. 이 과정 중에 가장 큰 에너지가 들어가는 시점은 작업 초반에 형태를 구상하는 단계입니다.
초창기부터 전시 디스플레이와 이를 기록으로 남긴 사진 아카이브에 공을 많이 들이신 거 같아요.
회화과를 나오든 조소과를 나오든 전반적으로 설치미술이나 영상 작업이 유행했던 시기가 제 초기 작가 생활과 겹쳤어요. 조각가라고 데뷔한 사람이 거의 없었기에, 물어볼 사람 없이 제가 알아서 해야 했죠. 도면을 받고 그 공간에 맞게 작업을 진행하느라 작품의 높이가 천장의 높이에 좌우됐어요. 또, 명성이 없는 젊은 작가들은 작업을 사진으로 보여줄 때가 많았는데, 아무래도 설치 전경이 잘 나와야 다음 전시가 잡힐 확률이 커졌습니다. 다들 작품, 전시 사진을 35mm 중형 카메라로 찍을 때 저는 대형 카메라로 찍었습니다. 외국 전시 다닐 때도 큰 카메라를 매고 많이 다녔어요. 근데 작가 생활을 할수록 큰 전시들이 들어와 작품 제작에 더 집중하느라 디스플레이 후에 제가 사진을 찍을 만한 여력이 생기지 않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작가에게 맡기게 되는데 제가 찍은 사진과 차이가 있어요. 작품을 어느 포인트에서 보고 찍어야 좋은지는 작품을 만든 사람이 가장 잘 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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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각의 포즈에 관해 얘기해보겠습니다. 초기에는 기이하게 추상적인 형태였다가, 2000년대 중반부터 구상적으로 바뀝니다. 이유가 무엇인가요?
조각은 포즈가 중요하기에 무엇을 차용해 만들 것인가 고민이 되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초기에는 사진의 속성과 관련된 작업이 많아 차용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집착으로 구성된 440장의 가족사진>(1998-1999)과 같이 사진의 포맷에 관한 작업, <쌍둥이에 관한 540장의 진술서>(1999), <300장으로 구성된 축소의 강요>(2000) 등 사진의 축소, 확대 그리고 포토샵의 복사와 붙여넣기, 합성 등을 활용해 작업을 시도했죠. 그러다 보니 샴쌍둥이나 사람과 동물이 붙어 있는 형태와 같이 기괴한 형태가 나온 거 같아요.
2001년 개인전 이후로는 내부에 폴리스트렌이 들어가다 보니 더욱 다양한 포즈가 가능해졌어요. 당시 패션 잡지 광고들의 포즈를 가져왔죠. 구찌 광고의 자세를 변형한 <뒤엉킨 480장의 진술서>(2001)나, 디젤 광고에서 자세를 따온 <미스>(2003)가 대표적이에요. 그런데 이 광고의 자세들을 추적하다 보니 결국 예전에 조각이나 회화에서 시도된 포즈더라고요. 그래서 이후 작업에서는 로뎅이나 베르니니와 같은 거장들의 조각에서 자세를 가져왔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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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이후에는 사진조각이 다시 추상적으로 변하는데, 초기의 추상적인 조각과는 달리 더 조각적으로 느껴집니다.
