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NDON BRIDGE IS DOWN!, 런던 브릿지가 무너졌다.’ 

작년 9월 8일 영국의 엘리자베스 여왕이 세상을 떠나고 영국의 리즈 트러스 전 총리에게 보고된 첫 문장이다. 이후 여왕의 서거 상황을 대비한 영국 왕실 대응계획 ‘런던 브릿지 작전’ 중 하나인 ‘유니콘 작전’이 수행되었다. 영국 정부와 왕실은 런던 브릿지라는 이름으로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에 나라의 혼란을 막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대응 작전을 세우고 있었다. 그중 유니콘 작전은 여왕이 런던이 아닌 곳에서 서거했을 경우를 대비해 계획된 작전이며 여왕이 여름 별궁인 스코틀랜드 밸모럴 섬에서 서거하며 이 작전이 시행되었다. 열흘간 이행된 장례 기간, 영국 전체가 큰 슬픔에 빠졌으며 전 세계에서 온 추모객이 몰려들었다. 이렇듯 70년간 많은 사랑을 받은 엘리자베스 여왕과 그녀의 나라 영국 이외에도 21세기에 여전히 군주제를 채택하여 ‘왕’이 존재하는 국가들이 있다.

군주제를 택한 국가일지라도 왕이란 존재가 소비되는 양상은 각기 다르다. 천황이라는 표현을 쓰며 신격화되는 일본, 나라를 대표하며 관광 문화로도 소비되는 영국과 같이 말이다. 형식은 다르지만, 소비된다는 점 그 자체만으로도 왕실이 존재하는 이유가 된다.

국가마다 전통과 문화가 다른 만큼 독특한 왕실 특징과 일화들도 여럿 존재한다. 특히 우리와 가까운 일본과 영국 왕실에 숨은 이야기들의 소개로 이번 글을 시작해볼까 한다.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인 만큼 가장 보수적인 일본 황실은 강압적인 결혼과정 및 생활로 유명하다. 이는 일본 궁내청의 특징 때문이다. 일본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며 일본 정부 기관 중 하나인 궁내청은 일본 황실 일원들의 생활을 감독하는 특권을 얻게 된다. 그렇기에 황족들의 생활은 궁내청에 의해 엄격히 제약받는 것이다. 결혼할 상대의 적합성과 같은 중대한 사안부터 평상시 의복과 같은 사소한 사안까지 모두 궁내청에 의해 지정될 정도이니 말이다. 특히 여성에 대한 황실 일원들의 인식은 여전히 과거에 머물러 있다. 그래서 황실에 시집온 여성들은 모두 엄청난 시집살이를 겪게 되기에 황실 신붓감에 오른 여성들은 어떻게든 그 자리를 피하고자 한다. 이는 미치코 상황후나 마사코 황후의 결혼과정과 결혼 생활에서 알 수 있다.

