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이여 안녕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프랑수아즈 사강 (1935.6.21.~2004.9.24.)

대표작: <슬픔이여 안녕>, <어떤 미소>, <브람스를 좋아하세요> 등

‘매혹적인 작은 악마’, ‘문학계의 샤넬’ 등 다양한 수식어를 가진 그녀는 프랑스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본명은 프랑수아즈 쿠아레로, <슬픔이여 안녕>을 발표하기 전, 사강의 아버지가 그녀의 소설이 사회에 불러올 파장을 우려하여 그녀로 하여금 필명을 쓰게 했다. 그녀의 필명인 ‘사강’은 마르셀 푸르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등장인물에서 가져왔다. 사강은 책을 통한 엄청난 인기를 가진 동시에 약물, 자동차 사고, 도박, 자유분방한 사생활 등 다양한 스캔들로 화재의 중심이 되기도 하였다. 이때 사강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한, 나는 나를 파괴할 권리가 있다.”라는 말을 남기기도 하였다. <슬픔이여 안녕>은 1954년 그녀가 만 18세에 발표한 그녀의 데뷔작이다. 이 작품을 통해 그녀는 프랑스에 ‘사강 신드롬’을 일으키고, 그해 비평가상까지 받게 된다.

스무 살의 사강이 쓴 세실은 그 나이대의 여느 소녀들과 마찬가지로 여리고 복잡하며 섬세하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스무 살의 나는 세실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나와 세실이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느낀 다양한 감정과 이를 통한 성장을 그려 나가보려 한다.

<슬픔이여 안녕>은 열일곱 살인 세실이 그녀의 아버지와 아버지의 애인인 엘자, 그리고 돌아가신 어머니의 친구인 안과 함께 보내는 불안한 여름휴가를 배경으로 한다. 엘자는 큰 키에 빨간 머리를 한 반쯤 유흥업계, 반쯤은 사교계에 속한 여자이다. 안은 세실에게 세련되게 옷 입는 법과 세상 살아가는 법을 알려준, 세실 가족과는 다른, 지적이며 신중한 사람이다. 여름휴가 속에서 이들이 함께 생활할수록 안과 엘자는 더더욱 비교되었다. 안의 침묵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우아했다. 그 침묵은 엘자가 끊임없이 늘어놓는 수다와는 그늘과 뙤약볕처럼 대조적이었다. 안타깝게도, 엘자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세실 아버지의 마음조차도 말이다.

어느 날 파티에서 아버지와 안이 함께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둘은 세실에게 결혼 사실을 알렸다. 세실은 겉으로는 두 사람을 축하했지만, 갑작스러움과 더불어 그녀가 자신과 아버지의 삶에 끼어들 거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세실은 감독이 되어 자신의 남자친구 시릴과 엘자가 사랑에 빠진 것처럼 연출했고, 아버지에게 이를 보여주었다. 아버지는 질투심에 휩싸였다. 하지만 안은 그녀의 초연함과 자부심 때문에 세실의 아버지와 좀 더 밀착되기 위한 전략을 쓰는 것을 피하기만 하였다. 계략을 꾸미던 와중 문득문득 세실은 왜인지 이런 안에게 연민을 느끼곤 했다.

마침내 아버지가 엘자에게 마음을 드러내자 세실은 아찔한 두려움을 느꼈다. 그때, 엘자와 아버지의 입맞춤을 목격한 안이 눈물을 흘리며 차로 향한다. 안을 붙잡으려 세실은 노력하지만, 결국 그녀는 떠나고 만다. 그날 밤 10시, 울리는 전화벨에 세실과 아버지의 눈길은 희망으로 가득 찼지만, 그 전화는 안의 사고를 알리는 전화였다.

세실은 안을 한없이 미워하는 와중에, 안을 존경하고 사랑한다. 남자친구 시릴과의 관계도 하루는 불안하기도, 하루는 영원할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이 이 모든 상황을 통제할 충분한 관록이 있다고 믿지만, 어느 시점에선 한없이 어린 소녀의 모습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렇듯 순간마다 일렁이는 감정 앞에서 유약해진 그녀의 마음은, 외려 다음 차원의 자신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렇다, 나는 바로 그 점 때문에 안이 미웠다. 그녀는 내가 나 자신을 사랑할 수 없게 만들었다. 행복과 유쾌함, 태평함에 어울리게 태어난 내가 그녀로 인해 비난과 가책의 세계로 들어왔다. 자기성찰에 너무나도 서툰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잃어버렸다.”