2016년에 배우 유아인의 흉상 다섯 개를 제작한 적이 있어요. 지지체가 없어서 사진이 함몰되며 붙다 보니 불가피하게 추상화된 초기의 사진조각과 마티스의 연작 ‘Jeannette I-V’에서 착안한 작품들이었죠. 정교한 흉상에서 시작하여 눈코입이 제자리를 떠나는 흉상들을 통해 구상에서 추상이 되어가는 단계을 보여주고자 했습니다. 이 흐름을 이어받아 2020년부터 본격적으로 추상적인 사진조각을 제작해오고 있어요. 헨리 무어의 형태를 차용한 두상과 와상에서 시작하여, 최근에는 주로 헨리 무어의 영향을 받은 동유럽 조각들을 참고합니다. 대부분의 조각가와 달리 헨리 무어는 인체 구조를 완전히 무시한 인물 조각을 만들어내는데, 그 지점에서 다양한 사진을 붙일 여지가 생겨나요. 참고할 작품의 양과 종류도 굉장히 많고요. 그의 드로잉 중에 조각으로 구현되지 않은 것들을 가지고도 작업을 해보고 싶습니다. 또, 전 세계적으로 헨리 무어의 영향을 받은 조각가들이 많아서, 최근 집중하는 동유럽 조각가들의 작품과 같이 곁다리로 나온 이미지도 다양하게 제 작업에 활용할 수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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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특정 작품 이미지를 차용하지 않은 사진조각을 만드실 계획은 없나요?
때가 되면 할 수도 있을 거 같고, 하게 된다면 잘할 것 같아요. 근데 아직은 제가 활용할 거장들의 작업들이 많고, 정확한 디렉션을 바탕으로 스태프들과 다작을 할 수 있는 체계를 만들어 놓아 한동안은 현재 방식을 유지할 계획이에요. 예외적으로 불은 한번 만들어 보고 싶어요. 작년 일민미술관에서 2인전을 함께했던 최하늘 작가가 보내준 형태 중에 이걸로 무엇을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가, 불 사진을 붙여놓은 작품은 있긴 하지만, 제가 염두에 두고 있는 불 작업은 다른 형태에요. 작가 생활 초기에도 상상해본 적이 있는데, 불을 들고 가는 사람을 만들게 되면 사람의 앞부분만 밝게 만들고 뒷부분은 까맣게 되잖아요? 그 지점을 발전시켜 사진조각화 해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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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조각에 이어 2003년 <더 플랫> 시리즈가 등장합니다. 동시대 평면 이미지를 입체로 구축한 뒤, 이를 다시 평면인 사진으로 마무리했습니다. 이에 <데오도란트 타입>은 새로운 각도에서 재해석되었고, 이후 나올 새로운 시리즈들이 영향을 받았습니다.
극장가에 있는 입간판을 보고 저 형식을 어떻게 써볼까 하던 차에, 이형구 작가가 작업실에 놀러 왔습니다. 가짜 롤렉스 시계마저 살 돈이 없다고 얘기해서, 제가 잡지 『GQ』의 롤렉스 시계 광고의 사진을 오려서 채워주었더니 그럴듯해 보였어요. 그때 이렇게 종이 한 장을 세워도 조각일 수 있겠다는 아이디어가 떠올랐고, <더 플랫> 시리즈의 제작 방식으로 활용되었습니다. <더 플랫>에서는 그럴싸한 물건들의 풍경 속에 도시의 느낌을 담고자 했어요. 패션 잡지에 등장한 시계, 화장품, 보석 등의 사진을 하나하나 오리고 뒷면에 철사 지지대를 붙여 한곳에 모아 세운 뒤 촬영을 했습니다. 원근감이 느껴지지 않는 평면 작업으로 전환되었죠. 특정한 종류의 물품이 계속 나오면 재미없으니 잡지 책 한 권을 통째로 오려보자는 생각을 했고, 2010년 이후에는 『WALLPAPER』라는 유명 해외잡지로 작업하면서 작품에 건축물, 현대미술품까지 등장했어요. 회화에 정물화가 있듯이 <더 플랫>을 정물조각이라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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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더 스컬프처> 시리즈에서는 수퍼카, 오토바이의 형상을 브론즈로 제작한 뒤에 아크릴 물감을 입혔습니다. 조각가의 터치가 물씬 느껴지는 조각적 조각으로 그전까지 작업과는 결이 다른 거 같아요.