현 마사코 황후의 시어머니인 미치코 상황후는 일본 최초의 평민 황후라는 이유만으로 고된 시집살이를 당했고 이로 인해 실어증에 걸리기도 하였다. 하지만 피해자였던 그녀는 또 다른 가해자가 되고야 마는데 그 대상이 바로 첫째 며느리인 마사코 황후이다. 마사코 황후는 외교관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어렸을 때부터 오랜 해외 생활을 하였고 이를 통해 서구적이고 현대적인 사고방식과 다양한 경험을 하며 자라났다. 또한, 하버드대와 도쿄대학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함은 물론 대학 시절 당시 외무고시에 합격하며 일본 최초의 부녀 외교관이라는 타이틀을 가질 정도의 수재였다. 이렇듯 일본 외무성에서 OECD 담당 외교관으로서 해외 공무를 다니며 자신의 커리어를 열심히 쌓아 가던 그녀는 86년 스페인 엘레냐 공주의 영접식에서 현 나루히토 천황을 만나게 된다. 그 자리에서 마사코 황후에 반한 나루히토 천황은 약 7년 동안 그녀에게 청혼하였지만, 보수적인 황실에 시집가면 자신의 커리어는 무조건 단절될 것임을 알고 있던 마사코 황후는 청혼을 거절했다. 또한, 궁내청에서도 마사코 황후가 나루히토 천황보다 키가 크다는 점, 그녀의 집이 딸만 낳은 점 등의 이상한 이유로 그녀를 신붓감에서 제외한다. 하지만 천황은 마사코가 아니면 결혼하지 않겠다며 강력히 궁내청에 항의하였기에 마사코 황후는 이 과정에서 엄청난 압박을 받게 되었고 결국 92년 12월 청혼을 받아들인다. 이 청혼에서 나루히토 천황이 ‘전력을 다해 당신을 지키겠습니다’라는 말을 했고 이는 아직도 일본 프러포즈 단골 대사로 쓰이고 있다는 후문도 존재한다. 그녀의 일대기를 담은 <일본 황실에 갇힌 나비 마사코>에 따르면 약혼 다음 해인 93년 결혼한 마사코 황후가 결혼 기념 첫 기자회견에서 남편인 나루히토보다 고작 15초 더 말했다고 황실 내에서 많은 비난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듯 시작부터 쉽지 않았던 그녀의 고된 결혼 생활은 마사코가 황후로 즉위하기 전까지인 2019년까지 이어졌다. 마사코 황후와 나루히토 천황 사이에는 딸인 아야코 내친왕이 있는데 현재 황위 계승권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근현대 일본의 황실전범은 여성의 황위 계승을 원칙적으로 부정하고 있기에 나루히토 천황의 남동생인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와의 계승권 다툼이 일어난 것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아야코 공주가 천황을 계승할 방법은 고대처럼 친사촌 동생인 히사히토와 혼인하는 괴이한 방법밖에 없다. 하지만 연이은 논란으로 국민의 신뢰를 잃은 후미히토 일가와는 달리 겸손하고 성실한 모습으로 사랑을 받는 천황 가족인 만큼 80퍼센트 이상의 일본 국민은 아야코 공주의 황위 계승을 지지한다.

이렇듯 성별로 인해 왕위 계승과 신적강하가 이루어지는 일본과 달리 영국은 성별에 상관없이 계승 서열이 정해진다. 영국 왕실에서는 첫 번째로 왕관을 물려받게 되는 적자는 성별에 상관없이 군주의 첫째 자녀이다. 그렇기에 엘리자베스 여왕의 서거 이후 계승 1순위였던 찰스 왕세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이 당연했지만, 많은 영국 국민은 찰스를 뛰어넘고 계승 순위 3위인 윌리엄 왕세손이 보위에 오르기를 원했다. 왜 여론은 찰스 왕세자의 즉위를 싫어했을까? 바로 다이애나비 때문이다. 다이애나비는 찰스 왕세자의 전 왕세자빈으로 윌리엄, 해리 왕자의 어머니이다. 민중의 왕세자빈이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영국 국민을 포함해 전 세계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은 다이애나비는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진을 찍힌 여성으로 기록되고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압도적인 사랑을 받음과는 달리 그녀의 결혼 생활은 불행 그 자체였다. 찰스 왕세자가 결혼 이전부터 카밀라 파커와의 부적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 왕실의 이야기를 바탕으로 제작된 드라마 [더 크라운]에 이러한 대사가 등장한다. ‘I love you, whatever love means. 사랑해, 그게 어떤 의미이든 간에’ 이는 BBC와 진행된 다이애나비 최측근의 인터뷰에서 드러났듯이 카밀라와의 불륜을 알게 된 다이애나비가 결혼 전 찰스 왕세자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자 한 말이다. 지속된 불륜으로 충격받은 다이애나비는 여러 번의 자살시도와 거식증에 걸렸지만 이러한 상태에서도 공무 수행을 완벽히 해내야만 했다. 또한, 찰스 왕세자와 왕실 구성원들은 찰스보다 인기가 많았던 다이애나비를 배척했으며 타블로이드지에 악의적인 기사를 싣게 했다. 심지어 시어머니인 엘리자베스 여왕 또한 찰스의 불륜을 방관하며 다이애나비는 외로운 싸움을 지속하다 결국 96년 8월 찰스 왕세자와 이혼하였다. 하지만 이후 파파라치에 쫓기다 비극적인 교통사고로 삶을 마감하고 생전 그녀의 인터뷰를 통해 찰스의 불륜 행위가 알려지자 영국 국민들은 왕실과 찰스에 대한 큰 반감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카밀라와의 재혼 이후에 더욱 극대화되었다. 이뿐만 아니라 해리 왕자의 폭로도 왕으로 즉위한 찰스의 낮은 지지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해리 왕자는 2020년 1월 왕실로부터 독립한 이후 캐나다를 거쳐 미국 캘리포니아로 이주했다. 이 과정에서 해리 왕자 부부는 2021년 오프라 윈프리 쇼에서 왕실이 둘 사이의 첫째 아들인 아치의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왕자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는 내용을 시작으로 수많은 폭로를 이어갔다. 작년 12월부터 방영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해리 & 메건’에서는 “왕실은 형인 윌리엄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거짓말을 하지만 나를 보호하기 위해서는 진실조차 말하지 않는다”라고 강도 높은 비판을 이어갔으며 최근에는 형한테 폭행당했다는 내용을 담은 자서전 <스페어>를 출판했다. 이에 영국 국민은 왕실에 대한 높은 피로감을 토로했고 이는 왕실 지지도 하락으로 이어졌다.

