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론가 훌쩍 떠나면 행복해질까? 야자수와 에메랄드빛 바다, 피나콜라다 한 잔이면 다 해결되지 않을까? 하기 싫은 일이 잔뜩 쌓였을 때나 안 좋은 일들이 연속해서 일어날 때, 우리는 종종 어디론가 떠나버리고 싶다고 말한다.

그래서 하와이에 갔다. 물론 쉽게 훌쩍 떠날 수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나름의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리고 나서는 모든 게 순조로웠고 점점 나는 다른 어떤 여행보다 이 여행에 기대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라니. 그것도 태평양 한가운데로! 바쁜 일을 모두 끝내고 가는 것이라 그 낯선 땅에서 나는 온전히 자유가 될 예정이었다. 비만 내리는 우중충한 이곳에서 벗어나 아무런 계획도, 생각도 없이 베짱이처럼 놀다 올 테야.

8시간의 비행과 긴장되는 입국심사를 거쳐 어렵사리 와이키키 해변에 도착했다. 가방에는 서머짓 몸 단편집과 잃어버려도 괜찮은 헤드셋 그리고 유치한 선글라스 뿐이다. 그러고는 햇빛에 잘 데워진 부드러운 모래사장에 앉아서 생각했다. ‘이제 뭐 하지?’ 넘실대는 파도를 바라본 지 30초 만에 나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그건 장소의 문제가 아니었다. 장소는 더할 나위 없이 완벽했다. 그럼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아, 문제는 이미 서울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너무 많은 기대를 가지고 와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 앞에 서면 즉각적으로 행복해질 것이라는 기대. 그 기대는 어떠한 논리 없이 그냥 두루뭉술하게 ‘당연히 그렇겠지’ 하며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막상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눈앞의 풍경은 예뻤다만 나는 여전히 똑같은 고민과 문제를 가지고 있는 존재였다. 지상 낙원이라는 하와이의 해변도 마법을 부리지는 못했다. 오히려 이곳의 아름다움을 즐기지 않는 건 나밖에 없는 듯한 기분에 역효과가 났다.

가만히 있어서 뭐 하나. 바다에 들어가 보자! 여름 바다에서의 수영은 상당히 오랜만이라 조금은 낯설었다. 그래도 따뜻한 바닷물과 고운 모래알이 발가락을 간지럽히며 빠져나가는 느낌은 좋았다. 초등학교 때 배운 수영 덕인지 물에 뜨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물에 어느 정도 적응이 되자 하늘을 보며 둥둥 떠보았다. 헤엄을 치던 발이 잔잔해지니 다시 머리가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주변에는 온통 가족과 연인이었다. 아이를 놀아주는 엄마, 아빠 혹은 물장난을 치는 커플. 식당에서 혼자 밥을 먹거나 집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법은 잘 알았지만, 바다에서 혼자 노는 법은 몰랐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다고 생각하고 다시 모래사장으로 나왔는데 아직 7분도 채 지났지 않았다. 앞으로 5일은 더 있어야 하는데···