세실은 자기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안을 미워했다. 무심한 삶에 아주 만족하고 있는 세실에게 안은 그녀가 그녀 자신을 비판하도록 몰아붙였고, 어렵게 살도록 만들었다. 나도 세실과 마찬가지로 반성에 서툴렀다. 우선은 반성이 필요한 이유를 납득하지 못했다. 해결책은 과거가 아닌 미래에 있으며, 반성은 후회와 다름없다는 생각이었다. 또한, 반성하는 순간 내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꼴이 되어 안과 같은 사람들에게 지게 된다고만 여겼다. 그래서 나는 나의 잘못을 용납하지 못했다. 잘못한, 잘못된 나를 사랑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반성의 세계는 나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도록 막는 세계가 아닌, 나를 찾는 세계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반성의 세계에 첫발을 내딛게 된 건, 타인과 함께 글을 쓰면서이다. 내가 쓴 글을 남에게 보여주고, 비평받을 때면 내 머릿속은 자책, 수치, 공포, 분노 등 온갖 감정들로 뒤엉켰다. 이후 난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수없이 그 세계에 빠져 허우적대고, 태평함에서 멀어지며, 나 자신을 놓칠 위기에 처하곤 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포장되지 않은 나와 조우하게 되었다. 해결책은 과거에서 찾아 미래를 향해야 하는 것이었고, 후회에서 그치지 않고 반성을 향해 나아가야 했으며, 반성은 앞으로의 나를 보호하는 수단이었다. 또한, 정답에 맞춰진 나만을 사랑하는 것은 사랑이라 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여전히 나에게 자기반성의 세계는 가혹하고 나는 틀린 나를 사랑하는 것이 어렵기도 하다. 그렇지만 앞으로 세실과 함께 더욱 반성의 세계에서 허우적대며 스스로에 대해 좀 더 유심히 살펴보리라는 것은 틀림없다.

“아버지는 벌써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있었다…. 나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지난날 우리가 함께한 그 모든 공모를, 새벽에 자동차를 타고 텅 빈 파리 거리를 달려 집으로 돌아오면서 터뜨리던 우리의 웃음을 떠올렸다.”

세실의 아버지는 수많은 여자와 만남을 가져왔지만, 그래도 세실은 늘 그 여자들과는 잠깐 즐기는 것일 뿐, 아버지를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아버지가 안과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밝힌 후, 세실은 아버지를 잃은 듯한 느낌에 빠지고 만다. 나 또한 인간관계에서 이기적인 부분이 있었다.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무관심했고, 내 울타리 안의 사람에게는 지나치게 집착했다. 나에게 그가 가장 소중한 사람이니, 그에게도 내가 우선이기를 바랐다. 문자 답장이 늦을 때면 실수한 점이 있는지 대화창을 끊임없이 다시 확인했고, 내 모든 것을 타인에게 맞추었으며, 심지어는 다른 사람들과의 행복한 모습에 힘겨워했다. 그러나 이는 손에 쥔 모래를 꽉 잡으려 움켜쥐는 것이었다.

나의 집착은 합당하지 못했다. 타인은 근거 없는 나의 집착에 부담을 느꼈을 것이다. 중요한 점은, 나 또한 나의 집착에 힘들어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존재하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내가 집착하여 연명하는, 온전하지 못한 관계는 그만두는 것이 옳다는 것을 그제야 깨달았다. 세실의 다정한 아버지가 결혼하게 되었다고 해서 더 이상 세실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 사랑은 애초에 사랑이 아니었을 것이다. 물론 세실의 아버지는 늘 그래왔던 것처럼 결혼하여도 여전히 그녀에게 한없이 다정한 아버지일 테지만. 이를 깨닫지 못하고 불안한 마음에 눈물을 훔치던 세실과 내가 이제는 통제할 수 없는 관계에 대담해지며, 한껏 상처받고 또 한껏 사랑할 수 있기를 바란다.

“나는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다 주의 깊게 의식하게 되었다. 그때까지는 언제나 마음 내키는 대로, 속 편하게 나를 중심으로 사는 사치를 당연하게 여겼다. 나는 언제나 그렇게 살았다.”

