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예뻐라! 넌 이대로, 왕자님한테 시집가도 되겠네!”

“아니, 엄마. 그건 꿈이야!”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대체 어느 쪽이 몽상가이고, 어느 쪽이 현실주의자일까?

어머니의 말투를 봐선 거의 몽상가나 다름없는 수준이고, 딸은 그 몽상을 깨뜨리는 이른바 현실주의자 같은 얘길 하고 있다. 하지만 어머니는 실제론 그 꿈의 가능성을 추호도 믿지 않는 까닭에 그런 몽상을 쉽사리 말할 수 있는 것이고 오히려 그걸 허둥지둥 부정하는 딸 쪽이, 어쩌면, 하는 기대를 가지고 그렇게 허둥지둥 부정하는 것이려니 싶다. 세상의 현실주의자, 몽상가의 구별도 이처럼 착잡하게 얽혀 있는 것 같다고, 요즘 내겐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든다. 

<다자이 오사무, phosphorescence 중에서>

어릴 때부터 잠이 그렇게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어린이의 권장 수면시간인 8시간을 채워주려는 부모님의 노력 덕에 잠이 부족하지는 않게 살아왔던 것 같다. 그런데, 13살부터인가? 아마도 중학교에 올라가기 직전 겨울로 기억하고 있으니 맞을 거다. 그 무렵부터 지금까지 나는 그다지 깊게 잠을 잤던 기억이 없다. 어느 날은 과제를 하다 밤을 새웠고, 어느 날은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았고, 또 어느 날은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악몽에 허덕여서, 또 어느 날은... 어느 날은... 어느 날은... 매일 매일이 이랬다. 뭐, 그렇게 나는 잡다한 이유로 모두가 잠든 시간에도 꾸역꾸역 현실의 연장선상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점점 지쳤다.

기억이란 그게 현실이건 또 잠든 사이 꿈이건, 그 선명함에 차이가 없다면, 내겐 똑같은 현실이 아닐까? 

<다자이 오사무, phosphorescence 중에서>

어느 순간부터는 잠을 3시간을 자도, 8시간을 자도 언제나 피곤하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잠은 시간의 문제가 아니구나 싶었다. 내가 잠든 시간 동안 펼쳐지는 또 다른 현실이 문제였다. 쉬어도 쉬는 게 아니었다. 고로, 내가 꿈을 꾸는 한 난 온전한 숙면을 경험하지 못할 거라고 단정 지었다. 그 뒤로는 잠에 대한 집착이 사라졌다. 꿈에서 내가 살던 현실을 더 선명하게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곤 시간이 흘러 야자를 몰래 빼고 기숙사 침대에 누워 다자이의 <포스포렛센스>를 읽었을 때, 정확히 내가 되뇌던 말들이 문장으로 선명히 새겨진 걸 확인했다.

‘아, 이 사람 어쩌면 나랑 똑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그랬다. 처음으로 나와 비슷한 사람을 만난 것 같은 묘한 기시감. 그러면서도 한편으로 두려운 감정이 들었던 건, 나와 똑같을 정도로 비슷하게 생각하는 이 사람은 나보다 100년 정도 일찍 태어났다는 점이었다. 다시 말해, 껍데기만 다르고 내면이 일치하는 것이라면, 이 사람의 일대기가 곧 나의 미래가 되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내 남은 인생 전체를 미리 보기 한 것 같은 불길함. 그래서 더 열심히 이 사람이 쓴 모든 글을 한 자, 한 자 눌러 읽기 시작했다. 나와 다름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모든 작품은 물론 인터뷰, 짧은 도막글까지 모조리 찾아 읽고 몇 번을 읽고 또 읽고 또 읽었다. 원문으로 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 듬성듬성 알던 일본어를 제대로 공부하기 시작했다. 정확히는 일어가 아니라 일문을 공부했다. 글만 읽으면 되었기에 여전히 회화는 하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탁하고 들어온 문장이 있었다.