다음 날 다시 바다에 나가보았다. 역시 이번에도 물에 오래 있지는 못했다. 대신 일광욕을 하며 노래를 들어보기로. 그러나 플레이리스트를 한참 둘러본 후에도 끌리는 노래가 없었다. 여행을 위해 골라놓은 앨범은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알로하 댄스라도 춰야 할 것 같은 멜로디에 더불어 가사가 영어라는 점이 유난히 거슬렸다. 결국 서울에서도 거의 듣지 않았던 5인조 아이돌의 노래를 골랐다. 물론 와이키키와 K 아이돌은 그리 어울리는 편은 아니다. 그러나 내가 찾는 건 이 휴양지의 분위기를 띄우는 노래보다는 익숙함을 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일이 생각하는 대로 풀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토라져 있고 싶지는 않았다. 생각보다 바다 수영이 만족스럽진 않았으면 어떠한가. 여전히 노을은 보고 싶은걸. 핑크, 연보라, 주황, 적갈색으로 시시각각 변하는 노을은 사라지기만을 반복하는 파도보다 오래 보고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언덕에 자리를 잡고 해가 지기를 기다렸다. 아직 붉어지려면 30분 정도 남았다는데 더 이상 듣고 싶은 노래가 없었다. 그래서 규칙을 어기고 서울에 있는 친구에게 페이스타임을 걸었다. 그곳은 내가 떠난 뒤로 비만 주구장창 온다는 이야기로 시작해서 앞으로 함께 가고 싶은 여행지까지 정해보았다. 그리고 조금 전, 7살쯤 되어 보이는 여자아이 셋이 쪼르르 다가와 수줍게 머리를 땋아 줄 수 있냐고 물어온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함께하면 무엇이든 즐겁게 만드는 친구지만, 그래도 이번 여행은 나 혼자 해내고 싶은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결국 함께함으로써 편해지는 방법을 택했다. 역시 좋은 건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해야 하나? 노을은 기대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하지만 해가 지고 나니 하늘이 갑작스레 어둑해졌다. 친구와 통화를 마치고 혼자 집으로 가는 길이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이른 아침에 얇은 비가 내린 탓인지 일어나자마자 무지개와 마주쳤다. 비가 상쾌하게 느껴지는 건 오랜만이었다. 나는 가벼운 산책을 다녀오며 먹음직스러운 연어 포케와 함께 돌아와 야외 테이블에 자리를 잡았다. 그렇게 혼자 밥을 먹으려는데 갑자기 맞은 편의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적당히 웃어주다 말면 알아서 돌아가겠지 싶어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친구는 먹느라 바쁜 나를 두고 열심히 자기 얘기를 해나갔다. 그래, 너도 혼자 여행하느라 어지간히 심심했구나. 다시 정신을 차려보니 어느새 질문이 날아오고 있었다. 언제 왔냐, 와서 지금까지 무엇을 했냐, 뭐가 제일 좋았냐 등 흔한 질문이었다. 나는 토요일에 왔고 아직 와이키키 밖에 못 가 봤어. 근데 사람도 너무 많고 복잡하더라. “맞아, 생각보다 별로이지. 와이키키는 과장됐어” 대화가 재밌어지는 순간이었다. 꽤 많은 양의 포케를 다 먹어갈 때쯤 되자, 나는 그 친구의 긴 여행기를 거의 따라잡고 있었다. 친구는 고향인 호주를 먼저 3달 여행한 뒤 지금은 미국을 도는 중이라고 했다. “그렇게 혼자 오래 여행하면 어때? 외롭지 않아? 나는 아직 이 자유가 너무 막연하게 느껴져. 오늘도 파도 앞에서 그냥 멍만 때리다 왔어.” “원래 그런 게 맞아. 그게 혼자 여행하는 것의 제일 좋은 점인걸. 너도 곧 즐기게 될 거야”

무지개를 봐서인지 아니면 그 친구가 해준 말 때문인가 마음이 전보다 한결 편해졌다. 계획도 세우기 시작했다. ‘하와이에 왔으면 이건 해봐야지’가 아니라 이 순간 내가 해보고 싶은 것을 생각했다. 바다를 봤으니 산도 보고 싶었다. 다이아몬드 헤드 트레킹을 가보자. 사이좋은 신혼부부도 싸우면서 내려오는 곳이라지만, 정상이라는 목표를 두고 계속 걷게 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시작된 트레킹은 산 입구부터가 아니라 해변에서 섬의 끝에 있는 산까지 가는 것부터 시작했다. 대부분은 내비게이션에 다이아몬드 헤드 주차장을 찍고 가겠지만, 나는 뚜벅이기에 버스를 타야 했다. 하지만 버스가 내려준 곳도 아직 주차장에서는 한참 떨어진 곳이었다. 그래도 출발선을 신경 쓰지 않고 차근차근 올라갔다. 나에게는 헤드셋이 있으니까! 좋아하는 노래를 흥얼거려도 아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편했다. 물론 영어 가사라고 해서 신경을 쓸 사람도 없어 보였다. 그렇게 앨범 두 개쯤 흥얼거리다 보니 어느새 나는 산 정상에서 해안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려가는 발걸음은 더 가벼웠다. 무언가 해냈다는 기분이 짜릿했다. 대학에 합격하거나 공들인 과제가 인정받는 것과는 달랐다. 걸어서 산에 올라간 일은 인생의 타임라인에 낄만한 일이 못 된다. 그러나 이 별거 아닌 일을 해보겠다는 결정은 오로지 나의 선택이었다. 해야만 해서 한 게 아니라, 내가 하고 싶어 한 일을 해냈다는 것이 기뻤다. 이런 성취감에 중독되어 나는 여행에 정을 붙여갔다. 오로지 큰 나무를 보고 싶다는 욕심으로 섬의 반대편에 있는 국립공원에 찾아갔다. 구글 지도도 알려주지 않는 막다른 길이었지만, 그냥 무작정 걸었다. 이후에도 나와 맞는 해변을 찾아다니며 여러 아침을 보냈고, 먹고 싶은 게 떠오르면 먹으러 갔다. 물론 안고 온 걱정들이 떠오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종종 떠올랐지만, 그리 크게 다가오진 않았다. 전에는 그 걱정들이 지니는 무게가 80 정도 되었다면 이제는 20 정도로 느껴졌다. 내가 단단해지니 상대적으로 그 걱정들이 무겁지 않았다.