<더 스컬프처> 시리즈를 처음 작업할 때는 ‘이게 너희들이 원하는 동시대의 조각이지? 내가 한번 보여줄게’라는 조금 삐뚤어진 마음을 갖고 시작했어요. <더 스컬프처> 시리즈를 만들기 전까지 사진조각과 <더 플랫> 작업에서 재료가 사진인 관계로 당시 저를 사진가라고 부르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조각가로 불리길 원했기에 의도적으로 조각가의 혼이 담긴 듯한 터치를 넣으려 했죠. 그런데 몇천 년간 내려오는 전통 재료의 매력이라는 게 참 무서워서, 작업을 하다 보니 너무 열심히 진심을 다해 만들게 되었어요. 브론즈 공장에서 <The Scupture Ⅱ>가 나올 때 사장님이 “권 작가, 이제 이건 천년만년 가는 거야.”라고 얘기하실 때는 경건함까지 느꼈죠. 그렇게 청동으로 만들어진 수퍼카, 오토바이 위에 아크릴 물감을 칠하여 얼핏 보아서는 청동이라는 재질을 가늠하기 어려우나, 직접 만져보면 청동의 형상과 무게를 인지할 수 있었습니다.
전작들과 달리 <더 스컬프처>는 의도적으로 모델의 실물을 보지 않고 인터넷 사진과 수치, 작은 모형만을 참고해서 만들었어요. 모델을 직접 보거나 촬영하지 않고 제작한 이유는 사물을 실제 눈으로 발견할 수 없는 묘한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 기대했거든요. 특히, <토르소(더 스컬프처 14)>의 두카티 오토바이는 특히 제가 전혀 모르던 제품이었는데, 전시를 개최한 뒤 두카티 매장에서 실제 오토바이를 보니 정신이 번뜩일 만큼 아름답더라고요. 제 조각은 비교도 안 되었어요. 그때부터 오토바이를 수집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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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필 자동차, 오토바이를 <더 스컬프처>의 모델로 삼았나요?
우리가 아는 다빈치, 미켈란젤로, 베르니니 등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들이 전부 이탈리아 사람들인 것에 반해, 현대 조각의 거장 중에는 이탈리아인이 거의 없어요. 천재적인 조형 감각의 유전자를 가진 이탈리아 사람들이 다 어디 있을까 상상해봤더니 부카티, 페라리, 람보르기니를 만들고 있는 게 아닐까 싶더라고요. 더군다나 자동차나 오토바이의 쉐입 디자인이 동물이나 사람의 형상을 반영하거든요. 그래서 동시대적 조각의 대상으로 삼기에 적합하다고 판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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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아라리오 갤러리의 1호 전속 작가로 선정되며 세간의 집중을 받았습니다. 작업량과 크기를 키울 수 있게 되어 작가 커리어에서 중요한 시점이었다고 생각해요.
2005년 아라리오 갤러리의 김창일 회장이 국내 최초로 젊은 작가들을 영입해 전속작가제라는 것을 시행했습니다. 이전까지 한국에서는 젊은 작가들이 작품을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는 상상을 하지 못해서 그런지, 이들을 대상으로 한 상업미술 시스템이 거의 없었어요. 전속작가가 되며 많은 스태프가 제 작업에 참여할 수 있었고, 작품운송을 전문업체에서 옮겨주었기에 꼭 물리적으로 가벼운 조각만을 할 필요가 사라졌죠. 이 시기에 <더 스컬프처> 시리즈도 나올 수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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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 작품세계의 주축인 <데오도란트 타입>, <더 플랫>, <더 스컬프처>가 완성된 이후에는 각 시리즈를 지속하시며 새로운 시리즈도 계속해서 선보이셨습니다. 우선, <매스패턴스> 시리즈에서는 권오상식 소조 행위가 드러납니다.
