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가 수능이 끝나고 가장 처음 봤던 영화는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이다. 개봉 당일에 보러 갈 정도로 기대하던 작품이었는데 정작 영화관을 나올 땐 불만에 가득 차서 나왔더랬다. 너무 캐릭터의 선함을 강조하다 못해 답답한 장면까지 연출하다 보니 주인공인 스파이더맨보다는 스파이더맨의 안타고니스트인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더 이입이 되었던 것이다. 나뿐만 아니라 주변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너무 착하기만 해서 답답했다.’라는 원성이 많이 들려왔다. ‘선함’이 장점인 스파이더맨처럼, 착하기만 한 주인공은 더 이상 매력적이지 않다. 요즘은 ‘나쁜 놈’이 대세!

언제부터 ‘나쁜 놈’이 인기를 얻었을까? 어렸을 적에 보았던 만화, 영화나 드라마들을 떠올려 보면 이상적인 히어로가 만인의 사랑을 독차지하였었다. 언제나 시민들의 안전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며 악한 인물에게까지 관용을 베푸는 정의로운 영웅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악역이 인기를 얻기 시작하더니, 영웅과 대척점에 선 악인이 주인공 역할을 차지하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 ‘미워할 수 없는 악인’에게 열광했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렸을 적부터 만화를 보든 영화를 보든, 이상하게 나쁜 놈 편을 들어주고 싶었다. 왠지 보다 보면 나쁜 놈이 더 불쌍한 것 같고. 뭔가 더 잘 됐으면 좋겠고. 그렇기에 어린 시절 내가 좋아하는 캐릭터는 전부 악역이었다. 그러기에 ‘왜 그렇게 주인공보단 악역이 더 좋을까?’라는 생각을 항상 가지고 있었는데, 영화 스파이더맨이 나에게 이 의문에 대해 생각해 볼 구실을 준 듯하다.

<스파이더맨: 노 웨이 홈>에서 주인공인 스파이더맨은 ‘당신의 친절한 이웃’이라는 수식어가 정말 잘 어울리는 영웅이다. 자신을 비난하고 일상을 망치는 사람들을 여전히 구하며, 악당들을 용서하고 교화시키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한다. 누가 뭐래도 훌륭한 히어로의 모습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 영웅이 아닌 인간 피터 파커가 치른 대가들을 생각해 보자. 하나뿐인 가족의 죽음, 꿈에 그리던 대학 입학 포기, 무엇보다 전 세계가 자신의 존재를 잊게 된다는 잔인한 페널티 등등. 모름지기 영화라 하면 주인공과 전혀 다른 세상에 사는 사람도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은 스파이더맨에게 이입할 수 없었다. “역시 세계를 지키는 영웅은 나와는 그릇의 크기가 다른 걸까?”라는 의문만이 들었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이 아니라 영화 내내 스파이더맨과 대립하던 닥터 스트레인지에게 이입이 되었다. 나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그렇게 느꼈을 것이다. 피터가 기억을 지워달라고 해서 흔쾌히 응했는데 자꾸 부탁한 내용을 바꾸고 싶다며 조르지를 않나, 악당들을 안전하게 처리하자고 했더니 교화시키겠다고 하고, 결국엔 일이 더욱 커져서 자신의 존재를 세상에서 지우기까지 하였다. 타의로 잔인한 사람이 된 듯한 닥터 스트레인지가 안타까워 보였다. 무엇보다 ‘나였어도 저랬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엔 주인공보다 주인공과 대립하는 인물에게 마음을 더 준 셈이다.

