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치 있는 이력서의 가치 없는 여백 - 홍익대교지편집위원회

성적표를 받는 날 주변에서 흔히 이런 대화를 들을 수 있다. ‘전공이 C0라니, 재수강을 해야겠어. 최소 B+는 맞아야지.’ 재수강 생각은 개강 날 하고 방학이니 일단 놀자는 권유에는 날카로운 말이 되돌아온다. ‘이번 방학에는 토익학원에 다녀야 해서 바쁠 것 같아.’ 무엇이 우리를 조급하고 힘들게 만드는 것일까? 우리는 취업에 필요한 이력서에 써야 할 몇 줄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 여백이 불필요한 여백일지라도. 이력서의 여백, 어디까지 채워야 할까?

1. 사진란 : 여러분의 용모가 궁금합니다.

이력서 최상단,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곳에 위치해 있는 사진란은 이력서를 쓰는 최후의 순간까지도 눈에 밟힐 만큼 존재감 있는 여백이다. 이 공란을 채우기 위해 취업준비생들은 외모를 가꾸는 데 시간과 돈을 투자하고 수차례 사진을 다시 찍는다. 기업은 그 사진을 신원 확인용으로 요구하는 거라고 말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최대한 잘 나온 사진을 고르고 골라 제출할 수밖에 없다. 채용자가 우리의 이력서를 검토하는 10분 남짓한 시간 동안, 우리는 가능한 한 모든 수를 동원해서 좋은 인상을 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람은 고용의 기회 앞에서 용모로 차별받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성별로 차별하지 말자거나 신분으로 차별하지 말자는 주장과 같은 층위에 있다. 기초적인 고용평등에 관한 문제고 당연히 지켜져야 할 윤리다. 그러나 막상 취업 시장에는 ‘예쁘고 잘생긴 것도 스펙’이라는 풍조가 있다. 상반신 사진을 위한 이력서의 여백은 이런 분위기에 부채질을 한다. 사진 속 외모가 인사 담당자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인상이 나빠질 것이고 직무 능력과는 관계없이 좋지 못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취업을 준비하는 입장으로서는 외모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는 부분이다. 외국계 기업의 이력서가 사진 대신 크게 이름을 써놓도록 되어 있는 것을 보면 부러움에 한숨만 나오게 된다.
언제부터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에서 외모는 능력치의 하나다. 여긴 알아주는 외모지상주의 사회고, 채용에 있어서도 그 세태가 자연스럽게 녹아들어 있다. 하지만 외모를 결정하는 데 개인의 노력과 자기관리가 얼마나 중요하든 간에 그것이 취업에까지 영향을 미쳐도 괜찮을까? 본인이 그렇게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력서 한 칸을 채우기 위해 얼굴에 돈을 들이고 입꼬리의 각도에까지 주의를 기울이는 취준생들이 많다. 불합리한 줄 알면서도 경쟁자들 가운데서 눈에 들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는 것을 생각하면 이력서의 첫 번째 여백을 회의적으로 곱씹어보게 된다.

2. 어학능력 사항 : 여러분의 언어능력을 확인하고 싶습니다.

다양한 이력서를 열람한 결과 빠지지 않는 고정적인 빈칸 중 하나인 ‘어학능력’은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 어학능력은 대한민국의 콤플렉스가 아닐까? 이 여백은 모든 기업이 지원자에게 바라는 자질인 것이다. 토토텝(토익 토플 텝스)은 물론이고 JLPT(일본어 능력시험), HSK(중국어 능력시험)과 같은 어학능력시험을 치루고 좋은 성적을 거둔 지원자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서 출발을 한다. 설령 유창한 외국어 실력이 자신이 지원하는 업종과 상관이 없더라도 말이다. 한국 사회에서 외국어 능력을 보유하는 것은 분명히 경쟁력이 되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부분이라고 생각이 들지는 않는다. 다만 어학능력을 증명하는 대중적이고 일반적인 방법이 유명한 어학시험의 점수이며, 이것이 모든 직업에 획일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우리 모두 어학능력에 대해서 작은 여백 한 칸이 주어진다. 이 한 칸은 어학능력이 불필요한 사람에게는 무한한 여백으로, 자신의 외국어 능력이 강점인 사람에게는 너무 좁은 여백으로 남을 것이다.
요즘 이슈가 되는 블라인드 채용은 어학능력란의 한계를 보완해 줄 해결방법을 제시한다. 지원자의 학력을 기재하지 않는 것처럼 어학점수도 기재하지 않는 것이다. 대신 면접 상황에서 외국어를 활용한 문제 해결 능력을 평가하는 등 지원자의 실용적인 어학능력을 평가한다. 이러한 방법이 취업준비생들에게는 또 다른 어떠한 부담을 안겨주겠지만, 적어도 획일적이고 무의미한 평가 방식에 변화가 생겼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3. 학력사항 : 어디 출신이세요?