이 세상에서 나의 현실 생활만을 보고 나의 전부를 이해하는 건, 다른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하리라. 동시에 나 또한 다른 사람들에 대해, 이해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다.

<다자이 오사무, phosphorescence 중에서>

나도 다자이도 그 외 수많은 타인도 모두 두 세계에 살고 있다고 믿는다. 서로가 서로를 알고 인식하고 같은 기억을 공유하는 진짜 현실 세계와, 나만이 걷는 거리가 존재하는 꿈이자 또 다른 현실 세계. 그러니까 다자이가 쓴 글은 모두 전자의 세계에서 일어난 일이고, 나도 그의 글을 전자의 세계에서 읽는다. 즉 나와 그는 전자에서 같은 사람이 될 수 있고, 후자의 세계에서는 서로가 교류한 적이 없으니 분명 절반은 전혀 다른 사람이라는 믿음 아닌 믿음을 갖게 되었다.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나와 그는 전혀 다르다.’라는 믿음. 꽤 중요한 순간이었다.

그러면서도 또 한 가지 의문을 품게 되었다.

평소에도 사람들을 이해하려는 노력은 크게 하지 않는다. 내 사고 과정의 시발점에는 ‘타인의 전부를 이해할 수 없다‘는 대전제가 깔려있기 때문이다. 이해가 되면 되는대로, 안되더라도 실망하지 않는다. ’그럴 수 있지‘ 한다. 마찬가지로 나에 대한 이해를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는다. 나에 관해 간혹 오해하더라도 굳이 해명하지 않기로 한다. 전부를 알지 못할 거라면, 힘들여 부분에 대한 오류를 지적하고 싶지 않다. 비효율적이니까.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두 세계에 공통으로 등장하는 중간자의 역할을 하는 인물. 지금까지 딱 한 명을 현실에서도, 꿈에서도 만났다. 그리고 그 동일한 타인인 두 사람은 같은 이름과 얼굴, 성격을 가지고 있다. 분명 같은 사람이다. 동시에 철저히 다른 사람이다. 그래서 두 사람이라 표현하기로 했다. 이걸 자각한 나는 이 사람의 전부를 아는 걸까? 앞서 다자이와 내가 다른 사람이라는 걸 확신했던 때를 생각해 보면, 난 그 사람과 현실에서 유사했고, 다른 세계의 교류가 없었기에 그를 전부 알 수 없다고 판단했다. 다르다고 정의했다. 그런데 난 이 중간자를 또 다른 세계에서도 만난다. 그렇다면 나는 이 사람을 전부 알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볼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은 걸까? 마음이 복잡했다. 곱지 못한 마음이다. 집착이고 타성일 뿐이다. 무던해지려고 무던히 노력했던 지난날들이 산산이 부서진 듯하여 한없이 가라앉았다. 어디라도 떠나고 싶었다. 이 세계도, 저 세계도 왜 현실뿐일까. 아닌가? 난 그저 처음부터 끝까지 몽상에 사로잡혀 현실을 살지 못하는 사람일까? 난 완전히 비현실 주의자였을까?

나는 그 후로, 인간은 이 현실 세계, 그리고 또 하나인 수면 중 꿈 세계, 두 가지 세계에서 생활하고 있고, 이 두 가지 생활 체험이 뒤섞여 혼미한 지점에, 이른바 전(全) 인생이라 할 만한 게 있지 않겠는가, 생각하게 되었다.

<다자이 오사무, phosphorescence 중에서>

그 사람은 중간자이자, 내 안의 정제되어있던 모든 것을 악의없이 흐트러뜨리는 파괴자이자, 내 삶의 온전함에 도달할 유일한 열쇠였다. 생각이 복잡해질수록 멀리 떠나야겠다고 생각했다. 처음부터 떠날 생각은 아니었다. 반복되는 ‘현실-잠-현실-잠’의 무한 반복에서 그나마 내가 제어할 수 있는 ‘현실’의 ‘배경 화면’을 바꿔보자, 정도였다. 목적지는 교토의 용안사. 료안지라고 불러야 할까요?

