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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표정이라고 일컫는 것들은 보통 어떤 모양을 지니고 있나요? 아마 눈·코·입이 제자리에 갖추어진 얼굴 형상의 익숙한 움직임을 표정이라고 가리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표정을 통해 눈에 보이지 않는 감정을 상대방에게 전달합니다. 표정은 곧 감정을 투영하는 파편의 일부로서 의사소통에 필수불가결한 현상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짚이는 점이 있습니다. 우리가 당연히 표정으로 받아들이는 표정의 개념 외에, 인간 보편적인 형태의 눈·코·입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존재들에게도 표정이 있을까요. 하물며 그것들을 이루는 구성요소, 어느 한 부위나 파생물에도 표정이 담겨 있을까요. 분명 우리가 예상치 못하게 느꼈을 낯선 표정의 기억. 익숙하진 않지만 분명히 어딘가에 있을 다양한 표정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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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심
누군가 나타나 묻습니다. ‘어릴 때로 돌아가 무언가 하나 가져올 수 있다면, 뭘 가져올래? 지금보다 더 어린 시절 말이야.’
저는 주저 없이 ‘순수함’을 택합니다. 그것은 오감으로 느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말할 수 있던 시절의 특권이겠지요. 자동차의 앞모습이 사람의 얼굴 같다고 말할 수 있던 그 시절의 것입니다. 저는 웃는 표정의 자동차보다는 무뚝뚝한 인상의 자동차가 더 좋았습니다. 무뚝뚝한 쪽이 어쩐지 조금 더 천천히 달려 안전할 것 같았으니까요. 그렇게 엉뚱한 생각을 하며 가족들과 걸어가던 순간들. 떠올리려 노력하면 흐릿한 기억과 함께, 너무도 많은 감정이 밀려오는 그 순간들은 더없이 아름답고 또 그리운 추억으로 제 가슴 한구석을 가득 메우고 있습니다.
한 점의 부끄러움 없이 사랑을 고백하기가 어렵고, 용서를 구하는 것이 힘들고, 감사를 표현하는 것이 민망할 때면, 저는 진심으로 바라곤 합니다. 자동차에서 표정을 발견했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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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틴
나는 똑같은 노래를 질릴 때까지 반복해서 듣는 편이다. 짧게는 하루, 길게는 몇 주까지도 똑같은 노래를 계속 듣는다. 이런 사람들에게 플레이리스트는 의미가 없다고 했다. 이미 천 번도 넘게 듣고는 질려버린 곡들의 무덤, 그런 것이다. 계속해서 한 노래만 듣고 있으면 남는 것은 그 노래 자체가 아니다. 내 이야기가 담긴다. 가장 설렜던 시작과 치열했던 여름이, 가장 어두웠던 새벽들이 노래에 담긴다.
평생 안고 살아갈 기억들이 가사와 함께 잠기고
그 자리에 떠오르는 것은 표정 없는 얼굴,
그게 참 낯설다. 가끔 몇 년 전에 듣던 노래를 찾으면 기억은 다른 사람의 가면을 쓰고 돌아온다. 내 기억이 아닌 것처럼, 차분하게 이야기를 다시 쓴다. 한 차례 멀어진 기억들에서 느끼는 무표정은 어디서 온 것인지. 그 낯섦이 마냥 싫지만은 않다. 모노노아와레(物の哀れ), 애상 비슷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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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이 빗방울
요즘 고민이 생겼다. 나를 싫어하는 친구들이 있는 것 같아 걱정이다. 아주 커다란 친구도, 아주 작은 친구도 나를 반기는데, 중간 정도의 크기인 친구들이 나를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다가가기만 하면 어찌나 소리를 지르던지.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우리 마을은 의리가 강한 것으로 유명해서 주변의 평판이 좋은 편인데도 내가 마음에 안 드나 보다. 우리 마을의 끈끈함은 7~8월에 열리는 계주 경기에서 시작한다. 여기서 친해진 친구들과는 쉽게 끊어지지 않는 전통이 있다. 이 전통은 엄마 아빠, 그 윗세대, 윗세대의 윗세대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문화라서 웬만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우리는 서로를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이런 우리를 싫어하다니, 중간 정도 크기의 친구들이 이해가 가질 않는다. 심지어 어느 순간부터는 방패를 하나씩 들고 다니더라, 치사하게. 괜히 오기가 생겨서 친구들을 데리고 가 그 방패를 뚫어보려고도 했다. 뚫릴 기미가 보이기는커녕, 내 몸만 쓸려서 너무 아팠다. 그날 이후로 방패 근처에 가지 않게 해달라고 소원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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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mmer lover
시트러스 향이 코를 간질이는 여름을 가장 좋아합니다. 이목구비 따위로는 전해질 수 없는 생(生) 함이 나를 계속 살고 싶게 하네요. 시체도 썩지 않는 겨울이 질투할 만큼 덥고 습한 공기에 몸이 끈적이고 머리카락이 부풀어 올라 나를 괴롭힌다 해도요. 타고 흐르는 땀방울에 살아있음을 느낍니다. 또 붉게 익어 버린 볼 따귀에 타들어 감을 경험합니다. 그리고 누군가는 말합니다.
