빽빽한 도시는 틈이 없다. 지평선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오랜 일이고 건물과 건물이 서로를 잡아먹을 듯이 높아져 있다. 최대한의 인원을 수용하기 위해 정방형으로 지어 올려진 건축물들에는 너무 많은 정보가 담겨 있다. 이제 숨을 고르고,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여백을 가져온 현대 건축물을 찾아가 보자.

승효상, ‘수졸당’

건축가 승효상의 신념은 30년 가까이 공고히 지켜져 왔다. ‘빈자(貧者)의 미학’이다. 가난한 사람의 미학이 아니라 가난할 줄 아는 사람의 미학을 말한다.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한결같이 강조해 온 그는 건축을 통한 치유를 지향한다고 말한다. 옛 달동네가 그렇듯, 담벼락을 나눠 쓰고 함께 사는 공동체적인 지혜가 승효상이 추구하는 건축의 원리이다. 모여 사는 것, 나눠 사는 것의 아름다움. 즉 ‘빈자’의 미학인 것이다.

그의 대표적 건축물은 강남구청역 근처에 있는 수졸당(1993)이다. 수졸(守拙)은 ‘졸렬함을 지킨다’는 뜻으로, 현명해지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신은 어리석은 채로 있겠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편하고 합리적인 것 대신 소박함과 비움을 강조하는 이름이라고 볼 수 있다. 묘하게 사선 처리된 벽과 처마처럼 뻗어 나온 덮개가 전통적인 한국식 가옥과 닮았다. 집 중앙 쪽에 떡하니 위치한 안뜰과 뒤뜰은 마치 모든 공간이 기능을 가져야 할 필요는 없다고 얘기하는 듯하다. 실제로 승효상은 아무 쓸모 없는 공간을 일부러 배치하고 그것을 사유의 공간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옛날 한옥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사랑방, 정자 등을 현대의 집에 도입한 것이다. 수졸당의 매력인 흙과 나무와 돌 외에 아무것도 들여놓지 않은 마당은 비워둠으로써 오히려 제 몫을 하는 공간이 되었다. 그 무엇을 위한 공간도 아니지만,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비움으로써 채워진다는 것은 그런 의미다.
수졸당의 또 다른 특징은 바로 불편하다는 것이다. 동선이 복잡하고 여기저기 일부러 비워놓은 공간이 많다. 승효상은 이에 대해 집 안에서 사람이 끊임없이 움직이기를 바라는 것이 건축 의도라고 말한다. 움직인다는 것은 곧 살아있다는 것이며 거주자가 작은 불편에 연연하기보다 큰 욕심을 갖고 살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의 철학은 언제나 사는 사람의 행동 양식을 중심으로 돌아간다. 편리하지도 기능적이지도 않지만 거주자와 함께 사는 건축물. 수졸당은 그래서 승효상의 건축으로 완성된 집이 아니라 그 속에 사는 사람이 점점 완성해 나가는 집이다. 최대한 단순하고 무심한 구조로 만들어진, 사람이 사는 집.

안도 다다오, ‘본태 박물관’․‘뮤지엄 산’

안도 다다오 건축의 중요한 점 중 하나는 주변 환경과의 조화다. 특히 자연과 어우러지는 작업이 많은데, 그의 건축 속의 자연물은 조용하고 편안하게 자리해 공간의 일부로 인식된다. 안도 다다오는 물과 빛이라는 요소를 극대화하여 자연적인 명암을 만들고 정적이면서도 쉴 틈 없이 변화하는 풍경을 조성했다. 건축물의 소재로는 유리와 노출 콘크리트를 많이 사용해 특징적인 느낌을 주고, 실용 대신 자연과 더 가까이 사는 것을 강조했다. 콘크리트 입방체 건물로 유명한 사람이 자연을 말하다니 특이하다 싶지만 그의 철학은 구차한 치장이 배제된 최소한의 재료로 집을 세우는 것이다. 형태는 단순해도 자유로운 설계의 매력을 볼 수 있는 노출 콘크리트는 안도 다다오를 세계적 건축가로 만드는 데 일조한 제1의 오브제다. 그러한 그의 건축 작업을 국내에서도 몇 군데 찾아볼 수 있다.

제주 한라산 근처에 위치한 본태박물관은 미학적인 것을 넘어 주변 환경과의 연결까지 생각하는 ‘건축 환경’이라는 개념의 모범이다. 산자락에 있어서 경사진 대지의 성질을 그대로 가져오면서도 균형이 잡힌 박물관의 본체는 두 공간으로 되어 있다. 삼각 마당과 긴 사각 마당을 가진 공간들은 한눈에 보기에 일관성이 있으면서도 높낮이 차가 있어서 풍성한 공간감을 연출한다.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마크인 노출 콘크리트도 충분히 사용되어 단단한 느낌을 주고, 빛의 반사로 눈부신 색채를 조합해 낸다. 본태박물관은 4개의 갤러리와 본태가든이라는 정원으로 이루어졌다. 탁 트인 풍경 위에 지어진 햇살 가득한 건축물은 일상에서 벗어나 나에게 집중할 수 있는 자유로운 공간으로 세워져 있다.

