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줄 기타? 베이스 말하는 거 아니야?’라고 하며 이 글의 첫 문장을 쓱 훑어보고 있는 사람이라면, 베이스에 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일 거다. 물론 당신이 베이스에 대해 잘 모른다고 해도 줄이 4개인, 일렉 기타(이하 일렉)와 비슷한 베이스의 외관을 보여주면 분명 안다고 할 테다. 반면, 베이스의 소리는? 들려줘도 잘 모를 게 분명하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랬던 내가, 이젠 베이스 소리를 평범한 노래 속에서 찾아 듣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바뀐 걸까?

레드벨벳, 세븐틴 등 아이돌 전성기라 불리던 시기, 나는 한창 유행에 예민한 중학생이었다. 한 아이돌이 컴백을 하면 친구들과의 대화에 끼기 위해 뮤비와 해석본, 음원까지 전부 정독하고 등교했다. 쉬는 시간엔 그 아이돌의 노래를 부르며 어설프게 춤을 추었고 하굣길에선 자그마하게 노래를 틀어놓곤 친구들과 대화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는 일상 속, 나는 노래 취향이랄 것도 없이 K-pop이 내 음악 세계의 전부였다. 관심 있는 아이돌의 목소리가 들어간 노래라면 다 좋았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이 시절의 나는 마치 미련한 개구리 같다. 우물 밖의 많은 장르를 보지 못한 채, 듣던 아이돌 음악만 되풀이하며 앞에 보이는 노래들이 음악 전부라고 생각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하지만 이런 개구리에게도 탈출의 기회는 찾아오기 마련. 알고리즘이라는 밧줄이 우물 속으로 던져졌다. 알고리즘으로 나에게 뜬 영상은 베이스 솔로 연주곡이었다. 악기만 보이는 평범한 구도의 썸네일로 손가락이 이끌려 갔다. 귀에 꽂히는 쟁쟁한 소리를 기대하며 영상을 클릭했지만,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선율은 전혀 다른 소리였다. ‘둥-’하는 낮은 울림만이 머릿속을 한 바퀴 헤집곤 다시 빠져나갔다. 이 울림의 반복이 계속 이어졌다. 드럼의 리듬에 맞춰 베이스의 현을 엄지, 검지 번갈아 가며 튕기자 ‘두둥- 둥-’ 색다른 변주도 나왔다. 생각과 다른 선율이 흘러나와 신기한 정도로 그친 영상은 유튜브를 종료한 다음에도 가끔 떠올랐다. 이후 알고리즘이 아닌 검색으로 베이스 커버, 솔로 영상을 하나둘 더 찾아보았다. 이때부터 영상마다 조금씩 다른 연주 방법에 매료되어 다양한 장르에 숨어있는 소리를 들어보기 시작했다.

악기들은 음악의 중요 요소인 리듬과 멜로디 중 하나를 맡는다. 밴드 음악에서는 리듬을 담당하는 드럼과 멜로디를 맡는 건반이 대표적이다. 그렇다면 베이스는 어느 쪽을 맡고 있을까? 애매모호하게 서로의 영역을 이어주는 징검다리와 같이 양쪽 모두에 걸쳐져 있다. 드럼과 함께 리듬을 맞춰주며 일렉의 멜로디를 조금씩 나타낸다. 이는 내가 비주류를 찾아다니기 시작하던 무렵에 즐겨 듣던 Yonezu Kenshi의 loser라는 곡에서 크게 다가온다. 노래는 리드미컬하게 전개되는데, 공허하게 같은 일상만 반복하던 나를 대뜸 일본 길거리로 옮겨놓는다. 영문도 모르는 나의 손에 락카를 쥐여주곤 새하얀 벽에 낙서시키고, 길 가던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둥 못된 악동 짓을 같이 행한다. 그러곤 아스팔트가 깔린 거리 위에서 세상을 향해 우리는 루저라고 소리치는 듯한 곡이다.

