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것이 가능하다면 그것이 성립하는 가능 세계는 존재한다.

-2019학년도 수능 국어영역 지문 일부

 

G

가능 세계는 분석철학 개념이라고 합니다. 말이 어려워서 그렇지 사실 매우 간단합니다. 말 그대로, 다양한 가능성이 존재하는 모든 세계의 집합을 의미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오늘 아침, 참치 캔을 먹고 왔습니다. 벌크업 중이거든요. 만약, 제가 운동을 하지 않았더라면, 저는 오늘 아침으로 평소처럼 콘푸라이트를 먹었을 겁니다.

가능 세계는 분명 무수히 많습니다. 제 아침 식사에 관한 가능 세계만 벌써 두 개잖아요. 참치캔 가능 세계와 콘푸라이트 가능 세계요. 이런 가능 세계는 어떻게 참값으로 인정될까요?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어떤 조건들로 인해 이런 상황이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는 반사실적 조건문이 현실 세계와 가장 가까운 거리를 가질 때, 우리는 그것을 참이라고 부른다.’ 라고요.

 

 

하지무

“만약 기억을 통조림이라고 친다면 영원히 유통기한이 없었으면 좋겠다.

유통기한을 꼭 적어야 한다면, 만 년으로 하고 싶다.“

네? 제가 지금 뭐 하는지 궁금하시다고요? <중경삼림> 보는 중이랍니다~

 

G

방금 경찰 223, 하지무의 이야기가 끝났습니. 오늘로 벌써 57만 번째 정주행을 마쳤군요.

 

어쨌거나 저는 하지무의 마지막 말이 자꾸만 마음에 걸립니다. ‘기억을 통조림에 담아 그 유통기한을 만년으로 하겠다.’ 라니. 그 뒤로 저는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줄여서 ‘유만파‘라 부르라고 누가 그러더군요. 파인애플 한 조각이 하지무의 사랑에 대한 기억 한 편을 상징한다면, 하지무가 영화 속에서 내내 하던 행동들을 한 문장으로 표현한 것이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이 아닐까요?

 

뉴스 앵커

긴급속보, 긴급속보입니다...!

20XX 년 1월 XX일인 오늘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제조사인 GCVP&Co는 오늘부터 전 세계에 유만파 통조림의 유통을 시작한다고 하는데요, 아직 저희 OOO 방송국 취재팀도 실물을 접해보진 못한 상황입니다.

 

20XX. 01. 21

PASADINA의 어느 실험실, C의 이야기

 

C

나는 단 한 명의 천재가 세상을 바꾼다고 믿는다. 비현실적인 지능은 비현실을 현실로 바꿀 충분한 힘이 있다. 다시 말해 천재는, 가능 세계와 현실 세계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하는 존재다. 내가 처음 물리를 공부할 때, 첫 단원에서 나왔던 유명한 실험이 아직도 내겐 생생한 충격으로 남아있다. 알파입자 산란 실험. 얇은 금박에 알파입자를 쏘면 확률적으로 99%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원자는 대부분이 빈공간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알파입자 그저 통과되는 것이 당연한 현실이었다.

 

러더퍼드

“이것은 내 일생에 있어 가장 믿기 어려운 현상이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40cm 포탄을 얇은 종이에 대고 쏘았더니 뒤로 튕겨 나와서 총을 쏜 사람을 맞춘 것이나 다름없는 이야기지요!“

 

그 99%의 확률을 깨고 놀랍게도 알파입자가 튕겨 나간 경우가 생겨버렸다. 금박 속 아주 미세한 무언가에 맞고 튕겨 나간 것이다. 이 무언가가 바로 금 원자의 원자핵이었다. 하나의 비현실적 지능이 비현실의 영역을 현실로 끌고 들어온 순간이었다.

러더퍼드

“여러분, 참고로 나는 엄청 가난했어요. 시험에서 1등에게만 주는 장학금을 받지 못하면 학업을 더 이상 이어나갈 수 없을 정도로요. 절망스럽게도, 전 그 시험에서 2등을 했고, 할 수 없이 고향 땅에서 감자를 캐고 있었죠. 1등이 의대를 간다며 장학금 지원을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나의 천재적인 실험은 이 세상에 빛을 발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냥 그렇다고요.”