2013년 싱가포르의 테멩공 아트 레지던시에 몇 달 참여했습니다. 싱가포르에서 유명한 동양화가 부부가 장군들이 살던 집 다섯 채를 개조해서 본인 집과 작업실, 전시장으로 쓰며 관리하던 레지던시였는데 매우 흥미로운 공간이었어요. 부부는 엄청난 유물 컬렉터이기도 했는데 당, 청, 명나라의 유물 들을 식기로 세팅해서 대접하더라고요. 그렇게 좋은 유물들을 가까이서 많이 볼 기회가 생겼고, 그곳에서 촬영한 유물 이미지들로 <매스패턴스>가 시작되었어요. 나중에는 세계 각지의 좋은 유물들을 비롯해 국립중앙박물관 등에서 우리나라의 유물도 더 자세히 들여다보게 되고, 점차 저의 집에서 쓰는 전기드릴, 아이폰 같은 소소한 사물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유물과 물건들을 많이 만들어 놓고 그것들을 소조하듯이 붙여나갔는데, 제가 어렸을 때부터 미술을 하며 몸에 배어 있는 조형 감각이라 익숙하게 해냈죠.
덩어리를 소조하듯이 붙이는 방식은 고전 조각의 구조에서 가져왔습니다. 르네상스 시기 대리석 조각들을 보면 발목이 부러지지 않게 하려고 발 주변에 과일, 나무, 동물, 천 아기천사 등 무언가 붙어있어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을 보면 6m쯤 되는 큰 작품의 오른쪽 발목 뒤에 큰 나무밑둥이 있죠. 이 다리 밑 형태들만 따로 가져와 <매스패턴스>가 나왔고, 이 소조적 행위는 나중에 <뉴 스트럭쳐>, <릴리프> 시리즈에도 활용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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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뉴 스트럭쳐> 시리즈에서는 <더 플랫>의 납작한 이미지를 현실에 꺼내 세워두었습니다.
<더 플랫>을 발표할 때 오려낸 작은 이미지 조각들은 왜 전시하지 않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았어요. 당시에는 종잇장으로 밖에 서 있는 건 너무 직접적이기 때문에 조각적으로 재밌지 않다고 느꼈는데 10년 뒤에 생각이 바뀐 거죠. <더 플랫>에서 오린 종이들을 세워 놓고 보면 그 사이마다 공간과 어우러지는 구도가 있어요. 저나 관객들이 아주 작은 사람이 되어서 그 사이를 걸어 다니면 환상적이겠더라고요. 그렇게 2014년 <더 플랫>의 이미지들을 현실에서 거대하게 뻥튀기하여 세워둔 <뉴 스트럭쳐>가 나왔어요.
<뉴 스트럭쳐>에서도 사진조각과 같이 먼저 형태를 정한 뒤에 그에 들어갈 사물 이미지를 정합니다. 알루미늄판이나 자작나무 합판이 연결된 형태는 알렉산더 칼더의 <스테빌>이라는 조각 시리즈에서 영향을 받아 판들이 바닥에 잘 설 수 있도록 붙였습니다. 그다음 여기에 들어갈 사물 이미지는 <더 플랫> 시리즈에서 나온 이미지, 제가 촬영한 사진, 아니면 자료 검색한 이미지에서 골라져 들어갑니다. 선택된 사물 이미지는 컴퓨터 안에서 가공되는데, 픽셀이 얼마나 크게 보일지, 인쇄된 점들이 표면에 보일지 여부, 또 흑백일지 컬러일지 등을 결정하죠. 제 기존 작업과 비교해 특별히 새로운 작업 철학은 없지만, 칼더가 만들었던 구조(structure)를 새롭게 사용해서 만든 작업이어서 ‘New’를 붙였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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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릴리프> 시리즈는 <뉴 스트럭쳐>의 판들이 부조의 형태로 구성된 듯합니다.
2016년 전시를 준비하던 당시 이사 갈 집을 알아보았는데, 들어갈 집이 마치 갤러리처럼 하얬어요. 그래서 벽에 걸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주로 고전 건축물의 표면에 넣어지는 조각인 부조를 동시대적으로 구현해보고자 했죠. <릴리프>는 이미지를 늘어놓고 즉각적으로 구성하는 방식을 취하는데, 이미지를 가지고 고민하기 시작하면 구성이나 크기가 비슷한 형식이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이미지가 아예 삭제된 실루엣만으로 구성한 작업도 있는데, 덩어리를 어떤 방식으로 구성하는지 더욱 명확하게 느낄 수 있죠. 다 만들고 보니 크기가 예상보다 커져서 집에는 걸어두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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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으로 작가님의 대표 시리즈들을 살펴봤습니다. 2001년 개인전 이후 현재까지 해외 전시에 자주 참여하셨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전시가 있을까요?