우리가 스파이더맨처럼, 기존의 선함이 장점인 히어로를 마냥 환영하지 못하는 이유는 대중들이 히어로에게 바라는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우리가 히어로에게 바라던 모습은 유일무이하고, 전지전능하여 우리가 직면한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존재였다. 슈퍼 히어로의 등장 초기, 완벽하게 선한 영웅이 등장했을 때의 배경은 사회적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였다. 영원한 우리의 영웅 ‘슈퍼맨’이 그렇다. 1929년부터 1939년까지 이어진 미국의 대공황 기간에 탄생한 슈퍼맨은 그 시기 미국인들의 심정을 대변하기라도 하듯이 ‘희망’을 상징하고 있다. 지금은 많이 볼 수 없지만 슈퍼맨 시리즈 중 사회 풍자를 주제로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을 정도이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히어로가 사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대리만족의 존재보다는 오락을 위한 창작물의 주인공으로서의 역할이 더 커졌다. 모두가 우러러보는 히어로에서 그저 등장인물 중 하나가 된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인공임에도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지 못하거나, 독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겼다. 내가 스파이더맨을 보고 크게 이입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보통의 사람이 히어로처럼 자기희생적인 영웅이 되기는 힘든 일이다. 그러니 사람들은 마냥 착하고 희생하는 주인공이 이해가 간다기보다는 답답하다, 바보 같다고 말하게 된다. 게다가 오락의 대상이 되었으니, 사람들이 자극적인 것을 추구하게 된 것은 당연할 터, 슈퍼맨만 해도 불살생의 원칙을 지키는 히어로이다. 아무리 악한 짓을 해도 상해를 입히거나 죽이지 않는다. 그러니 자극적이고, 피 튀기는 잔혹함을 원하는 대중들이 지루하다고 느끼고 선한 히어로들이 인기를 잃어가는 것도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제 대중들은 자신이 공감할 수 있고, 원하는 만큼 자극을 충족시켜 줄 수 있는 인물을 찾는다. 이타적인 히어로보다 ‘자기중심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악역에게 공감하고, 은근히 그들을 응원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당연히 히어로보다 자신과의 공통점을 많이 찾을 수 있는 데다, 악역이니 불살생을 고수하는 영웅들과 달리 작중 가장 많은 살인을 저지른다. 그러니 자극이 넘치다 못해 머리가 아플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주인공과 대적해야 하니 능력이 출중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어느 정도 능력도 없으면 어떻게 한 작품의 긴장감을 담당할 수 있겠는가? 동정심이 가는 서사는 있어도 호감, 없어도 매력이다. 불행한 과거사를 가진 악당은 독자에게 동정과 이해의 대상, 사연 없는 미치광이 악당은 이유 없는 비정상적인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남들과 다름’이 매력으로 다가온다. 심지어 독자는 선한 역을 보다 악역에게 더 관대한 모습까지 보여준다. 평소에 착한 사람이 한번 잘못하면 배로 비난받고, 나쁜 사람이 한번 잘하면 배로 호감을 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 악역이 인기를 얻게 된 것도 그렇게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런 인기에 힘입어 악역이 주인공이 되는 안티히어로물도 우후죽순 늘어났다. 안티히어로는 결과적으로 그냥 나쁘기만 한 놈인 악역과는 사뭇 다른 유형의 주인공이다. 한마디로 ‘나쁘지만 착한 놈’이다. 동기와 과정, 그리고 결과가 모두 ‘악’인 빌런과 달리 안티히어로는 선하지 못한 동기와 과정을 거치지만, 정의의 실현에 기여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안티히어로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 유형이자, 최근 인기를 얻은 창작물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유형이다. 마블 시리즈의 악동, <데드풀>이 안티히어로의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이들은 주인공이지만 정의감이나 의협심보다는 개인적인 동기나 이기심에 의해 움직인다. 기존 영웅 서사의 공감하기 힘들다는 단점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영웅 활동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동기가 필요한데, 안티히어로는 그 점을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데드풀만 해도 자신의 인생을 망쳐버린 것에 대한 개인적인 복수를 위해 빌런을 처단하기로 결심한다. 데드풀의 빌런인 프란시스는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잔혹하고 사악한 실험에 가담한 인물이다. 그 빌런의 실험체였던 데드풀은 실험으로 인해 얼굴이 흉측하게 변해버리고,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기도 힘들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는 누구도 복수를 하지 않고는 못 배길 것이다. 결국 복수에 성공하게 된 데드풀은 복수 대상이 하필이면 세상의 악이었기 때문에 개인적 동기에 의해 저지른 일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악과 맞서 싸워서 세상을 구한 것이 되었다. 내 복수도 하고 정의도 지키니 꿩 먹고 알 먹고다. 통쾌함이 두 배가 되니 대중들이 열광 안 할 이유가 없다. 이러한 점들도 모두 안티히어로의 매력이지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안티히어로의 모습은 따로 있다. 창작물 속 안티히어로는 인격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일반인과는 다른 성격적인 결함이 있으니, 히어로라는 이름을 달고도 이기적이다, 자기중심적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붙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어느 한순간은, 선을 긍정하는 순간이 온다. 인격적인 결함을 가진 인물로 묘사가 되고 있음에도 세상의 선한 가치를 인정하고, 그것을 지키고 싶어 하는 순간이 말이다. 그 순간의 감동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시종일관 냉소적으로 보이던 안티히어로가 모두가 실천하진 못해도 마음 한쪽에 묻어두고 있던 선함의 가치를 인정함으로써 우리가 진정으로 그에게 이입하고, 그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악역에 열광하고, 나쁜 놈이 히어로가 되는 시대가 오게 된 이유는 따로 있을지도 모른다. 현대의 우리는 공동체가 분열된 사회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 ‘우리의 삶이 더 나아졌으면 좋겠다’라는 마음보다는 내가 직면한 문제, 내가 얻게 될 손익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게 된 것이 현실이다. 공동체에서 흩어진 개개인은 자신의 이익을 ‘정의’라는 무형의 가치를 위해 선뜻 포기하려고 하지 않는다. 같은 공동체라는 의식이 희미해졌으니, 더 이상 하나의 공동체로 묶이지 않는 타인은 그저 외부인이자 배척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니 ‘나’에게 있어서 불특정 다수인 ‘모두’를 위해 희생하는 히어로의 모습에 공감하지 못하는 것이다. 게다가 자본주의와 성과주의로 점철된 세상에서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더 높이 올라가기 위해서 타인을 밟고 올라서는 행동도 불사한다. 공생하는 마음을 버리고 각자도생을 꿈꾸는 사람들이 태반이 되어버렸다. 개인플레이와 경쟁이 일상이 되니 타인을 이해하는 마음과 관용이 점점 사라져 간다. 반면 자신에게 물리적, 감정적으로 해를 끼치는 이에게 즉각적으로 복수하고 싶어 하는 마음은 더욱 커진다. 이러한 욕구를 악인과 안티히어로가 충족시켜 준다. 악인과 안티히어로는 상대가 실제로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자신에게 피해를 주면 가차 없이 복수 해 버린다. 자기감정에 말도 안 되게 솔직한 모습이다. 이러한 모습이 대중들에게 대리만족, 사이다 같은 감정을 선사한다. 실제 상황에서는 절대로 행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전후 관계나 옳고 그름 따위는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감정에 충실한 악인과 안티히어로의 모습이 사람들이 사회에서 얻는 스트레스와 이기적인 본능을 어느 정도 해소해 준 것이다. 어쩌면 악인과 안티히어로를 통해 속 시원함을 느끼는 것은 우리의 스트레스 해소 방법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악인이나 안티히어로가 인기를 얻게 된 배경이 위 같은 사회적 배경에 기반한다면, 어쩌면 악인과 안티히어로의 인기가 마냥 좋은 것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이렇게나 자신만을 생각하고, 이기적으로 변했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하니까.

