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가며 때때로 나를 짓누르는 중력은 꽤 버겁다. 마냥 착하지도 못한 내가, 나아질 기미가 안 보이는 이 상황도, 어려운 우리의 관계도.

나쁘게 굴어도,

하나의 당연한 이야기를 온전하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이를 전달하려는 사람은 여러 전제와 이야기를 차근히 쌓아가며 상대가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죠. 수백 수천 년 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소설, 시, 영화가 우리에게 건네는 이야기는 한결같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차고 넘쳐도 늘 부족할 따름이지요. 당연한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노력을 요하는 일이라면, 하나의 당연하지 않은 이야기를 위해서는 무수한 노력이 필요할 것입니다. 당연한 이야기를 온전히 전하는 데에도 수많은 노력이 들어가는데, 무턱대고 “나쁜 건 좋은 거야!”라는 말을 꺼냈다간 지구는 돈다고 외치다가 정말 돌아버린 사람 취급을 당한 갈릴레오 갈릴레이 마냥 사회와 무언가에 크게 반항하는 사람 같아지기 십상일 거예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착한 성정 탓에 아파하는 사람들 때문에 언젠가는 이러한 이야기를 꼭 한번 하고 싶었습니다. 저는 이 글이 그들의 마음에 정당한 합리화의 이유가 될 수 있다면, 기꺼이 1633년의 갈릴레오 갈릴레이가 되어도 좋습니다.

제가 말하고자 하는 ‘나쁘다’의 정의는 무엇일까요? 이는 폭력적이고 비이성적인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혹은 절대적인 선함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것도 전혀 아니죠. 여기에는 ‘자신에게 솔직해지자’라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누군가에게는 ‘착함’이라는 것이 책임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렇기에 타인에게만 한없이 착하게 살아가죠. 반면 이들은 본인에게 가혹합니다. 남들에게 다정한 사람이 외려 그로 인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면, 그들이 어떻게 진정으로 착한 사람일 수 있을까요? 우리는 분명히, 건강한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 첫 단계는 자신에게 솔직해지는 것입니다. 우리 스스로에게 한번 솔직해져 봅시다. 내가 이토록 오직 타인에게만 이타적인 것이 진정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인가요? 당신이 못된 사람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못된 삶을 살라는 것은 더더욱 아니고요. 그저 자신의 목소리에 조금 더 귀 기울이고, 자신을 아껴주자는 뜻입니다. 굳이 사회적 시선을 내면화하여 스스로 그 틀을 견고히 만들 필요는 없으니까요. 나를 아끼는 범위에서 남을 아끼는 것이 나와 남 모두를 지키는 방안입니다. 그러니 나를 아끼는 선에서는 충분히 나빠도 괜찮아요. 나를 사랑하고 나에게 좋은 것들을 베풀어 주는 것은 절대 이기적인 것이 아니랍니다. 그러니 ‘나빠도 괜찮아’로 쓰인 문장은 ‘나를 사랑해도 괜찮아’로 읽을 수 있겠군요.

나쁜 상황일지라도,

얼마 전 아카데미 시상식을 보면서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 배우들의 수상에 눈물이 찔끔 나더군요. 아마 제 눈물의 원인은 양자경이 전한 유색인종으로서의, ‘전성기가 지난’ 여성으로서의 메시지였을 테입니다. 흠, 아니다, 아마도 키 호이 콴이 솔직하게 전한 과거의 영광을 뛰어넘지 못하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거예요. 아아, 그것도 아니면 정말로 그 이상한 영화가 제 마음속 깊숙이 박혀서일까요?

영화 <Everything everywhere all at once>에서는 조부 투파키가 만든 ‘everything bagel’이 등장합니다. 조부 투파키라는 인물은 알파 버스의 조이로서 모든 멀티버스에서 모든 것을 경험한 뒤에 역설적으로 모든 가능성을 소진하고 허무주의에 빠져서 죽음만을 바라고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리고 ‘everything bagel’은 허무주의에 빠진 그녀가 無의 상태로 돌아가기 위해 만든 장치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얹어버린, 즉 블랙홀과도 같은 존재이지요. 저는 조부 투파키의 상황이 현재 우리의 상황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이토록 암울한 생각이 자꾸만 듭니다.

2023년의 우리는 기회가 열려있는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기회가 열려있다는 것. 이는 어떠한 제약 없이 되고자 하면 될 수 있고 하고자 하면 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이 아름다운 문장은 역설적입니다. 기회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놓치는 것도 많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때로는 벅찬 후회를 느끼게 하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참 잔인하게도, 이 차가운 세상은 내가 놓친 기회를 잡은 사람들의 모습을 여러 매체와 SNS를 통해 생생하게 지켜보도록 만듭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 비참함에서 무뎌지기 위해 방어기제로써 냉소, 허무주의, 패배주의를 택해버립니다. 세상의 따스하고 아름다운 점은 철저히 외면하면서 어떠한 행동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치부하곤 하죠.