돌아온 지 한참이 지난 아직도 누군가 "하와이 좋았겠다! 어땠어?" 물어보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린다. 가볍게 "좋았다"라고 하기에는 쉽지 않았고, 단순히 "힘들었어"라고 말하기엔 얻어 온 게 많다. 그래도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말은, 또 가고 싶다는 것이다. 전에는 여행이라는 낯선 곳이 나에게 어떤 깨달음이나 황홀함을 줄 것을 기대했다면 이제는 반대로 나에게 기대한다. 낯선 곳에 떨어져도 혼자 재미있게 지내다 오기. 혼자 맛있는 걸 먹고, 대중교통을 타고 숙소에 무사히 돌아오기. 하루에 이만 보씩 걷기. 대화가 시작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기. 심심할 땐 핸드폰 대신 책을 읽기. 여행의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바다에 누워서 해가 지기를 기다리며 있었던 일이다. 나이가 중후해 보이는 한 남자가 파도 가까이의 모래사장에서 무언가를 열심히 찾고 있었다. 그의 차림은 해변에 놀러 온 이들과는 달랐다. 헐렁한 바지에 남은 물 자국은 그가 그닥 깊지 않은 곳에서 나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그는 점점 노을이 짙어지는데도 떠나지 않고 계속 해변에 남아 모래를 뒤적거렸다. 그때 수영복에 귀여운 크롭티를 입은 내 또래의 여자아이가 그에게 가 말을 걸었다. “무엇을 찾으세요?” 노인은 바다에 들어갔다가 주머니에 있던 돈이 빠져버렸다고 얘기했다. 사실 나는 그의 대답을 듣기 전 이미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아이가 노인에게 다가갈 때 속으로는 그러지 않았으면 했다. 혹시나 돈을 달라거나 위협을 하면 어떡하려고. 그러나 나의 이런 걱정이 부끄러워지게 둘은 함께 한참 동안 모래사장을 샅샅이 살폈다. 결국 둘은 아무것도 찾지 못했지만, 여자아이는 노인에게 얼마를 잃어버렸나 묻지 않았고, 노인도 여자아이에게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둘은 그렇게 헤어졌다. 기다렸던 노을보다 훨씬 값진 장면이었다.

이 장면이 나에게 뻔한 격언쯤이나 남긴 것은 아니다. 나는 여전히 누군가를 마주치면 거리를 두려 하고 그 사람에 대한 단순한 추측을 그려 나가곤 한다. 외동딸을 혼자 태평양에 둔 우리 부모님 입장에서는 안심할 일이다. 그러나 내가 여행에서 마주친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대하지 않았다. 하와이에서 처음 마을버스를 타려고 기다리던 나는 버스정류장에 있던 아주머니에게 내가 가지고 있는 카드로도 버스를 탈 수 있냐고 여쭈어봤다. 아주머니는 나를 “Sweetheart”라고 부르며 내가 가진 카드로는 탈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본인이 손에 쥐고 있던 지폐와 동전을 나에게 건넸고, 나는 바로 손사래를 치며 지갑을 꺼내 나도 현금이 있음을 알렸다. 아주머니와는 금방 헤어졌지만, 나는 그날 아침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서 그 아주머니를 볼 수 있었다.

나는 아직도 종종 그날 바다에서 본 여자아이를 떠올린다. 버스정류장의 아주머니가 부렸던 마법도 기억한다. 그러나 이런 추억은 사진으로 남지 않는다. 내 인생을 바꿀 어지러운 경험도 아니고 누군가에게 자랑할 얘깃거리도 되지 못한다. 그래도 나는 내 안의 어딘가에 이런 장면들이 쌓여있을 것이라 믿는다. 그리고 나에게 여행은 이런 장면들을 모으는 과정이다.

나의 이런 심심한 여행기가 재미있었고 당신도 어디론가 혼자 떠나볼까 고민 중이라면, 나는 일단 해보라고 하고 싶다. (그게 안전한 곳이라면!) 막상 당신이 걱정하는 것은 사소하고, 오히려 생각지도 않았던 일이 더 큰 문제로 다가올 수 있다. 미처 준비하지 못했을 테니 당연하다. 그럼 이제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된다.

박한비  kkkanbi@naver.com

<저작권자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