선함의 현신인 영웅들의 시대가 지나가고, 악역과 안티히어로가 인기를 얻는 것은 당연한 수순으로 보이기도 한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유행이 오고 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평범한 인간인 우리가 선하기만 한 영웅에게서는 느낄 수 없던 공감대나, 나쁜 놈이 발산하는 우리의 심금을 울리는 매력을 보면 그것이 마냥 당연한 것은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나쁜 놈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매력 외에도, 우리 사회 나쁜 놈을 더 선호하도록 변한 것도 한몫했음을 이젠 부정할 수 없을 듯하다. 나쁜 놈이 인기를 더 얻게 된 모습을 보면, 스파이더맨을 보고 답답해하고 짜증 냈던 나의 모습도 이기적이고 선함을 잃은 마음에서 나온 것 일지도 모르겠다는 걱정이 생겼다. 이상하게도 나쁜 놈이 왜 매력적일까에 대해 생각해 보았더니, 앞으로 바보같이 착한 선한 역도 사랑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들이 우리가 잃어버린 따뜻함 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창작물 속 따뜻한 마음을 가진 영웅들에게 마음을 주다 보면 우리도 그런 사람이 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그래도 아직은 나쁜 놈에게 마음이 쏠리는 것이 사실이다. 나쁜 놈이 더 매력적인 이유가 이렇게나 많으니까!

지승효  seunghy562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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