학력사항에 기재된 목록에는 이력서를 제출할 기업과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큰 대학교와 전공, 학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출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기재 하라는 이력서의 뜬금없는 외침에 우리들은 순간 당황할 수밖에 없다. 대학교의 학점은 전공수업 이수과정의 성실도를 알아보는 척도로, 우리들이 원하는 공정한 직원 선발에 정당한 평가 잣대로서의 기능을 하기 때문에 이해가 간다. 하지만 경쟁력 좋은 중학교 고등학교에 나왔는지가 이력서의 한 여백을 차지한다니 중고등학교 입학도 취업준비 인가보다.
'명문' 이라는 수식어는 비단 대학교에만 붙는 것이 아니다. 고등학교, 중학교 심지어 초등학교와 유치원에도 간간이 이 칭호가 부여된다. 이 '명문'은 통상 학생들의 학업성적 향상에 이바지하거나 좋은 상위학교 진학생을 많이 배출하며 더 나아가 사회에서 유능함을 발휘하는 자들을 만들어내는 학교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오래 지속되면 전통이라는 속성이 덧붙어 학벌이 형성된다. 물론 좋은 학교에 들어가 학벌의 일원이 되었다 함은 그만큼 개인이 타인이 감히 헤아리기 힘든 노력을 쏟아부은 성과이기에 노력하면 성공하는 민주사회에서 이것을 부정하려는 의도는 없다. 다만 명문이라는 명예로운 훈장이 인맥과 더불어 경쟁의 공정성을 해치는 불명예스러운 일에 앞장서는 것이 우려되고 고등교육 수료를 위한 기본학문소양과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인성을 배우는 교육기관까지 스펙으로 쓰이는 현실이 안타까울 뿐이다.
다행스러운 건 블라인트 채용제가 아직 학력 역차별문제가 불거지는 등 완벽한 장치로서의 구실은 부족하지만 학력사항으로부터 불거지는 문제들을 없애주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빈칸들보다는 여러 이해관계가 얽혀 있어 불평등 해소가 어려운 고차방정식이지만 불필요한 여백이라는 사실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4. 경력사항 : 이 일을 능숙하게 해 본적이 있습니까?

경력사항은 본인이 지원하는 일에 관한 활동 내역을 기재하는 것이다. 그 분야에 지속적인 관심을 가지고 차곡차곡 역량을 쌓아온 사람이라면 이 칸을 좋은 자기 PR 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취업포털 잡코리아에서 기업의 채용 담당자 73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 결과 45.3%가 이력서에서 경력사항을 가장 중요하게 평가한다고 대답했다. 따라서 취준생이 가장 심혈을 기울이는 구간도 경력사항란이고, 으레 스펙을 쌓는다고 하면 떠올리는 것도 이 부분이다. 그러나 기업의 채용 정보에 심심하면 등장하는 ‘경력자 우대’ 앞에서 45.3%는 양날의 검이 되어 사회 초년생들에게 날아와 꽂힌다.
단기 아르바이트를 하더라도 쉽게 찾을 수 있는 문장이다. 경력자 우대. 관련 분야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는 사람을 우선적으로 채용한다는 말이다. 그야 기업의 입장에서는 같은 급여를 지급할 거라면 일 잘하는 사람을 두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신규 직원을 뽑으면서 실무 경력을 스펙으로 본다는 건 신입이지만 경력이 있는 듯한 사람, 신입이지만 근무 N년차 같은 사람을 뽑겠다는 얘기로 들린다. 대학을 갓 졸업한 취준생의 경력사항은 보통 학교 다닐 때 준비한 대외활동이나 인턴십 정도다. 요즘은 그 인턴 채용 시장에서조차 경력자를 선호하고 있다. 이런 마당에 대학에서 사회로 갓 진입한 신입은 절대 만족시킬 수 없는 수준의 신입 모집 공고를 보자면 차라리 이직하는 경력자를 뽑는다고 하지, 싶은 생각뿐이다.
하이 스펙이 당연시되는 취업 시장 흐름에 따라 신규 직원들에게 요구하는 조건이 높아져서 대학생의 경험으로는 도저히 기업의 필요를 충족하지 못하는 거라면 그냥 개인이 좀 더 노력해서 경력자급의 신입이 되기를 바라는 것보다 나은 해법들이 있을 것이다. 기업이 원하는 기술을 배울 커뮤니티를 제공해 주거나 신입 사원들을 회사 방침대로 교육하는 커리큘럼을 개설하거나 말이다. 아니면 대학과 협력하는 방법도 있다. 아무리 기업이 뭔가를 가르치는 곳은 아니라지만 당사에 딱 맞는 인재를 원한다면 시장에 어느 정도는 투자해야 하는 게 아닌가. 경력사항에 공모전만 냅다 써놓은 걸 계속 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5. 취미 여가 사항 : 여러분의 사생활을 알고 싶습니다.