2008년 맨체스터 아트 갤러리 개인전이 기억에 남아요. 전시를 하기 1년 전에 갤러리에서 참여작가들을 초대해서 마치 레지던시처럼 맨체스터 동네에 머물며 작업할 수 있도록 여권을 만들어 줬었어요. 그래서 모델들을 촬영하고 한국에서 작업을 진행한 뒤 다시 영국에서 전시했습니다. 사진조각을 위해 경찰과 경찰이 탄 말, 미술관 관계자들과 동네 주민들이 모델이 되어 주었어요. 촬영할 때 말이 지루해서 내뱉던 숨소리가 기억에 남네요. 가장 흥미로웠던 건 갤러리 공간이었는데, 200년이 된 공간이라 고전적인 형태의 미술관 외관 안쪽에는 새로 지은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또 조명이 아예 없이 천장을 플렉시글라스로 만들어놔서 바깥에 구름이 지나가면 어두워졌다가, 해가 나면 다시 쨍하고 밝아질 정도였어요. 자연스러운 채광을 가진 미술관이었기에 조각 공원의 풍경을 만들어서, 관객들이 전시장에 들어오면 작품들과 다 함께 엉키는 풍경을 연출하고 싶었습니다. 이 전시의 도록이 한때 뉴욕현대미술관(MoMA) 아트샵에 비치된 적도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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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간 나이키, 에르메스, 펜디, BMW, 재규어, 라이엇게임즈, Keane, GD 등 세계적인 브랜드 및 스타들과 협업을 진행하셨는데, 협업이 작가님 혹은 작품세계에 어떤 의미를 가지나요?
<데오도란트 타입> <더 플랫>, <더 스컬프처>, <매스패턴스>, <뉴 스트럭쳐>, <릴리프> 등 여태까지 제 모든 시리즈의 작품들은 일종의 정물조각이에요. 협업이 아니더라도 브랜드들은 이미 제게 계속해서 물건을 보내줘 왔어요. 또, 협업은 언제나 작업의 시작과 끝이 명확하여서, 다작을 위한 작업 스케줄을 조정하기 좋습니다. 어떤 경우에는 전시보다도 더 많은 사람이 제 작품을 접할 수 있게 만들기도 해요. 협업이 제 작업 방향에까지 영향을 주는 경우는 드물지만, 제 작품세계를 언급할 때 떼놓을 수 없는 개념이기도 합니다.
<Annapurna Mirror Ball> (2011) 이후 레디메이드 오브제가 사진조각에 등장한 것에 대해 ‘제프 쿤스의 특정 시리즈에 비평적 화답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라고 한 평론가에게 ‘사진조각으로 만들기 귀찮아서 슬쩍 넣었다’라고 답하신 적이 있어요. 작가님 작품세계에서 중요한 지점이었다고 생각하는데 간단하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을까요?
상대가 제 작업의 의도를 하나하나 포장해서 얘기하려고 그럴 때 종종 그렇게 답할 때가 있는 것 같아요. 사실 미러볼을 사진조각으로 만드는 건 스태프 체계가 잡혀있는 상황에서 크게 어렵지는 않아요. 사진과 거울 사이에는 밀접한 미학적 관계가 있어, 작품에 거울로 만들어진 미러볼을 넣은 측면이 큽니다. 번쩍거리는 효과 자체가 필요하기도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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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님께서는 특정 이론이나 철학을 작업에 가져다 붙이려 하지 않고, 그것들이 작가를 통과하여 작품들의 꼭지들로 담백하게 나오도록 하는 거 같아요.
