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이란 감각된 것을 인식하기 위한 시공간적 여유다. 이를테면 화자의 말에 담긴 메시지가 청자에게 전달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뉘앙스다. ‘너 밥 먹었어?’라는 말에 실리는 반·비언어적 요소들은 대화 내부의 틈으로서 서로의 지각, 특히 듣는 사람에게 유용한 힌트로 작용한다.

‘저 시절 영화는 좀… 텁텁해. 색깔도 목소리도 없이, 완전히 밀폐된 앵글 속에서 인물이나 사물이 독백하는 것 같단 말이야. 그래도… 무언가 우릴 끌어당기는 매력이 있는 것 같아.’

얼마 전 데이미언 셔젤 Damien Sayre Chazelle의 <바빌론 Babylon>을 보고 1910년대부터 1920년대까지 제작된 흑백 무성영화를 재고하게 되었다. 빛바랜 그 시절 필름을 이제 누구도 대중의 유희 대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대신 일종의 유산으로 남아 사유의 장으로 기능한다. 이 흑백 무성영화를 톺는 과정에서 어떠한 ‘인력引力’을 생각할 수 있었다.

동시대 영화의 스펙터클은 다양한 속성의 이미지 군락에 우리를 앉혀놓는다. 이는 몸짓과 음성, 특수효과 등 다양한 구성요소로 이루어져 있으며,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영화 속 촘촘한 이미지 배열에 끼어들 틈이 거의 없다. 반면 무성영화는 영화를 이루는 이미지들이 느슨하게 얽혀 있다. 우리는 그것들 사이의 무수한 틈을 발견하기 쉽다. 관객은 그러한 틈을 직접 직조하면서 영화가 주는 메시지를 비교적 능동적으로 지각하게 된다. 그리고 무성영화가 틈을 만드는 인상적인 방식은 인물의 표정 묘사다. ‘클로즈업으로 인물의 표정을 앵글에 담기’는 끊임없이 우리를 영화에 참여하게 만든다.

인물의 얼굴에 나타나는 운동성은 ‘표정’이라는 단일한 개념으로 규정될 수 있지만, 그것은 또한 수많은 초상의 연속으로 이해할 수 있다. 즉 하나의 얼굴 속 표정들은 보는 이로 하여금 시간성을 짐작할 수 있게 함으로써 모호한 감정 변화를 느끼게 하고, 그것은 곧 존재를 인식할 수 있는 첫 번째 가능성으로 기능한다. ‘누가 여기에 있다’라는 생각이 표정 관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이를 미루어 보아 무성영화는 표정이라는 연속적 감각에 잘 이입할 수 있게 하는 매체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우리 스스로 표정을 바라보지 못한다. 물론 거울이라는 매개물을 통해 표정을 볼 수 있겠으나 이는 ‘바라봄’이 아닌 부자연스러우면서도 편집적으로 이루어지는 ‘확인’에 그칠 것이다. 결국 표정이란 객체의 외면에 드러나는 하나의 현상이며, 그러한 표정이 객체의 감정과 매우 밀접하게 연결된다. 그러므로 무성영화 속 표정을 조명하는 것은 빠르게 충돌하고 변모하는 세상 속에서 오히려 경직되고 위축되는 우리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성영화에 담긴 원초적 표현 행위에 집중한다면 세상을 바라볼 더 유연하고 넓은 시야각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영화 속 표정에 관한 담론은 지금까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정리됐다. 게오르그 짐멜 Georg Simmel은 “얼굴은 개별 요소들과 전체 인상 사이에서 일어나는 변화와 움직임을 통해 개별화와 통일화라는 미학의 근본적 원칙들을 수행해 낼 수 있다”라고 논한다. 짐멜에게 얼굴은 인간의 내적 인격, 즉 영혼을 직관할 수 있는 기하학적 장소다. 나아가 짐멜은 얼굴 안에서 육체와 영혼의 가장 미세한 ‘운동성’이 발현된다고 보았다.

짐멜이 얼굴과 표정의 포괄적 의미를 도출했다면 벨라 발라즈 Bela Balazs와 루이 델뤽 Louis Delluc, 장 엡스탱 Jean Epstein은 영화에서 드러나는 얼굴 및 표정에 대해 더 구체적으로 논한다.