“이렇듯 여전히 세계의 왕실은 많은 주목을 받으며 다양한 가쉽으로 들끓는 존재이다. 드라마나 영화의 단골 소재로 사용되는 한편, 시대상이 바뀔수록 왕실 존속에 대한 의문들도 많아지고 있는 요즘이다. 왕실이 있는 국가라면 피해 갈 수 없는 왕실 폐지론에 대해 알아보자.”

일본 왕실의 폐지론은 여성이 결혼하면 황실 직위가 박탈되는 신적강하 전통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실의 남성이 부족한데 여성들마저 차례차례 신분을 빼앗기면서 왕족 수는 감소세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 국민 89%가 반대한 마코 공주의 결혼 지참금 문제도 왕실 지지도에 큰 악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현재 일본은 황실 유지에 국민 세금이 많이 들어가는 것에 대한 국민의 불만이 날로 갈수록 커지며 ‘천황제 폐지론’이 급격히 물살을 타는 중이다.

전통적 군주란 국가를 대표하여 통치하고 일반 국민과 신분을 달리하는 절대적 군주였다면 현대의 군주는 대부분 입헌군주제를 통해 헌법을 따르는 상징적 군주에 해당한다. 군주에 대한 시대적 사고가 달라진 만큼 왕실의 존재에 대한 의구심도 계속해서 생겨나고 있다. 물론 영국에서의 왕실에 대한 지지도와 관심을 볼 때, 왕실 폐지가 현실화되기는 시기상조이다. 아직은 왕실이 사회 통합과 외교, 관광 분야에서 이익이 있다고 보는 의견이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찬반 여론이 크게 대립하는 이 상황에서 과연 언제까지 이 군주제가 지속될 수 있을지는 확실하게 긍정할 수 없는 상황이다. 구체적인 수치로 알아본다면 현재 영국은 2012년엔 75%였던 지지율이 작년에는 62%로 줄었으며, 왕실을 인정하는 의견이 10년째 지속적이게 감소 중이다. 왕실 지지층 상당수가 노년층인 가운데, 이런 설문조사는 젊은 층 사이에서의 결과는 또다를 것임을 시사한다. 영국 여론조사 업체 유고브가 지난해 5월 영국인 4,870명을 대상으로 입헌군주제에 대한 선호도를 물은 조사에서 18~24세 젊은 응답자 중 31%와 25~49세 응답자의 53%만이 ‘왕이나 여왕이 있어야 한다’고 답했다. 이는 65세 이상의 81%보다 훨씬 낮은 수치로 현재 찰스 3세는 대중의 부정적 인식에 따라 왕실이 폐지될 수도 있는 시대에 국왕으로 즉위한 것이다. 앞으로 찰스 3세의 평판 관리가 더욱 중요해진 것이다. 또한, 세금 문제도 존재한다. 영국 정부가 지원하는 왕실 유지비는 2020~2021년 회계연도 기준 8,600만 파운드, 한화로 약 1,381억 원이며 영국에서 제일 많은 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모두 왕실 일원이다. 이 가운데 2019년 해리 왕자 부부가 신혼집을 수리하는데 무려 36억 원의 세금을 사용했으며 메건의 의상비로만 결혼 후 반년간 6억 원의 세금이 사용되었다는 점이 밝혀지면서 왕실 폐지론이 급격히 힘을 얻었다. 이러한 가운데 영국에는 의회가 제안한 법안이 왕실의 이익에 영향을 미칠 때마다 왕실의 동의를 구해야 하는 의회 협약(king's consent)이 존재하기에 세금 축소 관련 법안도 잘 통과되지 못하는 상황이 이어지며 국민들 사이에서는 ‘왕실이 실질적으로 정치에 영향을 미치는 것 아니냐’는 분위기도 조성되었다.