이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결국 지금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 몸에 내재해 있는 것이라 생각해요. 이론가나 철학자들이 그 내용들을 굉장히 문학적으로 아름답게 정리를 해놓은 거죠. 그런 것들을 미대생들이 너무 성경 보듯이 신성시하고, 한 권 읽으면서 어디 메모해놨다가 글이나 인터뷰에 풀어놓는 건 좋아 보이지 않아요. 그건 그 사람의 생각이 아니잖아요. 같은 내용이라도 작가 자신의 생각을 전달하는 방법이 있는데, 굳이 다른 사람의 생각을 가져올 필요가 있을까에 대해 의문이에요. 예전에 아트선재에서 세계적인 학자들을 한국에 초빙하여 강연을 종종 했거든요. 제가 한창 많이 들어봤는데 내용이 별거 없더라고요. 잘 정리해서 잘 전달할 뿐이에요. 그러니 이에 너무 얽매이지 않았으면 합니다.
작가님의 작품 대부분에는 여러 이미지가 중첩해 있는데, 그들 사이에 내러티브는 잘 읽히지 않습니다.
종종 제 작업들이 비슷한 감성을 가진 도시인들이 감상할만한 어떤 시각적인 풍경으로 기능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얼핏 보면 내러티브가 강조되는 작품 같지만 실제로는 내러티브가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거죠. 작가인 제가 추구하는 특정 사상이나 철학을 전달하기 위한 매개는 확실히 아닌 것 같아요. 제 조각을 현대 미술품으로 보고 감상할 수도 있지만, 누군가는 수석이나 산, 바다를 보는 방식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내러티브나 담론이 중요하게 다뤄지는 전시에는 점점 참여하지 않게 되는 거 같아요. 과도한 정보 사회에서 사람들을 멍한 상태로 만들어주는 것도 미술의 좋은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이른 나이부터 어시(스태프)를 도입했고 이들의 필요성을 꾸준히 주장해왔습니다. 작가님 스태프 중 작가로 데뷔한 경우도 있고요.
조각은 역사적으로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니에요. 그걸 벗어나려고 사진조각이 나왔지만 몇 년 가지 않아서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할 수밖에 없었어요. 대규모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사진들을 혼자 붙일 수 없으니까요. 처음에는 후배들이 도와주기 시작했고 어느 순간부터 스태프를 고용했는데 한국에서는 교수가 아닌데 스태프를 고용한 첫 번째 사례였던 것 같아요. 저도 어렸고 스태프들도 어렸는데, 한국에서 스태프에게 페이를 하는 문화를 거의 제가 만들었어요. 저도 교수님들의 스태프를 해본 적이 있지만, 보통 밥 사주고 끝나는 게 관례였어요. 근데 그런 식으로 하면, 사람을 정확한 시간에 정기적으로 작업실에 데려다 놓을 수가 없어요. 정해진 양을 정확하게 완수할 사람이 필요했기에 고용만이 답이었죠. 전 교수들만큼 명성이 있지도 않았으니까요.
홍대 앞에 작업실이 있었으니 어시를 구하기가 어렵지 않았는데, 능력이 출중한 친구들이 다 제 작업실에 왔었어요. 인기가 많은 일자리였거든요. 스태프들은 많이 뽑고 출퇴근 시간을 정해주지 않으니, 각자 생활을 영위하고 남는 시간에 와서 작업을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한 번 나오면 보통 오래 일해요. 대학교 1~2학년 때 들어와서 졸업하고 휴학했다가, 대학원 갔다가, 다른 사회생활 하다가 다시 들어오는 친구들도 많고요. 저는 사진조각이 탄생해서 여럿 학교를 다니게 만들었다고 생각해요.
한창 미술시장이 호황이었지만 조각 시장은 여전히 좋지 않다고 알고 있습니다.