 

G

그날도 어김없이 California Dreaming이 흘러나오는 제 단골 음식점 미드나잇 드리밍에서 음식을 주문하고 있었습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이 실제로 만들어진다면..?!” 그런 가능 세계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거잖아요?

아니 근데 오늘 뉴스 속보 들으셨나요. 여러분?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이 이미 개발된 것이었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입니다. 다들 통조림 구경이나 하러 가봅시다. 아, 그전에 사람들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C

오늘은 드디어 내 평생의 숙원사업이었던 유만파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날이다. 러더퍼드의 원자핵 발견만큼이나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을 만드는 일은 놀라울 만큼 비현실로 점철된 과정이었다.

 

G

“아니 C, 대체 그래서 유통기한이 만년이나 되는 파인애플을 어떻게 만든 건데???”

 

아, 잠시만요. C가 연구실에서 절 부르는 소리가 들리네요. 

아무래도 유만파 통조림을 만드는 방법을 알려주려나 봅니다. 

준비물부터 알려준다고? 그래 어디 한번 말해봐 C.

생각보다 재료가 많은데? 잠시만, 메모지에 적어볼 테니 천천히 불러줘.

 

20XX. 07. 04

뉴욕 월스트리트, V의 이야기

 

V

이 세상에서 가장 첨예한 가능 세계를 만들어내는 곳. 고작 0.001포인트 차이로 누군가는 인생을 잃고, 누군가는 세상을 얻습니다. 월스트리트는 그런 곳이에요.

이곳에서 나의 역할은 무한 가지의 가능 세계들과 현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것. 그리곤 가장 가까운 거리에 닿아있는 가능 세계가 현실이 될 수 있는지를 검증하는 것. 오직 두 가지뿐입니다.

 

G

이봐 V, 오늘은 그쪽 가능 세계로 가면 안 돼~ 네가 오늘 할 일은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이 존재하는 가능 세계와 현실 사이의 거리를 측정하는 거라구. 아직 뉴스 취재팀도 유만파 통조림의 실물은 파악하지 못했대. 이거 진짜 존재하는 거 맞아? 유통기한 만년이 말이 되는거냐구! 

 

V

아 맞네요. 아까 급하게 흘러나오는 뉴스 속보를 들었습니다.

인류가 만든 꽤나 그럴듯한 시간 지배 장치가 바로 통조림 아니겠습니까. 앞으로 가기, 뒤로 가기 버튼은 만들지 못했어도, 만 년짜리 일시 정지 버튼은 기어코 만들어냈으니 C의 노력이 가상할 따름입니다.

 

통조림을 가만히 앉아 쳐다보고 있자면, 살아있는 세포를 그대로 가둬 세상과의 단절을 조건으로 순간의 영원을 선물하니 가히 유혹적이란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어떤 면에선 조금은 로맨틱하네요. 영원함이란 비현실은 원래 그런 것이니까요.

 

G

이게 C가 나한테 알려준 유만파 통조림 재료야 V. 

어때, 이거 만들 수 있는 거 맞아?

 

<G가 가져온 메모지>

헬싱키, 

monosulfatepentamminecobalt(2)dichlorocuprate(1)

크리오요크림브륄레, 

monochlorodiaqua(ethylendiamine)cobalt(2)

쿠빌라이칸, 

dichlorotetraammineplatnum(IV) 

두부두루치기, 

carbonatotetraamminecoblat(3) ion

이아손, 

trans-tetraaminediaquocobalt(2)hexafluoro-silicate(4), 

.... 외 38만가지

 

 

V

흠, 재료만 봐서는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왜 파인애플일까. 왜 통조림이어야만 했을까. 왜 유통기한은 1억 년도 100억 년도 무기한도 아닌 만년일까. 진지하게 생각을 해봤습니다.

 

 

고든 램지

“지금 이걸 나보고 먹으라고? 파인애플 피자는 피자가 아니라 실수야! ”

앗, 미안합니다. 하와이안 피자를 보고 잠깐 이성을 잃었네요.