발라즈는 영화 속 “인물의 표정 연기는 다른 어떠한 매체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강력한 표현력을 지닌다”라고 논하면서, “클로즈업을 통해 표정에 내재해 있는 특정한 감정들의 불안정성을 실재의 시간으로 표현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무엇보다 발라즈는 세계의 모든 존재가 특별한 외적 형상인 ‘인상人相’을 지니고 있음을 말하는데, 이는 고정된 인상과 운동성을 지닌 표정이 자아내는 대립이 매 순간의 감정 및 사유 변화의 강렬한 표현을 견인하는 것이다.

영화 속 표정에 대한 위 학자들의 의견을 전체적으로 아우르는 무성영화의 전성기와 동시대의 예시를 꼽자면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Carl Theodor Dreyer의 <잔 다르크의 수난La Passion de Jeanne d'Arc>(1928)과 톰 후퍼Thomas George Hooper의 영화들이 있겠다.

칼 테오도르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잔 다르크를 연기한 마리아 팔코네티의 표정은 운동성과 인상에 대한 일례다. 극은 잔 다르크의 재판 장면에 거의 치중되어 있으나 그 재판이 이루어지는 합리적인 이유는 드러나 있지 않다. 대신 극의 초반에 나타나는 잔 다르크의 인상과 재판이 진행됨에 따라 잔 다르크가 짓는 표정이 매번 충돌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잔 다르크의 심리가 실재로서 재현되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다. 또한 <잔 다르크의 수난>은 인물과 인물 사이의 거리감이 확실하게 표현되어 있지 않으므로 인물의 표정 변화는 서사가 흘러가는 방향을 짐작할 수 있게 하는 중요한 힌트가 된다. 결국 <잔 다르크의 수난>에서 나타나는 표정의 운동성은 영화 전체이자 그것을 구성하는 매개로 이해할 수 있다.

발라즈가 주장한 인상과 표정의 대립은 동시대 영화 속에서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톰 후퍼의 영화는 음 소거 상태에서도 충분히 서사의 흐름이 짙게 느껴진다. 이를테면 <킹스 스피치The King's Speech>(2010)에서 조지 6세를 연기한 콜린 퍼스의 초조한 표정 변화, 그리고 그것을 담아내는 클로즈업 기법은 인상과 표정을 크게 충돌하게 만든다. 특히 극 후반부 조지 6세의 연설 장면은 여러 몽타주로 이루어지는데, 다양한 인물들의 연설을 듣는 표정과 대본을 읽는 조지 6세의 표정이 반복적으로 교차하며 그들의 모호한 감정 다발을 하나의 실재하는 시간 속에 묶어둔다. 그 중심축은 클로즈업된 앵글 속 조지 6세의 표정 변화가 담당한다. 톰 후퍼의 다른 영화인 <레 미제라블Les Misérables>(2012)과 <대니쉬 걸The Danish Girl>(2016)에서 나타나는 인물들의 인상 또한 그들이 짓는 표정과 충돌해 가며 극을 이끌어간다.

델뤽과 엡스탱은 발라즈가 논한 ‘인상’과 비슷한 개념인 ‘포토제니’를 제시한다. 그들이 논한 포토제니란 “영화적 재생에 의해 그 정신적 특질이 증대된 모든 사물, 존재, 영혼의 양상”인데, 이는 짐멜의 ‘운동성’을 크게 전제한다. 그들에게 있어 포토제니적 영화 이미지란 ‘그 자체로 설명할 수 없으면서도 매 순간 변화하고 운동하는 유동적 이미지’를 가리키는데, 그러한 포토제니를 가장 잘 나타내는 질료는 ‘인간의 얼굴’인 것이다. 무성영화에서는 신체 일부나 주변 사물이 클로즈업으로 확장되고, 이후 인물의 얼굴과 연계되어 포토제니가 나타난다.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 City Lights>(1931)는 도시의 떠돌이와 꽃집의 눈먼 소녀의 애정 이야기다. 떠돌이는 소녀에게 눈 수술 비용을 약속하고 훗날 백만장자에게 수술비를 얻어낸다. 소녀에게 돈을 건네주고 도시에서 사라진 떠돌이는 얼마 뒤 상점 앞에서 시력을 회복한 소녀의 행복한 모습을 보지만, 초라한 행색 때문에 소녀에게 다가가지 못한다. 그러다 소녀는 떠돌이를 발견하고 불쌍히 여겨 동전을 쥐여 준다. 그들이 서로를 알아볼 방법은 손의 촉감뿐. 소녀는 떠돌이가 자신에게 사랑을 베푼 이임을 깨닫고, 둘은 마주 보며 미소를 짓는다.