가레산스이. 돌 정원이라고도 한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프랑스의 화려한 궁전 앞 꽃으로 가득한 정원과는 다르다. ‘정원’이라는 이름만 같을 뿐 본질도 외양도 완전히 다르다. 어쩌다 보니 신을 믿지 않는다. 종교가 없다. 누군가는 기독교를 모태신앙이라 하고, 누군가는 불교에 귀의했다고 한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부모님이 종교인이 아니었던 탓에 모태적인 믿음이 없었다. 불가항력적인 일이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무언가에 기대거나 산속의 작은 절에 귀의할 일도 없었다. 여유를 갖자고 다짐할 틈도 없을 만큼 현실에 절어있었다는 방증이다. 그런 내가 어쩌다가 ‘선’이라는 것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믿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스즈키 다이세쓰가 쓴 모든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지만, 단 한 줄도 이해하지 못했다. 이해해야 믿음이 생긴다. 이해부터 틀려먹었다. 다만 내가 바라는 건, 선의 정신을 완벽히 구현했다고 평가받는 이 료안지라는 가레산스이 정원에서, 나의 복잡한 속의 것을 완전히 비워낼 수 있을까 하는 기대감이다.

1시간쯤 걸었다, 지도를 켜고 무작정 걸었다. 2월의 교토는 한국으로 따지자면 11월 정도의 쌀쌀함을 갖고 있다. 무엇이든 과감히 버리기 좋은 날씨다. 얇은 코트 한 장을 걸치고 되지도 않는 체력으로 버스 대신 걷기를 택했다. 입구에서부터 조금씩 설레기 시작했다. 큰 절이다. 겨울이라 앙상한 나뭇가지가 선뜻 마음에 들어 눈에 가득 담았다. 군더더기 없이 마른 가지만 있는 나무가 가장 아름답다고, 언제나 생각해 왔다, 본관에 들어가 마주한 돌 15개. 어느 곳에서 봐도 이 돌 15개를 한눈에 보지 못한다고 한다. 한편으론 생각한다. ‘돌 15개를 다 보겠다고 이리저리 움직이는 건 분명 선의 정신이 아닐 거다’라고. 선에 다가가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도 하지 않기. 앉아있기. 소리를 듣기. 멍하니 몇 시간이고 해가 떨어질 때까지 움직이지 않기. 아무래도 “애쓰지 않기”.

다른 정원과는 다르게 서정이 없다. 표정도 없다. 돌과 나만이 ‘놓여’있다. 하늘은 지나치게 파랗다. 얇게 입고 간 옷이 체온유지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때쯤, 낮은 담 중간에 해가 걸렸다. 춥다. 그리고 완전한 고요함이다.

그 사람은 이렇게 말했지만 나는, 아아 이건 현실이야, 현실 세계에서 헤어져도 이 사람과는 저 수면 속 꿈 세계에서 다시 만날 수 있으니까 아무렇지 않아, 하고 꽤나 느긋한 기분이었다.

<다자이 오사무, phosphorescence 중에서>

료안지 석정을 나와 한참을 걸었다. 깊고 넓은 호수를 둘러싸고 빽빽한 나무와 숲길이 있었다. 찬찬히 걸으며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가끔 들린 까마귀 소리와 바람 소리만 기억에 남았다. 그리곤 갑자기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생각보다 내 모든 복잡함은 별일이 아니지 않을까? 나 이대로 괜찮지 않을까? 몸에 힘이 빠지고 걸음이 느려졌다. 국어 시간에 배운 승무의 “번뇌는 별빛이라”. 딱 이 대목이 맞는 표현이겠다. 다음 목적지까지 또 걷고, 버스를 타고 꽤 먼 여정이었다고 한다. 난 기억하지 못한다. 옆의 사람이 알려주었다.

“꽤 오래 걸렸지, 아마? 자칫하면 시간을 맞추지 못할 뻔했어.”