노래를 처음 들었을 땐 보컬에만 집중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잘 들리는 보컬만 귀에 담기 바빴다. 사실 베이스 특유의 낮은 저음과 적은 음의 이동으로 높은음들에 묻혀 안 들리는 것이 컸지만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보컬보다 곡의 분위기를 만들어 주는 낮게 울리는 리듬에 더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화려하게 유혹해대는 소리를 걷고 가만히 낮은 선율에 눈높이를 맞추어 귀를 기울이면, 울림이 전해져오고 그루브에 맞추어 조금씩 달라지는 멜로디가 들린다. 그러다 잠깐 흐름을 놓치면 높은 선율이 파도처럼 밀려 들어온다. 그 속에서 나는 다시금 베이스의 리듬과 음을 찾아 듣는다. 보컬과 일렉을 선두로 나아가지만, 실질적으로 곡을 이끌어가는 건 드럼과 베이스임을 여러 번 반복해서 노래를 듣고선 차츰 깨달았다. 이후 나에겐 가만히 있어도 몸을 들썩이게 만들어 주는, 약간의 음이 섞인 베이스 소리가 더 중요하게 다가온다. 노래를 틀 때마다 멜로디가 깔아준 바닥 위에서 리듬은 성큼 내 앞에서 같이 춤을 춘다.

베이스는 연주하는 방법에 따라 같은 음이라도 우리 귀에는 다르게 들린다. 연주 방법은 크게 2가지가 있다. 슬랩과 핑거 피킹. 대부분 멋있고 잘 들리는 곡들은 슬랩이다. 엄지를 이용해 힘 있게 줄을 튕기는 주법인데 핑거 피킹에 비해 소리가 더 잘 들리고 겉으로 볼 때 화려하다. 나도 처음엔 화려한 슬랩에 빠져 기술이 가득 담긴 솔로 영상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보기에 훨씬 멋있었으니까. 마치 힙하게 차려입은 어린 소년이 남들의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걸어가는 모습 같다. 이리저리 색 맞는 보도블록 위를 춤추며 활보한다. 얼마 안 가서 나는 핑거 피킹으로 연주하는 영상들도 몇몇 보았다. 눈길을 사로잡는 멋진 테크닉은 아니지만 그루브를 느끼며 노래 끝까지 끌고 간다는 게 색다른 매력이라고 생각했다. 슬랩과는 다르게 정장 입은 직장인이 엄숙하게 걷고 있지만 속으로 리듬을 타며 길을 걷는 모습이 떠오른다. 다른 사람이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걷는 방법을 따라 말이다. 여러 혼용된 노래를 듣다 보니 단순한 그루브의 절제된 멋도 하나의 큰 매력점이었다.

D'angelo의 lady와 같은 노래처럼 전체적으로 잔잔하고 크게 튀는 부분이 없는 곡에서 그 점을 찾을 수 있다. 들어보면 알겠지만, 베이스 파트는 똑같은 루프를 반복하며 가사도 같은 부분이 반복된다. 마치 똑같은 집들이 놓인 미국 시골길을 30분째 보며 드라이브하는 기분을 받는 듯하다. 비록 똑같은 도로와 집들이지만 모여서 이루는 건 하나의 특색있는 지역 경관이다. 곡도 마찬가지로 반복의 연속임에도 전체적인 분위기와 그루브를 형성한다. 아무도 나서지 않고 묵묵하게 각자의 선율에 충실한 결과다. 밋밋해 보일지 몰라도 이것이 꿀렁하고 끈적한 분위기의 핵심이다. 슬랩과 핑거 피킹, 두 방식은 듣기에 반대의 주법일지 몰라도 결과적으로 같은 곡을 연주하는 것임은 분명하다. 각각의 취향에 맞추어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새로운 멋을 나타낼 수 있을 거다.