또 하나의 걸출한 작품은 원주 산속에 위치했다. 산 깊은 곳에 지어진 뮤지엄 산은 오솔길을 따라 플라워가든, 워터가든, 본관, 스톤가든 등의 건물들이 이어져 있는 구조다. 플라워 가든은 붉은 패랭이꽃과 하얀 자작나무가 어우러진 넓은 공간이며, 워터가든은 본관을 물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는 고요한 물의 정원이다. 본관은 파주석 박스 안에 노출 콘크리트 박스가 들어가 있는 이중 박스 컨셉으로, 내부에 창을 크게 내서 사계절의 아름다움을 직접 볼 수 있게 했다. 조형적으로는 네 개의 날개형 구조물이 사각형, 삼각형, 원형의 빈 공간들로 연결되어 있다. 땅, 하늘, 사람 각각을 연결하고자 하는 천지인 사상이 담겨 있는 형태다. 스톤가든은 신라 고분을 모티브로 한 부드러운 곡선의 스톤 마운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모든 건축이 하나로 이어져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뮤지엄 산의 슬로건은 ‘소통을 위한 단절’이다. 투박한 아날로그를 통해 현실 속에서 잊고 지냈던 삶의 여유와 휴식을 느끼기를 권하는 것이다. 안도 다다오는 건물 본체뿐만 아니라 뮤지엄 산의 부지 전체를 박물관으로 하고 싶었다고 말하며, 그곳에서 하루를 보내면 자연과 예술에 대한 감성이 풍부해지고 새로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을 만들고 싶다고 언급했다. 주변 환경과 건물이 소통하듯이 건물과 인간도 소통하는 생생한 공간이 되기를 바란 건축가의 철학이 부지 여기저기에 드러나 있다.
안도 다다오의 작품에서 빛은 벽면 여기저기에 스며들어 그때그때 다른 얼굴을 드러낸다. 본태박물관의 마당이 그렇고, 뮤지엄 산의 통로가 그러하다. 안도 다다오는 어둠과 밝음을 강하게 대비시키는 데 빛을 활용하는가 하면, 때로는 흐르는 대로 두어서 빛 자체의 속성을 즐기게 했다. 그가 빛을 주된 건축 자재로 활용한 것은 그것이 자연을 건축 속에 끌어들이는 하나의 보장된 방법이기 때문이다. 빛이 쬐는 곳은 비어 있지만, 한편으로 빛이 들어옴으로써 완성된 공간인 것이다. 안도 다다오의 건축법은 빛이나 물 등의 자연물이 있는 그대로 흘러들어오게 두고, 집이라는 역할의 일부분을 그들에게 맡기는 방식이다. 그 순간 모든 소재들이 화합하며 빈 공간을 채워나간다. 때에 따라, 사람에 따라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는 다채로움이 건물에 들어서는 이로 하여금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규정되지 않은 공간이 자연의 차지가 되는 마법 같은 건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타미 준, ‘수․풍․석 박물관’

“한낱 인간으로 태어나 위대한 자연에 잠시 잠깐 어울리는 물건을 놓는다.”
건축에 대한 이타미 준의 생각이었다. 자연을 사람보다 상위에 두었던 그는 건축물의 소재와 조형적 순수함을 강조하며 무게감 있는 건축을 추구했다. 그림을 좋아했던 그의 건축물 스케치에는 자연적인 요소가 빠지지 않는다. 의도적으로 흙, 금속, 나무 등의 소재를 콘크리트와 대비시킨 건축을 하기도 했으며 그 와중에도 둘 사이의 조화를 잊지 않았다. 1980년대까지 일본에서는 유리와 철을 이용한 건축이 주를 이루었다. 이타미 준은 그 속에 건축의 진정한 야성미가 결여되었음을 지적하며 돌과 목재 등 토착 재료 위주의 원시적인 작업에 의미를 두었다.

수․풍․석 박물관은 물, 바람, 돌을 각각 테마로 한 세 개의 박물관이다. 제주도에 가장 많은 것을 테마로 한 이 박물관들은 이타미 준 말년에 제주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지어진 것들이다. 수(水) 박물관은 가운데 네모나고 커다란 웅덩이가 있고 천장에는 동그란 구멍이 나 있다. 태양의 움직임에 따라 하늘을 담는 물의 반사가 달라져 대자연의 움직임을 느낄 수 있는 공간이다. 풍(風) 박물관은 긴 복도로 이루어져 있는데, 중간중간 의자 같은 돌 오브제들이 있고 벽은 듬성듬성한 나무판으로 되어 있어서 앉은 채로 바람이 통과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석(石) 박물관은 건축물 앞에 손 모양의 돌 조각이 있어 가까이 있는 손과 멀리 있는 산방산의 대비를 느낄 수 있다. 하나로 묶어서 말하지만 세 건물끼리도 띄엄띄엄 지어져 있다. 모두 자연에 시시각각 반응하도록 설계되어 있으며 바다를 접하고 있는 서귀포시의 들판 위에 원래 그랬던 것처럼 놓여 있다. 속은 비어 있고, 조형은 전체적으로 넉넉한 느낌이다.
이타미 준에 의하면 건축은 내가 땅과 마주하기 위한 매개체에 가깝다. 모든 근원은 자연에 있고, 인간은 더 나은 삶을 위해서 집을 지을 뿐이다. 수․풍․석 박물관도 자연의 맥락 속에서 사람의 일시적인 거처로 지어졌다. 따라서 그의 건축을 ‘바람의 조형’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성글게 띄워져 있는 건물 사이를 생물들이 지나다니며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채워나간다. 제주라는 공간이 갖는 장소성을 읽어낸 날것과 같은 건축. 이타미 준의 작업은 그 자체로 바람처럼 비워두는 일이다.

일부러 빈 공간을 내고 비와 바람이 통하게 만드는 여백의 건축물. 그 안에 담긴 것은 본질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건축가의 마음이다. 수많은 빌딩과 아파트에 질릴 때쯤 이곳들을 찾아가 보자. 만나러 가는 여정까지도 당신이 느낀 건축의 일부가 될 것이다.

최소현  7_3_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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