<시티 라이트>의 전개 양상에서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맞잡은 손’-‘채플린의 표정’ 연계 샷은 불안정하고 모호한 감정에 시간성을 부여해 채플린 고유의 인상과 연속적 표정 변화의 충돌을 일으킨다. 또한, 시각적 요소뿐만 아니라 손이 지닌 촉감이라는 또 다른 감각의 표정은 영화 전체를 관통하는 포토제니로 이해할 수 있다.

한편 장 엡스탱의 <어셔 가의 몰락 The Fall Of The House Of Usher>(1928)은 작중 귀족인 ‘로드릭 어셔’의 가문이 붕괴하는 과정을 담는 이야기로, 사물의 형상과 인물의 얼굴을 빠르게 교차함으로써 포토제니를 수행한다. 주인공인 로드릭 어셔는 병에 걸린 아내 마들린의 초상화를 광적으로 남기려는 집착을 보인다. 그때 병세가 깊어진 마들린이 바닥에 쓰러지고, 로드릭은 마들린을 묘지에 묻는다. 그러나 로드릭은 묘지에서 스스로 걸어 나오는 마들린을 보고 충격에 빠진다.

<어셔 가의 몰락>에서 포토제니가 강력하게 나타나는 부분은 이야기의 중반부다. 로드릭이 마들린의 초상을 그리는 장면에서 집중하는 로드릭의 표정과 수많은 양초 앞에서 포즈를 짓는 마들린, 그리고 화실을 이루는 사물들이 앵글 속 단일한 피사체로서 각각의 몽타주를 구성한다. 로드릭의 손이 빨라질수록 몽타주의 교차 속도 또한 빨라지고, 마들린의 형상이 몇 개로 분열되어 마치 녹아내리는 듯한 화면 연출은 엡스탱이 의도한 포토제니가 성립하는 대목이다. 사실상 마들린이 로드릭 앞에서 포즈를 취한 것부터 쓰러져 관에 들어가기까지의 연출 자체가 <어셔가의 몰락>의 중심을 지탱하는 가장 중요한 포토제니로 이해할 수 있다. 그 외에 이야기 후반부, 세찬 바람에 휘날리는 주변 사물들과 마들린을 응시하는 로드릭의 표정이 교차하는 것 또한 엡스탱이 고려한 부차적인 포토제니다.

앞선 다양한 이론 속에서 무성영화에 적용할 수 있는 유효한 개념을 추린다면 ‘운동성’과 ‘클로즈업’일 것이다. 우리는 실생활에서 어느 한 부분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것은 비효율적인 행위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화에서의 응시 행위는 클로즈업을 통해 활발하게 실현되며, 우리에게 어떠한 ‘견딤’을 요구한다. 나아가 이는 객체에 대한 관찰을 넘어 객체가 느끼는 감정 수용의 체험을 통해 곧 삶의 방식으로 굳어질 것이다.

자크 오몽 Jacques Aumont 은 말한다.

“세상에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많은 사람이 존재한다. 각자가 여러 개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 이 시간에 상대방을 인식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제법 큰 열쇠는 상대방이 지니는 다양한 표정들을 헤아리는 것이다. 소통의 언어가 이미지로 이행되는 만큼 표정보다 중요한 ‘언어’가 있을까. 수많은 감각을 동시에 요구하는 요즈음 매체들과 피할 수 없는 이미지들 속에서 존재들의 표정으로부터 아날로그의 감각을 깨우고, 이를 통해 모호하고 재빠른 세상을 조금이라도 또렷이 인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오몽의 말처럼 각자의 여러 얼굴을 가늠하며 서로를 천천히, 깊게 이해해 보는 것은 어떨까.

힌트는 아날로그에 있다.

홍기수  rltn0315@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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