조각 사는 컬렉터는 거의 없어요. 작은 조각은 회화처럼 설치도 어렵지 않거든요. 물론 좌대와 어느 정도의 공간, 하다못해 놓을 선반이라도 필요해서 그런 걸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입체를 많이 안 사 봐서 그 매력을 모르는 거 같아요. 권진규가 사망한 이유가 작품이 안 팔려서예요. 미술계에서는 정말 잘 나갔거든요. 그 당시에 일본에서 열린 개인전은 물론이고 한국의 명동화랑에서 전시할 때도 일본 메이저 신문에 실리고, 국내외 잘 나가는 작가들이 다 와서 방명록에 사인했는데도 작품은 너무 안 팔렸어요. 저도 국내에는 개인 컬렉터가 거의 없어요. 대부분 해외 분들인데 개인 수장고나 자기 미술관이 있는 재력가들이죠. 나머진 전부 기관 소장이라 국내외 미술관이나 회사들이 많이들 구매해갔어요.
그래도 최근에 조각 전시는 작년부터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그전까지 조각가들의 불만이 큐레이터조차 조각을 보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에, 조각을 어떻게 디피해야 하는지 계산도 안 서는 거예요. 그래서 생기는 문제들이 많았어요. 한번은 조각을 벽에 딱 붙여놓았길래 물어보았는데 지나다니다가 쓰러뜨릴까 봐 그랬다는 거예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 거죠. 그만큼 조각 전시를 위한 제반이 좋지 않아요. 작년부터 미술계뿐 아니라 SNS에서도 조각이 많이 보이고, 조각에 관한 전시도 많이 열리고 있습니다. 괜찮은 상황이긴 하지만 앞으로 두고 봐야죠.
작업, 특히 조각에서 노동이란 어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시나요?
좋은 미술의 조건으로 노동력이 전제하는 경우가 있는데, 저는 이에 동의하지 않아요. 재능, 비지니스 등 많은 요소가 있겠지만 쉽고 빠르게 만들어도 멋지고 좋은 작업이 나올 수 있어요. 정직과 노동은 현대 미술보다 공예의 미덕에 더 어울리는 거 같습니다. 조각은 혼자 할 수 있는 작업이 아닌 동업과 협업의 역사예요. 오로지 노동에 집중하는 작업 방식을 취하는 조각가도 물론 있지만, 그러면 다작을 할 수 없죠. 몸도 일찍 망가지고 오래 못 살아요. 저는 건강하고 오래살며 아주 많은 조각을 만들고 싶어요.
사진조각 탄생 때 고민하셨던 ‘가벼운 조각’은 작가님께 아직 중요한가요?
빠르고 많은 작업을 위해 ‘가벼운 조각’을 만드는 일이 제 작품세계의 바탕이긴 합니다. 이때 작품의 무게는 가볍지만, 그 의미는 무거울 수 있어요. 또, 꼭 물리적으로 가볍지 않더라도, 전통적인 조각의 성질을 응용해 동시대적인 조각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고 있습니다.
어떠한 작가가 되고 싶으신가요?
일찍 죽은 사람들에게 불만이 있지, 장수하면서 부귀영화 누리고 가는 작가들은 작품이 좋고 싫고를 떠나서 보기 좋아요. 제대로 작업하다가 갈 때가 되어 가는 한국 작가가 많이 없어요. 중간에 관두거나 요절하죠. 작업 좀 하고 좋은 얘기들 해주다가 갑자기 사라져버리면 배신감이 듭니다. 류인, 구본주, 박이소, 강석호··· 다들 저와도 인연이 있는 분들인데 너무 빨리 떠나버려서 아쉬워요.
어렸을 때부터 어떻게 보여지고 남을지에 관한 생각을 많이 했어요. 작가로서, 조각가로서 뭔가 이루고 싶고, 그러려면 오래 살며 다작을 해야 하요. 시시한 작가는 되고 싶지 않아요.
학생 작가들에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작가가 된 후에 한순간이라도 자신의 재능이 의심된다면, 주저 말고 그만두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민태홍 mr.podobunja@google.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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