교토에는 4박 5일 정도 있었다. 료안지 외에는 세세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내내 마음이 고요했다. 이상하리만큼 차가웠다. 주로 밤에 돌아다녔다. 글을 읽을 수 있지만 최대한 읽지 않으려 노력했다. 음식점에 들어가도 메뉴판을 읽어야 하니 대충 시선은 다른 곳에 둔 다음, 메뉴판에 무심히 손을 올려 손가락이 가리키는 메뉴를 먹었다. 그 덕에 생전 먹지 않았던 노리튀김을 먹었다. (얇은 김을 튀긴 음식이다. 먹어도 먹은 것 같지 않은 식감이 특징이겠다.) 이것도 나름대로 좋구나. 이 고요함을 깨고 싶을 만큼 취하고 싶진 않다. 적당한 취기를 원해 사케 대신 맥주를 택한다. 아비의 맘보춤이 생각난다. 왜 나는 발 없는 새인 당신이 춤추는 걸 볼 때마다 여전히 슬플까.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맥주를 마셨다. 첫날은 아사히, 둘째 날은 기린. 셋째 날은 사장님이 직접 만든다는 수제 맥주를. 전부 생맥주라는 공통점을 공유한다. 이렇듯 정오의 맥주는 언제나 옳다. 어차피 죽 이어질 현실의 현실 속 잠깐은 기억이 흐려져도 좋지 않을까?

교토에서는 잘 자고, 잘 먹었다.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는 듯하면서도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그리고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곳을 떠나는 순간 모든 건 제자리로. 다시 혼란으로 점철된 타성이 가득할 거라는 걸. 오래전 봤던 영화에서 주인공이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바라는 건 너와의 현상 유지야!”. 현상 유지라는 말을 참 좋아한다. 지금, 이 순간은 늘 미래의 내가 그토록 바라고, 그리워하던 과거의 선명한 추억이 된다. 그래서 난 언제나 이 순간에 영원히 머무르고 싶다. 현실이 끊기지 않고 지속되는 건, 세계가 바뀐다고 할지라도 나라는 사람의 연속성 하나로 이어질 수만 있다면, 그 나름대로 이 순간을 아득히 즐기는 방법이 아니겠나, 하는 마음으로. 하지만 현상 유지가 가장 어렵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아무래도 괜찮다. 현실에서 모든 게 망가졌다 해도, 나에겐 꿈의 세계가 있으니. 어쩌면 인생이 한 번뿐이라는 억울함은, 모든 인간이 한 몸으로 두 세계를 살아가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기회는 언제나 두 번이었으니까. 그 두 번도 벅차다.

나는 거짓말을 했다. 아니, 역시 거짓말이 아니다. 나에겐, 현실 이야기를 한 거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날이면 아무것도 하기 싫어지고 그저 방안에서 가만히 비 내리는 창문을 보고 있고 싶다. 그러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할 정도가 되면, 제일 좋아하는 소설 한 권을 꺼낸다.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 비 내리는 도쿄타워의 모습을 가장 잘 표현한 문장을 담은 소설이라 좋아하기 시작했다. 내용은 슬프다. 차갑다. 축축하다. 그리고 한 문장이 눈에 밟힌다.

“함께 살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행복해”

재즈와 어울리는 문장이다. 특히 쳇 베이커의 쿨재즈. 어떤 노래도 상관없다. 쳇 베이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리곤 가만히 앉아서 이렇게 생각해 본다. 난 너와 이 두 세계를 모두 같이 살고 있으니, 있는 그대로의 너와 같이 살아가고 있어서 행복한 걸까? 아니, 우리가 행복한 적이 있긴 했었나? 시시각각 마음에 따라 변해버리는 내 물음은 너한테 닿을 수 있긴 할까? 그래도 넌 밤에도 여전히 밝게 빛나는 phosphorescence라 불리는 푸른빛을 닮았다고 말해주고 싶었어.

완전함은 몽상가의 것이다. 난 몽상가도, 현실주의자도, 비현실 주의자도 아니다.

아무래도 비워내긴 틀렸다.

최수경  waterglasses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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