그렇다면 왕실은 우리 곁에 어떠한 형태로 존재할 것인가.

“군주는 무엇보다도 매사에 자신이야말로 위대한 명성을 들을 만한 가치가 있는 사람이요, 높은 정신을 가진 사람이라는 점을 보여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_군주론 p.268

군주론에 의하면 리더는 사랑과 두려움의 합주라고 하였다. 그리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리더가 사랑받기 위해서는 어떠한 자질이 필요한가에 대한 생각도 달라졌다. 왕은 하늘이 내려보낸다는 믿음이 깨진 지는 오래이며 민주주의에서 왕실의 기능이 무엇인가에 대한 의문도 많아지고 있다. 이는 절대적으로 왕실을 지지하던 태국 국민의 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태국에서는 2020년 초부터 왕실과 정치 개혁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민주화 시위가 이어지고 있다. 입헌군주제를 90여 년 지속하는 태국은 군주에 대해서는 과거 봉건 왕조 시대의 관행을 아직도 유지하고 있다. 국왕과 왕실을 비판할 경우 최대 15년의 징역형을 선고받도록 헌법에 명시하고 있으며 극장에서 영화를 시작하기 전에는 모두가 일어나 왕실 찬양가를 불러야 할 정도로 말이다. 이러한 왕실의 절대적 권리는 현재 국왕의 아버지인 푸미폰 전 국왕이 2016년에 사망하기 이전까지는 문제 되지 않았다. 푸미폰 전 국왕은 쿠데타로 혼란스러웠던 태국의 정치적 안정화에 큰 일조를 했으며 평소 검소한 생활로 모범을 보이는 등 태국 국민의 정신적 지주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망 후 왕위를 계승한 현 국왕은 방탕하고 사치스러운 생활과 태국의 심각했던 코로나 상황에 독일로 도피하는 등 국민이 존경할 수 없는 행태를 보였고 이는 왕실 개혁으로 이어졌다. 이 모든 게 90년간 의문을 품지 않던 태국 국민이 왕실에 대한 신뢰와 믿음이 깨진 그 짧은 찰나에 벌어진 일이며 이를 통해 민주주의가 고도로 발전한 현대에서 왕의 자질과 평판이 왕실 존속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 수 있다.

이렇듯 앞선 이유로 군주제를 온전히 정당화할 수는 없겠지만, 군주제가 사회를 안정화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부인할 수는 없다. 특히나 영국과 같이 정체성이 뚜렷한 각각의 지역들로 구성된 나라에서의 왕실은 나라를 하나로 묶는 구심점으로 작용한다. 따라서 왕실과 국민은 군주제 폐지론보다는 현실적인 군주제 개혁론에 주목해야 할 듯하다. 군주제 개혁론에 따라 왕실은 시대의 흐름에 맞는 규범과 사회통념에 역행하지 않는 사회적 행보를 보여야 할 것이며 사회에 기여하는 바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을 장기적 목표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그러기 위해서 각국의 왕실은 저마다의 존재 이유를 설득력 있게 말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이러한 군주제 개혁론의 부상을 의식한 듯 영국 왕실은 매년 성명문과 왕실 홈페이지에 ‘군주는 천년 간 발전해온 헌법적, 대표적 의무를 수행하고, 국가 정체성·통합·자부심의 구심점 역할을 할 것이며 현재와 같이 국가 전체의 안정성과 연속성을 주고, 성공과 탁월함을 공식적으로 인정하며, 자발적 봉사의 이상을 유지할 것이다’라고 명시하고 있다.

‘군림하되, 통치하지는 않는다.’ 왕실도 변화해야 할 시기이다.

전현영  leoniejj12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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