‘그대여 난 그대에게 가장 밝게 빛나는 절망이고 싶어’
밝게 빛나는 절망. 나를 깨우는 동시에 나를 녹여 없애버리는 태양 빛. 나는 그런 당신을 여름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나의 여름은 내게 언제나 성실히도 따스했지만, 모랫바닥을 파고들 만큼 끝도 없이 내리쬡니다. 나는 세 개의 계절 동안 여름을 그리고, 여름의 한가운데서 여름을 아쉬워합니다. 빛이자 어둠인 당신을 나는 이제야 여름이라 부릅니다. 오늘 밤은 에어컨 소리를 배경 삼아 시트러스 향이 은은한 에일에 취해 여름을 건너가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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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소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아무리 타인이 보기에 훌륭한 삶을 살고 갔어도, 그 인생을 돌아봤을 때 그의 생이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는 생각을. 사회가 규정한 행복한 삶도 그의 삶을 미소 짓게 만들지는 못했던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다. 내 인생의 표정이란게 타인이 내 인생을 정리하고 평가한 것이 아니라 내가 살아가며 내 삶을 느끼고, 삶을 마무리할 때 그 감정을 표출하는 것 같다. 표정에는 ‘나의 감정’이 드러나니까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남들이 치켜세워주며 지나온 삶을 높게 평가해 주는 사람보다 스스로 웃는 표정을 짓고 있는 삶의 주인이 더욱 부럽게 느껴졌다. 되돌아봤을 때 스스로 만족하고 행복했던, 후회가 없는 삶 말이다.
내 인생을 마치고 난 뒤 돌아보면, 지나온 삶의 표정은 어떤 표정일까? 기쁘게 미소 짓고 있을까? 아니면 슬퍼서 펑펑 울고 있을까? 먼 훗날의 이야기는 지금 알 길이 없다만, 나의 삶은 마지막에 활짝 웃는 얼굴을 하고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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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실
참된 감정의 부재로 살아가는 것은 나에겐 가장 정상적인 방법으로 여겨진다.
가끔 축 늘어진 나의 육신과 정신은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또 무뎌지기를 갈망한다.
나의 노트 한편에는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이 적혀있다. 하지만 늘 그렇듯, 나를 아프게 하는 것들은 언제나 나를 둘러싸고 있다. 뾰족한 바늘이 빼곡히 달린 통에서 흔들리며 살아가는 것만 같다. 이럴 때면 차라리 모든 것에서 멀어지고 무뎌지기를 바라게 된다. 두려움, 그런 것들을 마주하지 않을 수 있는 자리에 가면 내 심신은 편해지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생각에 잠겨보곤 한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또 다른 아지랑이 하나가 피어나 다시 나를 괴롭게 만든다.
멀어진다는 건, 무뎌진다는 건, 외면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큰 위압감과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겠다는 패배감에 압도되어 도망치는 꼴이 된다는 것이다. 마주하지 않는다는 건, 엄마의 치맛자락에 폭 숨어버린 어린아이가 되는 것이다.
진퇴양난이다. 다가가서 멋지게 한껏 아파할 것인가? 멀어져서 비겁하게 아주 무뎌질 것인가. 이때 나의 두려움은 묘한 웃음을 머금은 채로 다가온다. 난 그의 웃음을 미워할 수도, 예뻐할 수도 없다.
“어때, 날 택하고 아파할래? 그저 무뎌질래?”