하지만 냉소, 허무주의, 패배주의를 무기로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을뿐더러 단지 자신을 계속하여 갉아먹을 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다름 아닌 바로 ‘googly eye’입니다. ‘googly eye’는 엄마인 에블린이 everything bagel로 들어가려는 조이를 구하기 위한 장치이자 다정함을 뜻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관계에서 다정함을 기대해야 합니다. 현시대의 허무주의, 패배주의 그리고 시니컬함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오직 다정함이기 때문입니다. 내가 괜찮지 않을 때, 나에게 괜찮아질 것이라는 말은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에겐 괜찮지 않은 나의 상태마저도 따스하게 감싸 안아 주고 인정해 주는 무언가가 필요합니다. 허무주의가 팽배한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바라는 것은 근본적이고 거대한 문제의 해결이 아닌, 우리를 따스하게 맞이해 줄 다정함이니까요.

영화에서 주인공인 에블린은 모든 멀티버스 중 가장 나약한 에블린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을 구한 것 또한 그였죠. ‘역설적으로 아직 되어 본 것이 적기에 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무한한’ 에블린이었기 때문이지요. 우리 또한 그저 무한한 허무주의에 빠져 있으면서 시니컬한 태도를 유지할 것이 아닌, 다정함을 무기로 하여 모두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자각해야 해야 합니다.

괜찮아.

Mary Oliver의 Wild Geese는 많은 미국의 대학교 기숙사에 붙어 있는 것으로도 유명한 시입니다. 대학교 기숙사에 이 시가 붙은 이유와 같은 맥락에서인지. 저는 이 시를 마주하였을 때 왜인지 모를 따스함과 더불어 얼굴도 알지 못하는 미국의 한 시인으로부터 받는 위로가 느껴졌습니다. 시를 쓴 자의 의도는 당연히 존재할 테지만 저는 수용자라는 핑계를 대며 자유로이 해석해 보고 싶어집니다. 시에서는 우리에게 착한 사람이 될 필요가 없다며 다정히 독자 내면의 강박을 녹이고 시작합니다. 하지만 착한 사람이 될 필요 없다는 것이 무작정 나쁜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닌, 우리의 본능이 가진 따스한 면에 집중하라는 점에서 다시 한번 시인의 깊은 생각에 감탄을 자아내게 합니다. 이후에도 화자는 ‘나’의 절망을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절망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이를 공유하려는 이상적인 관계의 모습을 보입니다. 내가 잘못하더라도, 나쁜 사람일지라도, 절망하거나 외로움에 울부짖는다고 하여도 나의 옆에서 다정함으로 무장하고 존재해 줄 누군가가 있다는 건 우리에게 거대한 안정감을 느끼게 합니다. 저는 이 시에서의 관계가 참으로 이상적인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나‘와 ’너‘가 어떠한 형태로 존재하든지 간에 서로의 따스한 본성에 집중하고, 서로의 절망을 다정함으로 대한다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때때로 불행한 현실을 견뎌낼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관계야말로 우리가 기대하고 경험해야 하는 관계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외전

‘나빠도 괜찮아.’ 제가 자칫 위험할 수도 있는 이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데에는 타고난 성정이나 환경 정도를 이유로 꼽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무책임한 말을 던지려던 건 아니지만, 아쉽게도 여러분의 기대에 부응할 만한 거창한 계기나 사건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이러한 생각을 가졌다는 것을 자각하게 된 계기는 명백히 존재합니다.

저는 아직도 가끔 아주 어린 시절을 떠올립니다. 그러면 끈적한 더위, 숨 막히는 공간들이 튀어 오르곤 하죠. 그때는 정말 아무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우르르 몰려다녔어야만 했던 특유의 분위기도, 그 아이들의 참으로 못되고 유치한 행동들도 나와는 결이 맞지 않았던 사람들도 말이죠. 사실 그땐 조금 거만한 생각을 했었던 것 같아요. 여기 있는 아이들은 나와 수준이 맞지 않아서 도저히, 도저히 견딜 수 없다는 아주 건방진 생각을 말이죠. 거기에 사춘기까지 겹친 저는 무척이나 냉소적인 사람이 되어있었습니다.

이렇듯 정말 한 톨도 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시절 그 아이를 처음 보고서는 우리가 절대로 절대로 친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그 아이를 보며, ‘사람들은 저렇게 착해 빠져야 좋아하는구나’ 생각하기도 했죠. 사실 그 이후는 기억이 흐릿해요. 어쩌다 보니 그 아이와 저는 8년이 넘는 친구 사이가 돼 있네요. 서로가 가장 친한 친구라고는 할 수 없지만, 꾸준히 서로의 안녕을 묻고, 또 바라고 있답니다. 생각해 보니 우린 참 좋은 걸 주고받은 것 같아요. 저는 그 아이를 통해 처음으로 세상이 주는 무조건적인 다정함을 느꼈고, 그 아이는 많은 걸 생각하면서 사는 편인데 그러지 않아도 된다는 걸, 때로는 좀 이기적으로 굴어도 된다는 걸 깨달았으니 말이죠.

박시윤  yoon10810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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