파인애플은 400년 전까지만 해도 한 개에 수백만 원이 족히 넘는 사치품이었습니다. 사치스러운 귀족들이 플랜테이션의 대표 과일로 전락시키기 전까진 말입니다. 파인애플 속의 브로멜린이라는 단백질 분해 효소는 연육 작용에 탁월합니다. 파인애플 하면 떠오르는 건 통조림이죠. 식중독을 유발하는 보툴리누스균은 산소 기체를 피하는 성질인 혐기성을 띠므로 공기가 없는 통조림에서 주로 증식합니다. 이것만 빼면 통조림은 오래 보관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자칫 잘못되면, 400g만으로 전 인류를 말살시킬 수 있는 보툴리누스균이 만드는 보톡스 덩어리가 되어 대량살상무기가 될 수도 있어요.

아주 오랜 기억 속 누군가가 나에게 뉴스를 믿냐고 물은 적이 있습니다. 사실 난 저널리즘을 잘 모르겠어요. 정말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은 하겠다. 하지만 현실이라 부르진 못하겠다’ 고개를 내저을 뿐입니다.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을 개발한 C도 있고, 전국에 뉴스 긴급 속보로 보도까지 된 마당에 뭐가 문제냐고요?

아무도 유만파 통조림을 직접 만져본 사람이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스티븐 호킹

태양의 수명은 100억 년, 태양의 나이는 50억 살입니다. 그리고 이런 늙은 태양을 도는 또 하나의 늙은 행성인 지구는 38억 살이나 됩니다. 그 지구 속에 사는 우리 인류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 기준 200만 년, 호모 에렉투스 기준 100만 년, 호모 사피엔스-사피엔스 기준 기원전 20만 년 정도 되었어요. 그러니까 지구의 나이를 24시간으로 환산한다면 인류가 지구상에 출현하게 된 지는 10분도 채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입니다. 확인할 수 없는 비현실적인 시간 만년. 이 숫자는 인간에게 큰 의미가 있습니다. 검증 자체가 불가능하거든요. 그리고 만년이라는 시간은 그 자체로 가능 세계이기 때문에 인간들이 이 긴 시간에 대해 갖는 환상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중국 고대 국가 중 하나인 진시황을 떠올려봅시다. 신하들이 뭐라고 말하나요?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지 않던가요?

V

오늘은 오랜 고민 끝에 일을 마무리 지었네요. 저는 이만 G에게 제가 쓴 리포트를 전달해 주러 가보겠습니다.

 

G

<analyst reports>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과 현실 사이의 거리는 134.714 pei이다.

 

아니 V! 이게 대체 뭐야! pei는 내가 살면서 본 적 없는 단위라고. 그래서 이게 km로 환산하면 얼만데? 그리고 현실 범위로 들어오는 거리 기준을 알려줘야 유만파 통조림이 현실인지 아닌지 결론을 내리지 이렇게 리포트만 달랑 주고 가면 난 어떡하라고...

 

20XX. 04. 18

스위스 제네바 피아제 본사, P의 이야기

 

P

고객님. 안녕하십니까. 피아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G

P, 나야. 나는 너희 시계 너무 비싸서 사지도 못해. 도대체 시계를 다이아몬드로 뒤덮을 생각은 너희 회사 사람 중 누가 제안한 거야? 아,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너는 이번에 나온 유만파 통조림 가격이 얼마일 것 같아? 너희 회사 시계 가격은 전부 네가 결정하잖아. 그래서 한번 물어보려고 스위스까지 날아온 거야 내가.

 

P

A Diamond is Forever. 

인류 역사상 가장 잘 만든 광고 카피는 바로 드비어스의 “A diamond is Forever.”라고 생각해. G, 생각해 봐. 다이아몬드는 다른 보석보다 잘난 게 없어. 지상에서 만들어진 다채로운 색깔의 보석들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투명하기만 하잖아. 다이아몬드가 다른 보석과 다른 점이 딱 하나 있다면, 다이아몬드는 코끼리 80마리가 내 엄지발가락 위에 쌓여있는 정도의 압력에서 만들어졌다는 거?

 

G

듣고 보니 그렇네? 아니 근데 대체 왜 다이아몬드가 비싸진 거야?