아아- 언제쯤 난 두려움의 표정을 그저 예뻐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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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로
언제부터 시작된 습관인지는 모르겠지만 글을 읽을 때면 항상 그 글을 쓴 사람의 얼굴을 상상해 보곤 한다. 사람마다 고유의 문체가 있지 않은지? 그 문체를 따라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일지, 어떤 얼굴을 가졌을지, 무슨 마음으로 이 글을 써 내려갔을지를 조심스레 나 혼자 떠올려 보는 것이다. 신기하게도 가끔은 내 추측이 맞아떨어질 때가 있는데, 평소에는 내가 추측한 것들이 맞았는지를 떠나 글을 읽는 한 사람으로서 그저 내가 읽은 텍스트의 인상을 오래 기억하고자 시작한 행동이라고 여기고 있다. 글에는 사람이 담겨 있고, 순간의 표정이 담겨있다고 믿는다. 아마 앞으로도 계속될 습관이자, 글을 읽는 한 수많은 사람의 얼굴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 확신하게 된다.
소리도, 이미지도 없이 잔잔하게 소통하는 방법은 한 자, 한 자 눌러 담는 글자로 가능한 게 아닐까. 각자의 인상을 지닌 단어가 모여 문장이, 문장이 모여 문단이, 그 문단들이 모여 하나의 완결된 글 도막이 완성됨으로써 비로소 보이는 필자의 표정. 이 일련의 과정들이 좋아 어떤 텍스트인지에 상관없이 글이라면 다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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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울
나는 바다를 좋아한다. 갈 곳이 정해져 있지 않을 때면, 나는 항상 주변 바닷가로 향하곤 했다. 바닷가에서 가만히, 별생각 없이 파도 소리를 들으며 멍하니 바다를 응시했다. 매번 같은 파도 소리였음에도 항상 그랬다.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바다는 나에게 다정했던 적이 없다. 무표정으로 나를 응시하는 듯했다. 내가 시험을 망친 날에도, 졸업하고 아쉬운 마음이 든 날에도, 행복하게 바다를 보러 간 날에도 항상 똑같았다. 이건 내가 아니라 바다가 다른 상황에 놓여있어도 같았다. 비가 무척 많이 와 한 치 앞이 보이지 않은 날도, 내리쬐는 햇빛에 사람들이 전부 바닷가로 모인 날도 바다는 똑같이 무표정을 지은 채 나를 대했다. 나는 이 점이 좋았던 걸지도 모른다. 언제든 같을 걸 알기에 좋아했던 것 같다. 내가 변해도, 바다가 변해도, 항상 같은 표정을 짓고 있기에 좋았던 거다. 매번 무표정으로 날 바라볼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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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모사와 고양이 꼬리
/플래시 포워드/
찡그리는 그것의 표정 속엔 경고 메시지가 있었다. ‘touch-me-not’. ‘만에 하나 당신이 나를 건드린다면 그땐 돌이킬 수 없게 될 거야.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겠지만 이 몸 안에 온갖 신경이 쏠려 있거든. 지난번에 보았던 얌전한 모습은 애초에 없어, 나는 늘 예민하니까. 마지막 경고야.’
마지막이라니. 나는 이 순간 여기서 너를 처음 본다. 정확히는 너의 그 표정을 처음 본다.
/플래시 백/
첫 만남은 그제 오후였다. 갑자기 강풍을 맞은 소나기 빗방울이 집 안으로 들이쳐 나는 집 안의 모든 창문을 닫아야 했다. 그리고 다시, 첫 만남은 집 안의 마지막 창문 속이었다. 너는 마당 구석 저 멀리에서 빗방울에 자꾸만 움츠러들었다. 나는 우산을 쓰고 마당에 나섰다. 축축하게 젖어 추욱 처져있던 이파리. ‘죽었을까?’ 나는 너의 옆쪽에 나란히 서서 우산으로 빗방울을 막아주었다. 죽은 줄 알았던 너는 다시 살아남아 비틀거렸고, 나는 다시 돌아온 너의 모든 것을 착각했다. 그리곤 썩은 나뭇가지를 들고 이파리를 툭 툭 툭 쉼 없이 건드렸다. 너는 빗방울을 맞는 것처럼 안쪽으로 끊임없이 움츠러들었다. 나는 더 세게 너의 모든 것을 나뭇가지로 찔렀다. 네가 더 깊숙하게 말려들었다. 그리고 너는 갑자기 움직임을 잃었다. 나는 나뭇가지를 놓고, 움직임을 잃고 달아났다.
/플래시 포워드/
나는 집으로 왔는데, 너는 어느 곳에 도착했니?
과거보다 더 먼 대과거는 기억으로 칠한 페인트가 자주 벗겨지곤 한다.
새틴/정휘진
동심/윤도진
미모사/홍기수
어린이 빗방울/문정윤
제로/최수경
미소/지승효
세실/박시윤
너울/김언지
summer love/김영원
홍기수 rltn03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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