앞서 말했던 요소들을 기본으로 베이스라는 악기의 매력을 제대로 느끼려면 라이브가 빠질 수 없다. 현장에서야 비로소 전해지는 요소들이 많기 때문이다. 라이브를 접해 보지 않았던 시절엔 현장이나 온라인 공연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요새 카메라와 오디오, 마이크가 얼마나 잘 되어 있는데 비싼 돈을 주고 현장을 가서 들을까’라는 이상한 사고 덕택이다. 하지만 베이스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은 입을 모아 현장에 가서 실제 듣는 게 제일이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이쯤 되니, 나도 베이스 음악을 즐겨 듣는 사람인데 한 번쯤은 라이브로 들어봐야지 하는 마음이 점점 자라났다. 현장보다 쉽게 접할 수 있는 건 아무래도 라이브 영상이다. 들어본 결과, 영상은 베이스의 소리가 음원보다 확실히 선명하게 들렸고 현장에 있는 악기 소리가 어우러져 하나의 노래를 완성하는 게 대단하게 보였다. 하지만 음원과 다른 점은 베이스 음이 더 잘 들리고 편곡이 가미되었을 뿐이지, 여전히 별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곧 실제 내가 라이브 공연에 갔을 때, 옳지 못한 생각이라는 걸 알긴 했지만 말이다. 현장에서 직접 느껴본 베이스는 음악의 정체성이라는 걸 표출하고 있었다. 선명함을 넘어 진동 하나하나가 몸을 울리는 기분이었다. 드럼에 맞추어 심장이 뛰고 베이스의 현을 튕기는 행위에 맞춰 몸이 움직였다. 라이브로 베이스 음악을 느낀 나는 결국 베이스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말을 하게 됐다. 베이스는 라이브가 진짜다.

이제까지 내가 쓴 말들은 다른 사람들도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일 테다. 이번엔 개인적으로 베이스를 좋아하는 이유를 잠깐 해보려고 한다. 글의 초반에도 말했듯 베이스는 겉으로만 잘 알려져 있다. 그 속을 아는 사람들은 절대 많지 않다. 이 점이 난 좋았다. 일종의 '홍대병'이라고 할까? 평범한 대중 모두가 선호하고 좋아하는 악기는 아니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다른 사람이 공감하지 못하더라도 이 악기를 좋아하는 이유를 하나씩 만들어 채워나가는 게 혼자만 알고 있는 비밀 같기도 해서 좋았다. 음악은 미술과 달리 제3자가 노래에 대해 알려준다고 해도 쉽게 한 부분을 듣고 깨닫기 어렵다. 자신의 취향을 광활한 범위 안에서 찾아야 한다. 그 과정 안에서 내가 관심 있어 하는 베이스 소리를 찾아내는 게 즐거웠다. 대부분 장르를 가리지 않고 곡의 기초로 쓰는 악기이니 베이스 소리는 어느 노래를 틀어도 내 귀에 들려온다. 이렇게 차근히 내 소중한 비밀 컬렉션은 갈수록 늘어 가는 중이다.

이후 이리저리 다양한 장르의 베이스 음을 찾으며 많은 곡을 옮겨 듣던 나는, 밴드 음악에 빠졌다. 국내 밴드 음악에 말이다. 베이스의 매력도 느낄 수 있고 가사도 내가 듣고 이해할 수 있다는 게 국내 밴드의 장점 아닐까 싶다. 밴드 음악에서 악기는 보컬, 건반, 일렉, 베이스, 드럼으로 이루어진다. 적은 개수는 아니지만 손에 꼽을 수 있는 악기만을 가지고 다양하게 소리를 채워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밴드의 음원에서도 각 악기의 개성을 존중하듯 각 악기의 소리가 적절히 섞여 나는 듯했다. 스포트라이트가 어느 부분에 처져 있느냐에 따라 더 집중이 가기 마련이니 한 곡에 한 번씩 존재하는 솔로 파트에서도 각 악기의 선율을 들으며 즐길 수 있다. 처음엔 밴드의 베이스라는 악기에만 관심을 가졌지만 결국 노래를 구성하는 건 구성하는 악기들이기에 조금씩 다른 악기들도 귀에 들어오고 함께 어우러지는 조화에 매번 감탄하곤 한다.

아무것도 모르고 유행에만 편승했던 내가 다양한 노래에서 베이스의 선율을 찾고 즐기고 있다. 새로운 음악을 접하며 재즈, R&B, 케이팝, 밴드, 넓은 장르를 가리지 않고 들을 수 있었다. 더 나아가 베이스를 밴드부에서 연주하거나 독학으로라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까지 하곤 한다. 우연한 알고리즘 하나로 지금의 내 음악 체계가 생성되었고 넓어지고 있으니 기묘하고 신기할 따름이다. 이러한 작은 우연이 점점 커져 지금의 나를 만들어 주었다. 내가 베이스라는 악기를 통해 이런 과정을 겪은 것처럼, 글을 끝까지 읽은 당신도 우연한 계기로 새로운 경험을 만들어 나가면 좋겠다.

김언지  hs58600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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