세실이 아버지의 딸인 한, 아버지에게 큰 의미를 지니기에 아버지를 사랑하는 안과 엘자와의 관계에서는 늘 은근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또한 연인 사이이지만, 세실을 더 좋아하는 시릴이었기에 세실은 늘 갑의 위치에 있었다.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도 난 언제나 세실처럼 살아왔기 때문인지, 내가 ‘나’를 중심으로 생각하고 사는 것은 사치가 아닌 당연한 권리라고 여겼다. 그러나 조금만 생각해보면, 이러한 자기중심적 태도의 비약을 확인할 수 있다. 관계 속에서의 나는 오직 한 사람으로서의 내가 아닌, 누군가의 상대로 존재한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세심한 시소와 같아서 자연스럽게 위치의 차이가 생기게 된다. 누군가는 그 당연함을 무기로 인간관계를 휘두를 수 있다. 하지만 사강의 표현처럼 나를 필요 이상으로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사치‘이다. 그 당연함은 세실에게만 당연하고, 어쩌면 안과 엘자 그리고 시릴에겐 무기로 다가갈 것이기 때문이다.

세실은 자신이 느끼는 안에 대한 감정이 어리석고 한심하다는 것을 알았고, 마찬가지로 그녀와 아버지 사이를 떼어놓고 싶다는 욕망도 잔인하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시릴과 안이 서로 사랑에 빠진 연기를 하고 싶지 않아 하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그래도 되니까’ 마음 내키는 대로 행동했다. 세실은 필요 이상으로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는 결국 스스로를 자기혐오에 빠지게 만들었다.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면, 이제는 그 당연함을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정함을 무기로 삼아 다른 사람들을 그리고 나 자신을 보다 주의 깊게 의식하는 것에 집중하기로 다짐해본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가 공격한 대상이 하나의 추상적 개념이 아니라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살아있는 개체였음을.”

세실이 온갖 계략들로 아버지에게서 안을 떼어놓기 위해 그녀를 괴롭힐 때, 그녀의 머릿속에 안은 오직 공격해야 하는 추상적 대상이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이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할 때면, 그 미움의 감정은 내가 이성적 사고를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내 머릿속의 압력은 한없이 올라가고, 그 속은 분노로 가득 차버리고 말았다. 이때 상대는 나에게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 아닌, 내가 필연적으로 혐오해야만 하는 추상적 개념으로 존재했다. 어떻게 그를 공격할지만 생각했다. 그가 나의 공격을 받는 것은 마땅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이 문장을 읽는 순간 뇌에 찬물이 쏟아졌다. 내가 한없이 미워하는 대상도 우리와 다를 바 없는 하나의 개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마음은 초연해지며 다시금 이성적 사고를 할 수 있게 된다.

나의 분노는 내가 택한 것이다. 타인이 보인 말이나 행동 즉, 객관적 사실에 대해 나는 여러 주관적 감정 중 분노를 택한다. 그러고는 분노의 원인을 상대방으로 돌려버린다. 소설에서도 ‘아버지와 사랑에 빠진 안’이라는 객관적인 사실에 대해 세실은 분노라는 주관적인 감정을 택한다. 이렇게 선택된 분노를 원인으로 하는 행동에는 어떠한 정당성도 없다. 그는 나의 감정 쓰레기통도, 저주 인형도, 데스노트도 아닌데 나의 공격을 받고 그에 따른 상처를 왜 온전히 감내해야 할 이유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안이 세실의 계략 때문에 상처받고, 떠나야 했던 이유는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만약에 누가 너무 미우면 사랑해버려요.” 이옥섭 감독님이 하신 말씀이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분노는 타인에게 부당하기도 하지만, 나에게조차 이로울 것 하나 없다. 순간의 감정에 눈이 멀어 나와 남 모두에게 부당한 멍청한 선택이 아닌, 이지적으로 나를 위한, 남을 위한 감정인 사랑을 택하려는 노력이 필요한 순간이다.

“파리 시내를 달리는 자동차의 소음만이 들려오는 새벽녘 침대에 누워 있을 때면 때때로 내 기억이 나를 배신한다. 그해 여름과 그때의 추억이 고스란히 다시 떠오르는 것이다. 안, 안! 나는 어둠 속에서 아주 나직하게 아주 오랫동안 그 이름을 부른다. 그러면 내 안에서 무엇인가가 솟아오른다. 나는 두 눈을 감은 채 이름을 불러 그것을 맞으며 인사를 건넨다. 슬픔이여 안녕.”

사강은 우리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에서 느낄 수 있는, 오묘한 과도기적 감정들을 훌륭한 글로 풀어냈다. 그리고 곳곳의 세실들은 사강과 함께 성장해 갔다. 그 누가, 어떠한 이유로 세실을 비난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깨닫고, 반성하며 성장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다가오는 슬픔을 기꺼이 맞이하며 인사해 본다. “슬픔이여 안녕.”

박시윤 yoon108104@naver.com

트윗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