이력서의 끝부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가장 불필요한 두 여백이다. 우선 신체·건강란은 지원자의 신체정보를 물어보는데, 혈액형까지 묻는 것을 보면 우리의 뼛속까지 궁금한 것이 틀림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력서에서 사진의 여백이 차지하는 명시적이고 암묵적인 힘도 부담스럽지만, 사진이 다 보여주지 못하는 정보까지 물어보며 지원자를 당황하게 만든다. 키와 몸무게, 시력, 혈액형까지. 내 키가 나의 업무능력에 영향을 주는 것일까? 물론 군인, 조종사 등 특정한 신체 능력이 필요한 직업이 존재한다. 하지만 또한 이러한 직업들은 특별한 신체검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다. 일반적인 이력서에서의 신체정보는 한마디로 무의미하다.
취업 정보를 공유하는 카페에서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민은 ‘님들 취미랑 특기 뭐 적었어요?ㅠㅠ’이다. 그리고 같은 카페에서 취미나 특기가 없는 취업준비생들을 위한 취미 생활을 추천해주거나 다양한 목적으로 만나고 있는 모임을 소개해주며 취미와 특기를 ‘만들어주고’ 있었다. 이 여백을 보며 든 첫 번째 생각은 취업준비생들에게는 취업과 특기를 꼭 직업과 연결시키려는 불안한 마음이 지배적이라는 것이다. 집에서 즐기고 있는 간단한 활동들, 주변을 정리하거나 요리를 하는 사소한 것들이 자신이 지원하는 분야에 맞지 않는 것이 업무능력이 없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두 번째 생각은 이러한 불안한 마음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설령 기업이 단순히 지원자의 여가시간 활동들이 궁금해서 이 여백을 마련했다고 해도, 지원자의 입장에서는 모든 면에서 직업과 연관된 활동들을 적는 것이 일관성 있으며 경쟁력 있는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취미·특기는 지원자의 모습을 알 수 있는 좋은 방법이 될 수 있지만, 그 방법이 이력서의 작은 빈칸이 된다면, 기업이 아무리 선한 의도를 가지고 있어도 그것이 지원자에게 닿지 못할 것이다.

6. 주거 재산 사항 : 여러분의 계층은 어디입니까?

학력사항에 출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적어야 하는 것과 비슷하게 지원자의 주변 환경을 알아보려는 요소로 느껴진다. 특정 직업 또는 기업은 일의 효율성의 증진을 위하여 직원이 일터와 작업실 또는 사무실에 되도록 가까워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럴 때는 주거 위치확인이 중요하기 때문에 주소를 반드시 밝혀야 할 때도 있지만 주거환경을 지나치게 상세히 적어내야 할 때도 있다. 어떤 아파트 또는 주택에 거주하는지, 현재 살고 있는 집이 전세인지 월세인지 기재해야 한다. 심한 경우 주택의 평수를 묻는 경우도 있다. 무심하다 싶을 정도로 냉정한 이력서에서는 우리의 가족도 재산의 연장선상에 존재한다. 부모님과 형제의 생사와 더불어 학력, 또 그들이 직장에서 어떤 지위를 맡고 있는지도 기재해야한다. 우리 부모님, 형제자매의 스펙이 곧 우리들의 스펙, 경쟁력이 되는 것이다. 순수 업무능력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연결고리를 찾을 수가 없는 요소다.

지금까지 이력서를 위에서 아래로 천천히 훑어가며 과연 이 빈칸이 우리 대학생들에게 어떻게 다가오고 있었는지, 또 이것이 우리 삶의 여백까지 채워줄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당장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대학생의 취업 현실이 눈앞에 다가왔음에 절박함을 느끼며 이력서에서 여백을 찾을 여유는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는 불필요한 여백을 채우도록 하는 요소들이 우리들의 삶의 방향을 좌지우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력서의 여백에 관한 사유가 유의미한 이유다.

김현섭, 김지연, 최소현 hskim_32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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