 

P

드비어스는 신이니까. 광고 카피는 드비어스가 다이아몬드를 광고할 때 늘 내보냈던 카피야. 990년대 들어서 미국의 80% 이상의 신부가 다이아몬드 반지를 사게 했거든. 오직 저 단순한 문장 하나로 말이야. 어떤 관계자는 이런 말을 하더라. 다이아몬드의 가격이 내려가서 이득을 보는 게 누구인지 모르겠다고. 사실 다이아몬드의 실물 가치는 제로야. 다른 보석보다 특별히 잘난 것도 없고, 솔직히 말하자면 탄소 덩어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거든. 하지만 다이아몬드의 진짜 가치는 전적으로 소유자가 느끼는 가치에 달려있어.

 

G

C가 알려준 유만파 통조림의 재료야. 이건 V가 쓴 애널리스트 리포트고. 물론 네 이야기를 들어보니 이건 가격을 매기는데 조금도 이용되지 않을 것 같지만. 일단 읽어봐. 그리고 감정서를 써줘. 유만파 통조림의 가치를 돈으로 표현해 달란 이야기야.

 

<가격 감정서>

감정 대상 :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

감정의뢰인 : G

감정가 : 1억 달러

*현찰가, 할인 절대 불가

 

30XX.01.01

G의 집, G의 이야기

 

얼마 후, P에게서 받은 가격 감정서에는 유만파 통조림의 가격이 1억 달러라고 적혀있었습니다. “할인 없이 현찰가로 1억 달러”라고 꽤나 성의 없는 한 문장을 받고 나니 왜인지 모르게 허탈하네요.

 

다시 가능 세계 이야기로 돌아가 봅시다. 가능 세계는 언제 어디서나 존재합니다. C처럼 가능 세계와 현실 세계의 거리를 좁히는 역할을 사람을 Creator라고 불러요. 그리고 이 거리가 얼마나 가까워졌는지, 혹은 이 거리를 정확하게 측정하는 V 같은 냉철한 사람을 Verifier라고 부르죠. 마지막으로 현실과 비현실의 구분 따윈 하지 않는, 다만 맹목적으로 모든 것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가치를 매기는 데에 집중하는 P 같은 사람을 나는 Price Setter라고 칭합니다.

 

무엇이든 가능한 세상. 그게 바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입니다. 앞서 말했듯 위대한 철학자들은 여러 개의 가능 세계들 중 현실 세계와 가장 가까운 것이 참이라고 주장합니다. 하지만 과연 참이라는 말이 우리들의 현실이 되는 것과 동의어일까요? 나는 그렇게 생각하진 않습니다.

 

V의 리포트를 보세요. V는 유능합니다.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어요. 그는 유통기한 만 년짜리 파인애플 통조림이 존재하는 가능 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의 거리를 정확한 숫자, 134.714 pei라고 말했어요. 이 숫자는 어떤 변화를 가져왔나요? 유만파 통조림이 존재하는 가능 세계를 현실로 만들어주었나요? 아니면 비현실로 만들었나요? 정답은 여러분들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거리를 측정하는 것만으로는 아무것도 바뀌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P는 1억 달러라는 가격을 서슴없이 내밀었어요.

이건 C, V, P가 내린 결론들을 모은 것입니다.

 

<유통기한 만 년짜리 통조림에 관한 모든 것>

재료: monosulfatepentamminecobalt(2)dichlorocuprate(1) 외 38만가지

현실과의 거리 : 134.714 pei (km 단위 환산 불가)

가격 : 현찰가 1억 달러

 

결론은, 우리들의 숱한 가능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것은 Creator도, Verifier도, Price Setter도 아닙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듣고 있는 오직 여러분밖에 없습니다.

우린 언제나 각자의 파인애플 조각들을 통조림에 담아 각자의 유통기한을 만들어가고 있습니다. 어쩌면 오늘 이곳에 기록될 비현실적인 파인애플 조각들이 무한한 유통기한을 가지고 살아남아 우리들의 당연한 현실이 되진 않을까요?

저기 어떤 한 분이 저한테 질문을 하는 것 같은데,,, 조금 더 크게 말씀해 주시겠어요?

아, 내가 누구냐고요?

G입니다. 다들 날 그렇게 부르더군요. GOD의 그 G요.

최수경  waterglasses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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